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1년 서독 바덴바덴에서 열린 제84차 IOC 총회에서 서울이 제24회 여름철 올림픽 개최지로 결정된 뒤 조상호 KOC(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이 유치 서명을 하고 있다. 테이블 오른쪽부터 올림픽 유치의 일등 공신인 정주영 현대 그룹 회장을 시작으로 박영수 서울특별시장, 조상호 위원장, 사마란치 위원장. 1980년대 올림픽 운동에 참여했던 이들은 모두 타계했다. ⓒ대한체육회 90년사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40대 초반 이상 한국인이면, 스포츠 팬이 아니더라도 이제 막 방영을 시작한 칼러 TV에 비친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작고)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이 “쎄울~” 이라고 하던 장면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잠시 그날로 돌아가 본다.

1981년 9월 30일 오후 2시(현지 시간) 80명의 IOC 위원들은 서울과 나고야 가운데 한 곳을 선택하기 위해 서독 바덴바덴의 한 호텔 회의실에 모였고 그때로부터 1시간 40분 뒤 사마란치 위원장이 투표 결과를 발표하기 위해 TV 카메라 앞에 섰다.

사마란치 위원장은 상의 속주머니에서 메모지를 꺼내 들더니 ‘쎄울 52, 나고야 27’을 발표했다. 1978년 태릉에서 열린 제42회 세계사격선수권대회의 성공적인 개최를 계기로 시작된 올림픽 개최의 꿈이 불과 3년 만에 현실이 된 것이다.

누구도 믿지 않았던, 그래서 한국 취재진은 서울에서 간 1명과 몇몇 유럽 특파원이 전부였던, 누구도 믿을 수 없었던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사마란치 IOC 위원장은 제24회 여름철 올림픽 개최지가 결정된 뒤 기자회견을 갖고 “IOC가 한국의 수도 서울을 택한 것은 올림픽 운동의 승리”라고 선언할 만큼 시사하는 바가 컸다.

늦어도 한참이나 늦게 유치 활동에 뛰어든 한국은 남북 분단으로 전쟁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데다 국교가 없는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사회주의권 국가들의 대회 참가 불투명 등으로 IOC 위원들이 서울을 선택하기까지 큰 용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많은 IOC 위원들이 서울의 손을 들어 준 것은 올림픽을 정치적 오염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스포츠로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자는 숭고한 올림픽 정신의 발로였으며 짧은 기간이었지만 한국 국민의 열정적인 유치 활동에 감동한 결과였다.

일찌감치 승리의 샴페인을 준비했던 나고야는 경제 대국 일본을 향한 세계의 시선이 곱지 못한 가운데 서울의 공격적인 도전을 방관한 채 자만심에 젖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나고야는 기요카와 마사지(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수영 남자 배영 100m 금메달리스트) IOC 부위원장의 원맨쇼에 지나치게 기댄 나머지 막판 추진력을 잃었고 나고야 시민들이 자연 환경 파괴를 이유로 바덴바덴 현지에서도 올림픽 유치 반대 운동을 펼쳐 IOC 위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허점을 보였다.

확 줄여서 이런 과정을 거쳐 이때 이후 7년 뒤 서울은 제24회 여름철 올림픽을 열게 된다.

그런데, 서울 올림픽 개최 3년을 앞둔 1985년 북한은 올림픽 공동 개최를 주장하고 나섰다. 1964년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시작된 단일팀 구성을 위한 남북 체육 회담은 그동안 여러 차례 불발됐기에 북한의 올림픽 공동 개최 제안도 애초에 성사될 가능성이 크지 않았다.

북한은 서울과 나고야가 1988년 여름철 올림픽 유치 경쟁을 하고 있는 서독 바덴바덴 IOC 총회 기간부터 한국의 올림픽 유치 작업을 방해하더니 유치가 확정되자 "한반도는 휴전 상태이므로 언제 전쟁이 재발할지 예측할 수 없는 위험한 지역이니 개최지를 변경해야 한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며 서울 올림픽 방해 책동을 벌였다. 이런 가운데 북한은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 남북 단일팀으로 참가하는 제안을 불쑥 하기도 했다. 북한은 이 대회에 소련 등 일부 사회주의 나라들과 함께 불참했다.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IOC 위원장은 서울이 제24회 여름철 올림픽 개최지로 결정된 이후 여러 차례 한국을 방문해 올림픽 준비 상황을 점검하며 어떠한 경우에도 IOC 총회에서 결정한 개최지를 바꿀 수 없다며 필요하다면 자신이 남북 사이 문제를 조정할 수 있다는 점을 밝혔다.

1985년 2월 사마란치 IOC 위원장은 남북한이 동의하면 자신이 남북 체육 회담을 주재할 의사가 있다며 이 같은 사실을 남북한에 동시에 알리고 이에 동의하는지 여부를 회신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대해 한국은 3월 동의한다는 회신을 보냈다. 북한은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다가 7월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동의 회신을 했다.

