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전히 독일 팬들에게 인기가 높은 차범근 전 국가 대표 팀 감독.
▲ 차범근 전 국가 대표 팀 감독(오른쪽)과 사진을 찍은 호펜하임 팬.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독일에서 ‘팀차붐플러스’를 동행 취재하고 있는 스포티비뉴스 유현태 기자가 14일 쓴, 독일에서 '차붐'의 인기는 여전히 뜨겁습니다 제하 기사에는 1980년대 서독(당시) 분데스리가 최고 외국인 선수였던 차범근에 대한 현지 팬들의 기억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기사에는 이런 내용들이 있다.

#차 감독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이들에게 물었다. "저 사람이 누군지 아시나요?" 대답은 간결했다. "당연하죠. 붐쿤차. 프랑크푸르트의 위대한 선수."

#지나가던 호펜하임 팬들은 다짜고짜 사진을 찍자고 해 차 감독을 당황하게 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왔다, 차범근을 알지 못하냐'고 되묻자 젊은 프랑크푸르트 팬들은 미처 알지 못하더란다. 이야기가 길어지자 결국 주변에 앉아 있던 샬케 팬이 나섰다. 나이가 지긋한 그 팬은 "어떻게 차범근을 모르냐"며 대신 프랑크푸르트 팬들에게 설명을 해 줬다고 한다.

#1980년대 사용했던 사인지를 준비하는 정성을 발휘한 이도 있었다. 차 감독 역시 조금은 촌스러운 사인지를 보며 즐거운 추억에 잠겼다.

한국 축구의 전설 차범근은 이렇게 독일 축구 팬들에게 많은 추억을 남겼다.

글쓴이가 차범근을 처음 본 것은 까까머리 고등학생 때다.

차범근이 경신고등학교 2학년에 다니던 1970년 봄, 글쓴이 모교 제2 운동장에서 열린 축구 대회에서다. 모교 제2 운동장은 겨울에는 운동장 둘레에 얕게 흙을 쌓아 물을 가두고 얼려 스케이트장으로 쓰기도 하는 등 축구장으로 다져 놓은 그라운드가 아니었다. 여기저기 자갈도 있었다. 그러니 전국 규모 대회는 아니었고 서울시 대회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저 축구를 좋아하는 소년 눈에도 확 띄는 선수가 있었다. 터치라인을 타고 드리블을 하며 달려오는 모습이 탱크 같다고 느껴졌다. 스피드에서 상대 학교 수비수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고 수비수 한두 명 정도는 개인기로 가볍게 제쳤다. 그 무렵 표현인 ‘초고교급 선수’의 플레이를 학교 운동장에서 본 것이다. 탱크 같은 드리블을 했던 그가 바로 차범근이다.

뒷날 스포츠 기자가 돼 확인해 보니, 차범근은 이듬해인 1971년 청소년 대표로 뽑혀 그해 일본에서 열린 제13회 아시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AFC(아시아축구연맹) U 19 챔피언십 전신으로 20세 이하 대회]에 출전했다. 이 대회에서 한국은 결승전에서 이스라엘에 0-1로 져 준우승했다. 차범근은 고려대 1학년 때인 1972년 제14회 대회(태국)에 출전했으나 또다시 이스라엘에 0-1로 져 준우승했다.

청소년 수준을 넘어서는 뛰어난 기량을 갖고 있던 차범근은 이 대회 직후 곧바로 국가 대표 팀에 선발돼 그해 5월 방콕에서 열린 제5회 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아시안컵)에 이세연 김호 이회택 등 선배들과 함께 출전했다.

차범근은 이 대회 크메르(오늘날 캄보디아)전에서 4-1로 이길 때 박수덕 이회택에 이어 3번째 골을 넣어 A매치 첫 골을 기록했다. 같은 해 7월 콸라룸푸르에서 열린 제16회 메르데카배대회 결승에서는 하프라인부터 단독 질주해 2-1로 우승을 확정하는 결승 골을 터뜨렸다. 

차범근은 이런 경기도 치렀다. 고려대를 졸업하고 서울신탁은행 소속이던 1976년,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제6회 박대통령배국제축구대회 말레이시아전에서 후반 7분을 남겨 놓을 때까지 1-4로 뒤지던 경기를 남은 시간 동안 세 골을 몰아쳐 4-4 무승부로 만들었다. 차범근의 득점력은 폭발적이었다.   

차범근은 초고교급 선수에서 더욱 발전해 탈(脫) 아시아 수준의 경기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한국 축구의 활동 무대는 아시안컵과 메르데카배, 킹스컵, 박대통령배 등 아시아 지역에 한정돼 있었다.

그 뒤 1978년 방콕 아시아경기대회 이후 한국인 선수로는 처음으로 독일 프로 축구 클럽(다름슈타트) 유니폼을 입었고 군 복무를 추가로 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분데스리가에 자리를 잡았다.

글쓴이가 축구 팬으로 차범근을 처음 본 지 17년 만에 이번에는 기자와 취재원으로 독일에서 만났다. 이때 글쓴이는 축구 기자가 아니었지만 축구 기사로 스포츠 신문 1면 톱을 장식하는 행운을 누렸다. 이는 전적으로 차범근의 애국심 덕분이었다.

글쓴이는 서울 올림픽을 1년 여 앞둔 1987년 11월 열린 세계유도선수권대회를 취재하기 위해 서독 에센에 있었다.

그 무렵 차범근은 아인라흐트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레버쿠젠에서 뛰고 있었다. 올림픽을 코앞에 둔 세계선수권대회의 비중을 알고 있었는지 차범근은 아내 오은미 씨와 함께 자동차로 아우토반을 몇 시간 동안 달려 김재엽 하형주 등 유도 국가 대표 선수들을 응원하러 왔다.

한국 선수단이 묵고 있던 호텔 라운지에서 차범근과 인터뷰했다. 기사의 전체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분데스리가에서 10시즌 100골을 채우고 싶다”는 게 골자였다.

25살 때 분데스리가 활동을 시작한 차범근은 그때 이미 34살이었다. 요즘 시각으로 보면 우스운 일이지만 대표 팀 합류 여부를 놓고 찬반 양론이 일었던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을 뛰었고 분데스리가에서 선수 생활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었다.

차범근은 2년 뒤인 1989년 308경기 출전 98골(모두 필드 골)의 빛나는 기록을 훈장으로 달고 고국에 돌아왔다. 눈에 띄는 기록이 하나 더 있었다. 상대 수비수들의 악의적인 반칙으로 여러 차례 부상했지만 자신은 딱 한 장의 경고 카드만 받았다.

한국으로 돌아와 현대 호랑이 축구단 사령탑을 맡았을 때 축구 기자들 사이에 끼어 3년여 만에 차범근을 다시 볼 수 있었다. 축구 기자 출신이 아니어서 축구인 차범근을 자주 볼 수는 없지만 왠지 늘 옆에 있는 친구 같은 느낌이 드는 차범근 전 국가 대표 팀 감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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