▲ 1920년대 이화여고 정구 선수들(위) 1930년대 평양여고 육상 선수들. ⓒ대한체육회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대한제국은 체육(스포츠)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근대적 의미의 체육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19세기 말은 일본과 청, 러시아가 한반도의 지배권을 놓고 각축하고 있을 때다. 이때 선각자들은 나라의 주권을 지키고 독립을 확보하기 위해 국민들의 몸과 마음을 튼튼하게 만드는 체육에 관심을 기울이고 이의 보급에 앞장섰다.

고종은 1895년 쇠퇴하고 있는 나라의 힘을 회복하기 위해 국민에게 내린 글에서 지육(智育)과 덕육(德育)에 치우쳤던 편향된 교육을 바로잡기 위해 체육에도 힘쓰도록 당부했다. 각급 학교는 고종이 내린 '교육 조서'에 따라 체조 수업을 교과 과정에 넣고 운동회를 열기 시작했다. 여기서 체조 수업은 오늘날의 체육 수업이다.

1895년은 제1회 근대 올림픽이 열리기 1년 전이고 유럽의 스웨덴과 덴마크, 독일 등에서는 나라가 어려움을 당했을 때 젊은이들의 몸과 마음을 튼튼히 키워 국력 회복의 원동력으로 삼으려는 국가주의 체육에 힘을 기울여 다른 나라들의 주목을 끌고 있었다. 체육의 시발점이 된 고종의 '교육 조서'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다.

"몸을 튼튼히 길러야 한다. 게으름을 피우지 말고 떳떳한 몸 움직임으로 맡은 바 일에 힘쓰라. 괴롭고 어려운 일을 피하지 않는 강한 정신력을 키우라. 근육을 키우며 뼈를 튼튼히 만들라. 병에 시달리지 않는 건강한 생활을 누리도록 하라. 너희들 신민은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고 나라를 위하는 마음으로 너희의 덕과 몸과 지를 올바르게 키워야 한다."

그때는 나라의 주인이 국민이 아니어서 뒷부분은 현실감이 없지만 앞부분은 요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에 앞서 1890년 5월 첫 여성 교육 기관인 이화학당에서는 체조를 정식 교과목으로 채택했다. 고종의 ‘교육 조서’보다 5년이나 앞서 있었던 일로 여성 스포츠의 출발점으로 봐도 무리가 없을 뿐더러 여성 스포츠의 움직임이 매우 선구적으로 작동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 여성 스포츠는 정구와 탁구, 농구, 배구 등 구기 종목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펼쳐졌다. 또한 학교 단위별 운동회와 지역 단위별 연합 운동회를 열어 여성들의 스포츠 활동을 장려했다.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나 태극기를 들고 처음으로 출전한 여름철 올림픽인 1948년 런던 대회 한국 선수단에는 유일한 여자 선수인 박봉식이 포함돼 있었다. 이 일은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단순한 여성의 첫 올림픽 출전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대한체육회는 런던 올림픽에 육상과 축구, 농구, 복싱, 역도, 레슬링, 사이클 등 7개 종목 67명의 올림픽 선수단을 구성했는데 이 선수단을 구성하기까지 각 경기 단체는 자기네 종목에서 한 명이라도 더 보내려고 다른 종목을 헐뜯고 같은 종목 안에서도 서로 비방하는 등 잡음이 많았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에 올림픽 선수단을 런던으로 보내야 하는데 8월 15일까지 통치권을 가진 당시 미 군정청이 비용을 마련해 줘야 참가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애초 인원대로 런던에 갈 수 있게 됐고 육상 원반던지기에 출전한 박봉식은 21명 가운데 18위를 했다.

한국 여성 올림피언 계보는 1952년 헬싱키 대회 육상 포환던지기 최명석으로 이어졌으나 1956년 멜버른 대회에서 끊겼고 1960년 로마 대회 육상 800m 이학자, 체조 유명자로 다시 이어졌고 1964년 도쿄 대회에는 154명의 전체 선수단 가운데 여자 배구를 비롯해 26명의 여자 선수가 참가해 본격적인 여성 올림픽 시대를 열었다. 이 시기 여자 배구는 도쿄 대회부터 1976년 몬트리올 대회까지 4개 대회 연속 출전하면서 여성 스포츠의 구심점 노릇을 했다.

▲ 1948년 런던 대회에 출전한 한국인 첫 여성 올림피언 박봉식의 원반던지기 경기 장면 ⓒ대한체육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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