이에 따라 사마란치 IOC 위원장은 10월 스위스 로잔에 있는 IOC 본부에서 IOC 주재 남북 체육 회담을 연다고 7월 24일 발표했다. 사마란치 IOC 위원장의 발표가 있은 직후인 7월 30일 정준기 북한 정무원 총리는 *제24회 올림픽 대회는 남북한이 같은 자격으로 공동으로 개최하고, *대회 명칭은 '조선 평양·서울 올림픽 대회'로 하고, *경기는 서울과 평양에서 똑같이 절반씩 나누어 실시해야 하며, *선수는 남북한 단일팀으로 출전할 것 등을 요구하는 성명을 내놨다. 한국이 범국민적인 노력을 기울여 유치한 올림픽을 가만히 앉아 있다가 슬며시 끼어 들겠다는 억지 주장이었다.

이와 관련해 사마란치 IOC 위원장은 8월 25일 성명을 내고 "올림픽 헌장에 따라 북한이 요구하는 공동 개최는 불가능하지만 가능한 한 많은 한민족(韓民族)이 참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일부 종목의 경기를 북한 지역에서 개최할 수 있을 것인지를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측과 협의하겠다"고 밝히면서 IOC가 지정한 날짜에 한국과 북한은 꼭 회담에 응할 것을 요청했다.

1985년 10월 8일과 9일 열린 제1차 회담에 IOC 측은 사마란치 위원장을 비롯해 6명, 남측은 김종하 KOC 위원장 등 8명, 북측은 김유순 북한 NOC 위원장 등 8명의 인원이 각각 참석했다.

우리 측은 북한의 참가는 보장되며 북측이 주장하는 공동 개최는 이 회담의 의제가 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또 북측이 IOC 헌장과 IOC 총회 결정 그리고 서울의 올림픽 개최권을 존중하면 일부 종목의 예선 경기를 북한 지역에 배정할 용의가 있다고 밝히고 사이클 도로경기 단체전을 북한 지역에서 출발해 서울에 도착하도록 하고, 개·폐회식에 남북한 선수단이 올림픽기를 선두로 해 각자 자기의 기를 들고 입장할 것과 대회 문화 행사에 북측이 참가할 것을 제의했다.

북측은 이에 대해 정준기의 성명 내용을 되풀이하면서 *대회 명칭을 '조선올림픽' 또는 '평양 ·서울 올림픽으로 할 것, *대회 개·폐회식도 평양과 서울에서 똑같이 할 것, *남북한이 같은 자격으로 공동조직위원회를 구성할 것, *TV 중계권료도 공동으로 분배할 것 등을 요구했다. 국제 스포츠 관계자 누가 봐도 무리한 주장으로 회담은 처음부터 어려움을 겪게 됐다.

IOC는 제1차 회담을 마무리하면서 북한이 주장하는 공동 개최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회담을 효율적으로 윤영하기 위해 제2차 회담의 의제를 *대회 개회식에 남북한 선수단이 공동으로 입장하는 문제 *북한 지역에 배정할 종목에 대한 협의 *문화 행사에 북한이 참가하는 문제로 제한해 채택했다고 발표했다.

1986년 1월 8일과 9일 열린 제2차 회담에서 우리 측은 *개회식에서 남북한 선수단이 같이 대열을 갖추어 입장하고, *핸드볼 배구 축구 예선 경기를 북한 지역에 배정할 용의가 있으며, *문화 행사를 남북한이 공동으로 하자고 제의했다.

북측은 공동 개최에 대한 IOC의 강력하고 일관된 주장을 의식해 공동 개최라는 말을 삼가며 23개 종목 가운데 11개 종목을 북측에 할애할 것을 요구하면서 뜬금없이 이번 대회에 남북한 단일팀이 출전해야 한다며 단일팀 구성 문제를 이 회담에서 논의하자고 주장했다.

우리 측은 올림픽뿐만 아니라 모든 국제 대회에 남북 단일팀으로 참가하자는 게 우리의 기본 원칙인 만큼 이 문제는 남북 당사자 사이에 논의할 수 있지만 이 회담에서 다룰 성격은 아니고 IOC가 채택한 의제와 관련한 토의를 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그러나 북측이 의제 논의를 거부해 회담은 제자리를 맴돌았다.

IOC는 북측이 제의한 남북 단일팀 구성에 대해 이는 남북한 당사자 문제이며 이 회담에서는 의제로 채택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회담을 마쳤다.

1986년 6월 10일과 11일 열린 제3차 회담에서 북측은 공동 개최나 다름없는 *6개 종목의 전 경기를 북한 지역에서 실시할 것, *대회 명칭은 서울에서는 '서울올림픽대회', 평양에서는 '평양올림픽대회'로 할 것, *올림픽조직위원회는 서울과 평양에 별도로 설치할 것, *남북한 선수단은 순서에 따라 별도로 입장할 것, *문화 행사도 서울과 평양에서 별도로 실시할 것 등을 제의했다.

