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약? 구자철이 답했다. ⓒ한희재 기자

| 내가 2010시즌 챔피언 결정전에 뛰었다면?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땄다면?
| 아우크스부르크를 만나지 못했다면? 국가 대표팀이 은퇴 번복을 요청한다면?
| 구자철의 축구 인생 1막 정리…단독 인터뷰

[스포티비뉴스=용산, 글 한준 기자/ 영상 한희재 기자] 구자철(30)의 축구인생에 오랜만에 쉼표가 찍혔다. 구자철은 올해 국가대표 유니폼도, 아우크스부르크 유니폼도 벗었다. 인생 2막을 준비하는 구자철과 지난 10여년의 축구 인생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2012년 런던 올림픽 동메달은 구자철의 경력에 가장 빛나는 업적이지만, 끝내 우승 트로피를 들지 못한 것은 숙원이기도 하다. 시련 없이 더 일찍 결실을 맺었다면? 혹은 터닝포인트가 된 인연을 만나지 못했다면, 무엇이 달라졌을까? 만약 그때 이랬다면? SPOTV 스포츠타임 '인터뷰 if'와 함께 구자철은 자신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그렸다. 

Q. 독일 생활 10년째, 요즘 손흥민~이승우~이강인 등 유럽 클럽 유소년 출신 선수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유럽에서 생활해 육성 시스템에 대해 더 잘 알게 됐을 것 같은데, ‘만약 나도 유럽에서 유소년 시절 축구를 배웠다면?’

“중고등학교 때부터 체계적인 훈련을 해서 조금 더 미리 준비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굉장히 큰 건 사실이에요. 토크콘서트도 하고 축구캠프도 하는 게 다 거기서 나온 거고요. 성장기에 해야 하는 운동이나 피지컬적으로 필요한 것에 대해서 저는 그 시기에 그 중요한 훈련을 하지 못한 채 성장했어요. 지금 이 기억을 갖고 다시 한다면, 더 좋은 선수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요. 대표 선수도 하고 다 할 수 있겠죠.” 

빠른 1989년생 구자철은, 만 17세에 프로가 됐다. 사실 제주 유나이티드에 입단하기 전에는 크게 주목 받지 못했다. 20세 이하 대표도 제주에서 활약을 바탕으로 선발됐다. 프로에서 두각을 나타내자 만 18세에는 국가 대표까지 선발됐다. 좋은 환경, 체계적인 지원이 따르자 언제나 한계까지 최선을 쏟던 구자철은 날개를 단 듯 고속 성장했다. 구자철에겐 자신의 열정을 '제대로' 쏟을 장이 필요했다. 

▲ 구자철에게 제주는 꿈을 만들어준 도시이자 팀이다. ⓒ제주 유나이티드

★ 제주는 내 삶의 꿈이었다 

Q. 프로 데뷔 팀이 제주가 아니었다면? 

“꿈 같은 시간이었죠. 저는 (보인)고등학교 3학년 6,7월까지도 제가 어디로 진학할지 결정이 나지 않았기 때문에. 보통 고2, 고3 초에는 결정이 나고. 대학교 T.O.((table of organization, 정원)가 있기 때문에, 좋은 선수들은 이미 그 T.O.를 가져가는 데, 저는 사실 그러지 못했었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축구를 즐겁게 했고, 최선을 다했고, 제가 가진 꿈을 믿어왔고요.

그런 상황에서 제주 유나이티드가 제가 고3 7월 말에 오퍼를 줬어요. 우연찮게 제주도에서 열리는 백록기에 참가했고 대회 결승전에 당시 제주 정해성 감독님이 제 플레이를 보고 감사하게도 오퍼를 주셨고, 그 오퍼를 받고 대학이 아닌 바로 프로로 가면서 황금 같은 기회를 얻었어요. 그 기회를 얻어 제주를 가면서 또 다른 기회를 찾았고 계속해서 목표를 이뤘기 때문에, 저에겐 인생이 1년 만에 바뀌었고 모든 시간들이 꿈같았던 것 같아요.”

