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는 끝이 아닙니다. 운동선수에게 새로운 시작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미래를 가꿔 나가야 할지 막막할 때가 많습니다. 스포티비뉴스는 은퇴 후 새로운 삶을 사는 8명의 각계각층 인사들을 만나 선수 생활 이후 삶에 대한 조언을 들어 봤습니다. 선수들이 어떻게 인생 2막을 그려 나가야 할지 조언을 구했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꿈꾸고, 준비하고, 도전하라고 말합니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지원으로 기획·제작됐습니다.
[스포티비뉴스=취재 조형애, 영상 김태홍 기자] "어유, 나 이제 옛날 생각 잘 안 나는데?"
지도자 인생 2막. 예기치 않게 찾은 베트남에서 '기적'을 일구고 있는 박항서(59) 베트남 축구 대표팀 감독에게 '은퇴 그 후'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하자 대뜸 머리를 긁적였다.
베트남을 이끌고 아시아축구연맹(AFC) 23세 이하 챔피언십 준우승,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4위라는 눈부신 성과를 거둔 터라 질문이 퍽 당황케 할만했다는 걸 인정한다. 하지만 스포티비뉴스는 은퇴 후 학연도, 지연도 변변찮은 박 감독이 지도자로 꽃피울 수 있었던 이유가 궁금했다.
기억을 조금씩 더듬은 박 감독. 30여 년 전 은퇴 후 럭키금성 코치, 1994년 미국 월드컵 대표팀 트레이너, 2002년 한·일 월드컵 대표팀 수석 코치, 상주상무 감독 등을 거쳐 베트남 국가 대표팀을 이끌기까지 그는 은퇴 후 삶을 '속성'으로 전했다.
◆ 박항서의 의문 "저를 왜 뽑으셨어요?"…성실성이 '힘'이었다
30대에 접어들면 젊은 선수들에게 치여 으레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던 1980년 대. 박 감독 역시 서른한 살에 은퇴를 선언하고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선택의 기로에서 그가 선택한 건 지도자. "똑같은 패턴에서 일하는 것 자체가 나와 맞지 않는다"는 생각에서다.
중학교 선생님으로 보다 안정적으로, 소소한 행복을 맛보며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박 감독은 '전쟁 같은 프로 무대 지도자'를 택했다고 했다.
"대학교 때 교사 자격증이 있어서 모 중학교에 체육 선생 겸 축구 감독 제의는 받았다. 뭘 해볼까, 장래에 대한 고민을 한 건 사실이다. … 그때 다행히 LG 그룹 구태회 고문께서 은퇴 소식을 들으시고는 '지도자로 생각이 없느냐'고 제안해주셨다. 제게는 고마우신 분이시다."
박항서 감독 설명 가능한 지도자로 선임된 이유는 이때가 사실상 전부다. 그는 꾸준히 부름을 받았지만, 그 이유를 묻자 '모른다'고 일관했다. 심지어 자신도 궁금해 1994년 월드컵 코칭스태프로 합류한 뒤 김호 감독에게 "저를 왜 뽑으셨어요?"라고 물었다고 했다.
"그때는 사실 학연·지연이 많이 있었다. 난 김호 감독과 운동장에서만 봤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합류하고 '왜 뽑으셨냐'고 했다. 그러니 '박 선생(30대부터 박 감독은 '선생'으로 불렸다고 한다)은 부지런하고, 성실한 것을 보고 뽑았다'고 하시더라. 큰 비중은 아니었을 테니 갔다고 생각하고 있다."
취재진은 박 감독의 지도자 인생 핵심 키워드를 '성실성'으로 꼽는다. 김호 감독 눈에 든 이유,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지도자 이력. 그리고 베트남 국가 대표팀에서도 이어지는 공통분모가 성실성이기 때문이다. 위르겐 하인츠 게데 베트남축구협회 기술위원장은 성실성으로 일군 박 감독의 경험에 선임 당시 높은 점수를 줬다고 했고, 하이안 사무국장은 박 감독 사단의 스카우팅 노력과 선수 파악을 위한 쉴 새 없는 미팅에 혀를 내둘렀다. 적절한 증거가 됐으리라 믿는다.