이에 대해 우리 측은 제2차 회담에서 제의한 3개 종목의 예선 경기 외에 탁구와 배구의 모든 경기를 북한에 배정하고 개회식 입장은 남북 선수단이 3열씩 대열을 갖춰 6열로 들어오는 매우 구체적인 수정안을 제시했다. 우리 측이 추가로 배정하겠다고 제의한 종목 가운데 탁구는 북한이 1979년 평양에서 제35회 세계선수권대회를 개최한 적이 있었다.

IOC는 남북 양측의 제안을 검토한 뒤 *탁구와 양궁 2개 종목의 경기를 북한 NOC에 위임하고, *북한은 모든 올림픽 가족의 자유 왕래를 보장할 것, *사이클 도로경기 단체전을 남북한을 연결해 실시할 것, *축구 예선 1개 조의 경기를 북한 지역에서 개최할 것, *문화 행사를 남북한 지역에서 별도로 실시할 것 등의 중재안을 제시한 뒤 남북 양측은 6월 30일까지 의무적으로 회신할 것을 요구하고 어느 한쪽이라도 이에 동의하지 않으면 IOC 주재 회담은 결렬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IOC 중재안에 대해 우리 측은 6월 30일 동의한다는 회신을 보냈으나 북측은 탁구와 양궁의 북한 지역 개최는 받아들이되 제4차 회담에서 종목 추가 문제를 계속 토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IOC는 두 차례나 중재안에 동의하는지 여부에 대한 명확한 회신을 요구했으나 북측은 긍정적인 회신을 거부했다.

이듬해인 1987년 2월 12일 북측 대표단, 4월 22일 우리 측 대표단이 IOC에 소환되고 이어서 IOC가 대표단을 평양과 서울에 파견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제4차 회담이 7월 14일과 15일 열렸다. 우리 측은 회담에서 IOC의 중재안을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재확인하고 이에 대해 토의하자고 했다. 그러나 북측은 남북한 인구 비례에 의해 8개 종목의 경기를 북한 지역에서 열 것을 제안하는 한편 또다시 공동 개최를 주장하면서 대회 명칭과 조직위원회 구성, 개·폐회식에서 남북한의 동등한 자격을 요구했다.

회담이 제자리걸음을 하자 IOC는 우리 측과 사전 협의 없이 북측에 대폭 양보하는 내용의 수정 중재안을 제시하고 서울 올림픽 초청장 발송일인 9월 17일 이전까지 남북한의 회신을 요구했다. IOC의 수정 중재안은 남녀 양궁 남녀 탁구 여자 배구의 전체 경기와 축구 예선 1개 조, 사이클 남자 도로경기 개인전의 북한 지역 실시였다. 우리 측은 북한을 서울 올림픽에 참여하게 한다는 대승적인 차원에서 IOC의 수정 중재안이 최종 중재안이라는 점을 전제로 8월 17일 이를 수락했다.

그러나 북측은 우리 측의 기대와 *탁구 양궁 여자 배구의 북한 지역 개최는 받아들이되, *축구는 예선 1개 조가 아닌 전 경기를 실시하고, *사이클은 다른 종목으로 교체하고, *이들 종목 외에 1개 종목을 추가로 배정할 것을 요구했다.

IOC는 북측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9월 17일 이전에 별도의 회담을 갖자고 제의했으나 북측은 이를 외면하고 초청장 발송 연기와 IOC의 회담 주재 중지를 요구했다. 또 우리 측에는 남북 NOC간 회담으로 이견을 조정한 뒤 IOC의 중재를 받자는 새로운 제안을 했다. 우리 측은 IOC의 중재안을 수락할 것을 권유하면서 제5차 회담에서 기본적인 문제가 해결되면 남북한 직접 협의가 가능하다는 견해를 밝히고 제5차 회담에 나설 것을 촉구했으나 끝내 제5차 회담은 열리지 못했다.

북측은 10월 23일 "남한의 현 정권이 존재하는 한 서울 올림픽의 전도는 암담하며 선거를 거쳐 민주 세력이 집권하면 그들과 새로이 공동 개최 문제를 논의할 것"이라는 다분히 정치적인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이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가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남한의 대통령 선거 후의 사태 진전은 올림픽의 단독 개최 기도가 더욱 노골화 되고 있어 올림픽의 남북한 공동 개최가 불가능하게 되었으므로 현재로서는 서울 올림픽 참가를 신청하지 않을 것"이라고 1988년 1월 11일 IOC에 통보했다. 다음 날인 12일에는 김유순 북한 NOC 위원장이 성명을 내고 이를 재확인했다.

이후 1988년 6월에는 사마란치 IOC 위원장이 김일성 주석 면담을 위해 평양 방문을 시도하고 7월 임시국회에서는 북한의 참가를 촉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이를 판문점을 거쳐 북측에 전달했으나 북한의 서울 올림픽 참가는 이뤄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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