대학 진학도 쉽지 않았던 구자철에게 제주는 기회의 땅이었다. 제주에서 열린 대회에서 활약을 통해 프로로 직행했고, 제주에서 아내를 만나 제주가 제2의 고향이 됐다. 구자철의 축구 인생에 제주는 상상 속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구자철에게 제주는 '꿈'을 만들어준 팀이자 도시다.

제주도는 지리적 특성상 원정 팀들의 지옥이 될 수 있지만, 제주 역시 원정을 나갈 때마다 같은 핸디캡을 얻게 된다. 유럽 생활과 국가 대표 생활을 하며 잦은 비행, 장거리 비행이 몸 상태에 영향을 줬다고 고백한 구자철은 K리그 생활을 하며 탄 비행기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고 했다. 그저 어린 시절 몸을 혹사하는 훈련을 했던 게 문제였을 뿐이라고 설명한다. 구자철에게 제주의 기억에 부정적인 요소는 없다. 

Q. 제주에서 원정 경기마다 비행기를 타야했던 것은 힘들지 않았나요?

“그건 전혀 문제가 없어요. 단지 저는 훈련하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에 매 순간, 매 개인 운동 마다 한계를 느끼는 훈련을 많이 했어요. 꼭 한계를 느껴야 운동 효과가 있다고 믿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제 발목과 무릎, 근육들이 얼마나 피로를 느끼고 망가지고 있는지 인지하지 못한 채 그저 꿈을 이뤄야겠다 목표를 이뤄야겠다는 생각 하나로만 최선을 다했던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제가 후회하지 않고 미련 없이 대표팀 유니폼을 벗을 수가 있었고. 지금까지 달려온 모든 순간에 대해 보람을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아쉬운 이유기도 해요.”

구자철은 제주에서 아내를 만나 가정을 이뤘다. 예능 프로그램에 가족과 함께 출연하는 선수들도 있고, 자신의 소셜미디어 계정을 통해 가족과 보내는 시간을 팬과 언론에 공개하는 경우도 있지만 구자철은 자신의 아내는 물론 아들, 딸의 사진은 물론 이름도 공개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Q. 제주에서 만난 아내나, 가족 이야기는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저는 가족을 공개하거나, 그럴 마음이 전혀 없어요. 왜냐면 안 그래도 한국 사회에서 타인의 눈치를 많이 보는 문화가 강하게 잡혀 있는데 누군가 나를 알아보고, 누군가가 내가 누군지 안다는 가정하에 삶을 산다면, 그렇게 편하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불편한 그 삶을 가족들에게 단 1%도 주고 싶지 않아요. 제 아들, 딸, 사랑하는 아내만큼은 자유롭고 본인들이 하고 싶은 것 평범하게 할 수 있는 환경을 항상 조성하고 싶어요.”

▲ 구자철은 2010시즌 K리그 도움왕, 베스트 미드필더, 팬이 뽑은 올해의 선수상을 받았다. ⓒ한국프로축구연맹

Q. 2010년 K리그에서 우승했다면?

“우승했다면, 지금 제 마음 속에 있는 미련이 없겠죠. 우승을 해보고 싶어요. 일단 체력적으로 힘들었죠. 그 다음에 심리적으로 너무 피로했고, 지쳤고요. 아시안게임에 나가서 원하는 금메달을 따지 못했고요. 그렇지만 무엇보다 뜻 깊었던 대회를 마치고 돌아왔고요. 소속팀에서 돌아오자 마자 굉장히 중요한 시합들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제가 회복할 수 있는 모든 여건과 환경을 조성해줬고. 그렇기에 더 큰 책임감을 갖고 경기에 나갔고요. 

불행하게도 피로가 쌓였고 마지막에 서울월드컵경기장의 챔피언결정 2차전에 나갈 수 없게 됐는데 돌이켜보면 아쉽기도 하고요. 제가 그때 뛰었더라면, 그 때 그 자신감으로 팀을 우승으로 이끌 수 있었다고 생각을 했기에, 아쉬워요.”