◆ 지도자 박항서를 만든 2명의 스승: 김호와 거스 히딩크
박항서 감독은 현재 자신을 만든 스승을 돌아보며 "정말 많다"고 했다. 하지만 "지도자 하면서부터는 2분이 계시다"고 콕 집어 이야기했다. 바로 김호 대전시티즌 대표이사와 거스 히딩크 중국 21세 이하 대표팀 감독이다.
박 감독과 김호 감독의 본격적 인연은 1994년 미국 월드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둘은 수원삼성에서도 한솥밥을 먹었다. 그는 김호 감독을 바라보며 지도자로 한 단계 올라서게 한 스승이라고 설명했다.
"그때는 사실 학연 지연이 많이 있었다. 난 아무 인연이 없었는데, 김호 감독께서 불러 주셔서 있으면서 지도자로서 수준이 '업그레이드' 됐다. 수원삼성 있으면서 6-7년 정도 (함께했다). 축구에 대한 열정· 생각·노하우 등 영향을 받았다. 많은 가르침을 주신 게 사실이다."
또 한 스승은 익히 예상하는 그 이가 맞다. 2002년 전국민을 열광케한 거스 히딩크 감독은 박항서 감독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고 했다.
"지도자 하면서 변신하게 됐던 계기가 2002년 히딩크 감독을 만나면서다. '아, 지도자는 이렇게 해야 하는구나' 생각했다. 많이 변신됐다 생각한다. 그 이유는, 당시 C급-B급-A급-P급 (지도자 교육) 시스템이 만들어지지 않았을 시기다. 현장에서 감독님들에게 (어깨너머로) 배우고 하는 것이었지, 체계적으로 교육받던 세대가 아니다. 독학 비슷하게 하다가, 지도자가 이렇게 준비하고 연속성을 가지고 해야 한다는 등 여러가지를 배웠다."
◆ 베트남 1년, 그리고 은퇴 이후를 준비하는 이들에게…"영어가 경쟁력"
2002년 영광 뒤 박항서 감독도 나름의 굴곡 있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막다른 길에서 기회를 잡았다. 2015년 12월 상주상무 지휘봉을 놓은 뒤 스스로도 "돌파구가 없는 것 같았다"는 1년여를 보낸 뒤다. 창원시청 축구단을 이끌고 있을 무렵, 박 감독은 베트남축구협회의 선택을 받았다. 그동안 성실히 쌓아온 경험과 '새로운 축구에 대한 열망'으로 협회를 설득한 것으로 전해졌다.
베트남에서 1년 만에 일궈낸 성과는 현지서도 '기적'이라 부른다. U-23 대표팀을 이끌고 나선 굵직한 두 대회에서 베트남 역사상 최고 성적을 냈으니 말 다했다. 기적은 현재진행형이다. 베트남 내에서는 아시안컵 보다도 우승 열망이 강한 일명 '동남아 월드컵' 아세안축구연맹(AFF) 스즈키컵 2018에서 10년 만에 우승에 도전하고 있다.
박항서 감독은 "베트남 생활이 너무 좋다"고 빙긋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지도자 삶은 이번 생애로 족하단다. 그는 '축구 지도자를 다시 하시겠어요?'라는 질문에 "다시 하겠습니까?!"라고 반문했다.
박 감독은 축구 선수 은퇴 후 후배들이 많은 선택지를 펴고, 스스로에게 가장 잘 맞는 길을 택해 나아가길 바랐다. "지도자도 피지컬 코치, 분석관 등도 있다. 여러 갈래로 선택 여지가 있다. 너무 이길(지도자, 감독)에만 연연하지 말고, 자기 재능이 어디에 있는지 스스로가 잘 찾아서 그 길을 선택해보고 도전해봤으면 한다"고 조언을 건넸다.
후배들에게 남긴 특별한 메시지는 '영어를 배우라'는 것이다. 2002년 히딩크 감독에게 "영어 못한다"는 이야기를 하도 들어 시작하게 됐다는 영어 공부. 시간이 지날 수록 그 중요성을 느끼고 있다는 박 감독이었다.
"이제는 글로벌 시대다. 영어 하나는, 어느 정도 할 수 있어야 경쟁력이 있다. 그걸 하지 못하면 지도자로서도 경쟁력이 없다고 생각한다. 자연스럽게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영어 하나는 시간 나는 대로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지원으로 기획·제작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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