2010시즌은 구자철 커리어의 첫 번째 하이라이트다. 프로 3년차에 30경기를 뛰며 5득점 12도움을 기록한 구자철은 만 21세의 나이로 K리그 도움왕에 올랐고, 제주는 챔피언결정전에 올랐으나 아쉽게 준우승했다. 구자철은 당시 K리그 대상이 팬이 뽑은 최고의 선수상도 받았고, 베스트 미드필더로 선정되며 3관왕을 차지했다. 그해 주간 베스트 선수에 최다 선정된 선수이기도 했다. 

구자철은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예비 엔트리에 포함되며 대표팀 생활을 했으나 최종 엔트리 막차에 탈락했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는 주장으로 참가했으나 준결승전 패배로 동메달을 걸고 돌아왔다. 세 개의 대표팀 일정과 K리그를 병행하는 강행군이었다. K리그 막판 일정을 보내다 아시안게임을 다녀와야 했던 구자철은 결국 부상으로 가장 중요한 챔피언결정전 2차전에 뛰지 못했다. 

구자철 본인의 말처럼, 당시의 기량과 기세라면 구자철의 힘으로 제주는 K리그 챔피언이 될 수 있었다. 대표팀 생활에는 더 미련이 없다고 말한 구자철은 제주와 K리그 우승에 대해서는 '미련'이라는 단어를 썼다. 

▲ 구자철에게 런던 올림픽은 병역 혜택과 관계없는 순수한 열정이었다.

★ 국가 대표는 그 자체로 순수한 열정이었다

Q.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땄다면? 런던 동메달은 없었을까?

“지극히 제 개인적으로 얘기를 한다고 하면 달라질 건 없었을 거에요. 그런데 팀적으로 본다면 그건 제가 쉽게 얘기를 못하겠어요. 저는 개인적으로 단 1초도 군면제라는 생각을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에.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 축구화를 신을 때, 아버지에게 축구부가 있는 학교로 전학시켜 달라고 수없이 졸랐던 그 마음을 갖고 아시안게임과 런던 올림픽에 참가했기 때문에, 뭔가 대가나 다른 물질적 요소 때문에 제가 가진 꿈이나 순수한 마음이 변질되지 않았을 거에요. 

제가 중학교 때 가진 청소년 대표라는 꿈, 청소년 대표가 되어서 우연찮게 홍명보 감독님이라는 한국 축구의 레전드를 만났고요. 우상과 한 팀에서 일한다는 자부심을 갖고, 꿈을 만들었고요. 그 꿈이 런던 올림픽이었고요. 그 팀과 함께 한 매 순간을 즐겼고, 매 순간을 감사했고, 매 순간에 행복을 느꼈고요. 그게 저한텐 전부였던 것 같아요.”

이른 성공이 독이 된다는 말이 있다. 축구 선수의 유럽 진출에 걸림돌이 되는 병역 문제는, 2012년 런던 올림픽 동메달 신화를 기점으로 한국 축구의 유산이 되고 있다. 이후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금메달이 이어졌다. 메달리스트 모두가 대성한 것은 아니다. 혹자는 이 성공으로 생긴 포만감이 이후 경력에 부정적으로 작용하기도 했다고 말한다. 저마다 다른 사정과 상황이 있다.

한국 올림픽 축구 역사상 최고 위업인 런던 올림픽 동메달은,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금메달 실패 이후 이뤄졌다. 홍명보 감독은 런던 올림픽을 준비하며 23세 이하보다 두 살 어린 선수들, 2009년 FIFA U-20 이집트 월드컵 멤버를 주축으로 아시안게임에 나섰다. 구자철은 그 중심 멤버였다. 

런던 올림픽 동메달은 구자철의 축구 인생 최고의 업적 중 하나다. 구자철은 광저우에서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목에 걸었더라도, 런던에서 쏟은 열정이 손상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현실적으로도 구자철은 국가유공자의 자녀였다는 점에서, 유럽 경력을 유지하는 데 치명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구자철은 순수하게 대표팀이라는 자부심과 사명감으로 올림픽에 모든 것을 쏟았다. 

구자철이 자신의 프로 경력에서 내린 많은 선택이 대표팀과 한국 축구를 위한 것이었다.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지역의 거액 제안도 마다하고 유럽에 남아서 처절하게 싸웠다. 대표팀에 부르면 개인 트레이너를 고용하고 개인 치료를 통해 몸을 만들고자 노력했다. 구자철에게 대표팀은 개인적인 일이 아니었다. 구자철의 대표팀에 대한 마음은 의심할 수 없는 것이다.

▲ 조광래 감독은 2011년 아시안컵에 구자철을 전진배치했고, 득점왕을 차지했다.

★ 멀티플레이어? 나는 수비형 미드필더다

Q. 아시안컵 득점왕을 바탕으로 아예 득점을 노리는 공격수 포지션으로 자리를 잡았다면?

“저는 수비형 미드필더로서 K리그에서 최고의 선수로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그 포지션에서 계속 활약하고 싶었던 욕심이 있었어요. 그런데 유럽으로 이적을 하면서 실질적으로 제가 아시안컵에서 공격형 미드필더로 뛰면서 득점왕에 오르면서 분데스리가에 진출할 수 있었는데요. 그런데 중요했던 것은 볼프스부르크에서 2010년 K리그에서 활약하는 제 모습을 직접 한국에 와서 경기장에서 관찰을 했었고요. 그 모습을 기억하고 영입을 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제가 이적을 해서 뛴 포지션은 수비형 미드필더였고요.”

구자철은 중원과 공격진의 모든 영역을 소화할 수 있는 멀티플레이어다. 본인에게 자신의 포지션 정체성을 묻자 “저는 수비형 미드필더에요.”라고 답했다. 

“사람들이 너무 제가 오랫동안 수비형 미드필더를 뛰는 걸 안 봤고, 그리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얘기들이 쉽게 오가지 않는다고 생각을 해요.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 중앙 미드필더. 중간에서 수비와 공격을 다 하면서 팀에 공수를 받쳐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죠.”

축구를 하면 누구나 골을 넣는 주인공이 되고 싶어한다. 보통 잘하는 선수들은 공격을 하다가 성장 과정에 포지션이 바뀐다. 구자철은 자신의 성격상 경기 상황 전체에 기여할 수 있는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가 제격이라고 설명했다. 

“제 성격이랑 잘 맞는 거죠. 공격도 해야 하고 수비도 해야 하고. 하나에 얽매이지 않고 책임을 지는 걸 좋아했기 때문에 그 포지션에 저에게 잘 어울렸죠.”

구자철도 처음에는 공격이 좋아서 축구를 했다고 솔직히 고백했다. 하지만 정작 첫 포지션은 수비수였다. 구자철은 경력을 보내며 공격 능력을 인정받아 한 칸씩, 한 칸씩 앞으로 올라간 케이스다. 

“축구가 좋았고, 공격적으로 매력을 느껴서 시작한 거고요. 중학교 때는 스위퍼를 봤기 때문에, 수비수를 했고,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미드필더로 전향한 거죠. 제 의지와 팀의 의지가 같았죠.”

구자철에게 본격적으로 득점하는 역할을 맡긴 인물은 2011년 AFC 카타르 아시안컵에서 대표팀을 지휘한 조광래 감독이다. 그리고 구자철은 아시안컵 득점왕을 차지하며 독일 분데스리가에 진출했다. 

“시리아랑 아시안컵 전 평가전을 하는데, 그때 공격형 미드필더로 투입된 건 아니었어요. 그런데 공격적인 모습에서 좋은 모습을 보였고요. 한 20분 뛰었는데. 그러고 나서 알자지라와 평가전에서 처음으로 선발로, 마침 주영이 형이 부상으로 오지 못해서 비어있던 경쟁 포지션에 제가 처음 선택을 받게 됐는데 그 때 제가 좋은 모습을 보이면서 아시안컵 첫 경기에 선발로 낙점된 거죠.”

▲ 구자철은 아우크스부르크로 임대 이적한 뒤 분데스리가 최고의 미드필더 중 한 명으로 자리잡았다.

★ 아우크스부르크에 내 심장이 있다

Q. 아우크스부르크로 임대되는 기회를 얻지 못했다면?

“어딜 가나 똑같았을 거에요. 포기하지는 않을 놈이기 때문에(웃음). 그런 상상은 안해봤어요. 일단 굉장히 어린 상태였고요. 뭔가 도움을 받아야 하는 시기였던 것 같은데. 도움보다는 볼프스에서는 너무 큰 경쟁에 앞서 있었고, 그 상태에서 아우크스부르크로 임대갔을 때는 경쟁보다는 선수들이 하나가 되어서 강등권을 탈출해야 하는 시기라 도움을 많이 받았죠. 그 차이에서 제가 갖고 있던 실력들이 안정감을 생활에서 찾다 보니까, 경기장에서도 좋은 경기력으로 나왔던 거 같아요.”

구자철은 2010년부터 유럽 클럽의 관심을 받았다. 2011년 AFC 아시안컵 득점왕을 차지한 뒤에는 구자철에게 제안한 유럽 팀이 20여개에 이르렀다. 분데스리가에서만 7개팀이 구자철을 원했고, 네덜란드의 PSV 에인트호번도 러브콜을 보냈다. 프리미어리그에서도 블랙번을 비롯한 몇 개 팀이 관심을 보였고, 러시아 루빈 카잔은 거액의 제안을 했다.

구자철의 선택은 볼프스부르크였다. 하지만 꿈에 그리던 유럽 생활은 녹록치 않았다. 볼프스부르크 입단 이후 인종 차별을 겪었고, 주전 경쟁에서 고전했다. 구자철은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되뇌인 적이 많았다고 했다. 2012년 1월 겨울 이적 시장에 임대 이적을 추진했다. 펠릭스 마가트 감독은 구자철이 과감하게 시도한 슈팅이 허공으로 치솟자 불러 들여 "왜 슈팅을 했냐"고 따졌는데, 구자철은 "죄송하다"고 했다. 마가트 감독은 구자철의 플레이 미스가 아닌, 자신의 선택을 항변않고 숙이는 것을 보고 임대를 보내겠다고 결심했다.

“어린 선수들에겐 더 중요하게 다가오게 되는 것 같아요. 해외에 있다고 하면 좀 더 달라지거든요. 언어, 문화, 모든 게 혼자 헤쳐나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크게 다른 점이죠.”

손흥민이 활약하고 있던 함부르크가 먼저 구자철을 원했다. 손흥민이 이미 잘 하고 있었고, 한국 선수간 시너지를 기대했다. 하지만 이적 시장 마지막 날 이적 요청서 수신 과정에 혼선이 있었다. 그 사이 창단 후 처음 승격해 잔류 경쟁을 벌이던 아우크스부르크의 제안이 왔다. 꾸준한 출전 기회를 원했던 구자철은 아우크스부르크로 임대 이적한 뒤 공격 프리롤을 맡았다. 후반기에만 5골 1도움을 몰아치며 아우크스부르크를 잔류시켰고, 아우크스부르크는 그로부터 9시즌째 1부리그에 살아남고 있다. 지난 8시즌 중 6시즌의 잔류에 구자철이 기여했다.

구자철은 아우크스부르크의 레전드다. 2011-12 시즌 후반기 팀에 입성한 뒤 임대 기간이 끝나 볼프스부르크로 돌아가기도 했고, 마인츠로 이적했다가 결국 아우크스부르크로 돌아왔다. 2015-16 시즌 아우크스부르크는 클럽 사상 최고 이적료로 구자철을 재영입했다. 구자철은 리그 8득점 1도움으로 기대에 부응했다. 

구자철은 아우크스부르크에서 공격형 미드필더, 수비형 미드필더, 좌우 측면 공격수 등 다양한 역할을 하며 공헌했다. 2018-19 시즌을 끝으로 아우크스부르크와 계약이 종료됐다. 아우크스부르크는 구단 최고 연봉 대우에 3년 연장 계약이라는 파격 조건을 제시했지만, 국가 대표 은퇴를 선언한 뒤 향후 경력에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구자철은 아우크스부르크의 현 단장이자 코칭스태프보다 오랫동안 아우크스부르크의 성장을 지켜봤다. 누구보다 구단을 잘 아는 인물이고, 구단에 많은 한국 선수 영입을 주도하고 성공시킨 주역이다. 아우크스부르크도 그러한 구자철의 상징성을 인정하고 있다. 구자철은 올 시즌을 마친 뒤 구단 직원들에게도 개인적으로 선물을 하고 떠나왔다.

아우크스부르크를 떠나기로 했지만 구자철은 이곳이 심장이 있다고 했다. 구자철이 계약 제안을 거절했지만 슈테판 로이터 아우크스부르크 단장은 아직 구자철에게 문이 열려 있다고 말했다. 여름 이적 시장은 길다. 아우크스부르크는 아직 구자철을 기다리고 있다. 

▲ 인생 2막을 준비하는 구자철 ⓒ한희재 기자

★ 새로운 도전, 나 자신의 역사를 잃어버리지 않고 싶다

Q. 아우크스부르크와 계약 만료. 또 한 번 선택의 기로. 어떤 것을 가장 고민하고 있는지?

“가족이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는 곳이요. 그동안 제가 대표팀을 하면서 희생을 많이 했거든요. 예민했었고, 아내가 애 둘을 혼자서 키우는 데 저는 경기력이 먼저였기 때문에 도와주지 못했기 때문에, 아내가 좀 더 가족들이 좀 더 심리적으로 편안할 수 있다면, 도시도 그렇고, 그런 것들이 고려대상이긴 해요. 그런데 어떻게 될지는 봐야죠. 제 욕심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구자철은 독일 분데스리가의 몇 개팀과 스페인 라리가 및 유럽 리그, 중국과 서아시아 등지의 팀에서 관심을 받고 있다. 일본 J리그에서도 문의한 팀이 있다. 첫 번째로 가족이 살기 좋은 도시를 고려하고 있지만, 축구 선수로 더 발전하고 배울 수 있는 곳도 중요한 고려 대상이다. 우선 돈이 자신의 선택에 최우선이 되지 않는다고 분명히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순수하게 축구를 즐길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Q. 앞으로 선수 인생의 목표가 있다면?

“축구를 즐기는 거죠. 축구화를 처음 신었을 때, 제가 제 자신의 역사를 잃어버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제 삶에서. 나는 어떤 사람이고, 왜 축구를 시작했고, 축구가 왜 좋았고, 이 순수한 제 초심과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축구화를 벗을 때까지. 그 동안은 여러가지 압박감과 스트레스, 부담감, 여러가지 제가 컨트롤할 수 없는 모든 것에 대해 책임져야 하는 위치에 있었고, 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없었던 거 같아요.” 

“경기장에 나갈 때 내가 정말 축구를 시작한 이유는 축구가 너무 좋고, 축구를 하는 게 너무 행복하고 축구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했었는데, 그 순수한 제 진심을 잃어버린 시간들이 꽤 많았던 거 같아요. 경기장 나가는 것에 대해 부담을 느낄 때도 있었고, 축구를 하는 게 행복하지 않은 순간도 있었고, 그런 순간이 있었는데 이제 뒤돌아볼 여유도 생기면서 여러 생각을 했고,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게 뭔가 했을 때, 정말 축구화 처음 신었을 때, 축구선수가 되겠다고 마음 먹었을 때 순수한 마음, 제 자신의 역사죠. 그런 삶을 축구를 통해 축구화를 벗을 때까지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죠.”

Q. 그런 곳이 차기 행선지인가요?

“어디에 있느냐는 중요한 게 아니죠. 제가 얼마나 축구를 하는데 행복을 느끼냐가 중요하지, 어디에 있고 뭐가 있느냐는 이제 중요한 건 아니고요. 사람이 어느 환경에 있느냐보다는 정말 스스로에게 부끄럼없이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고 있느냐, 혹은 최선을 다하지 않더라도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느냐, 축구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면 사람들에게 잘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살고 있느냐도 저한텐 중요한 거 같아요.”

▲ 한국 대표팀과 이별한 구자철 ⓒ한희재 기자

★ 구자철은 한국 축구다

Q. 다시 몸이 좋아지고, 대표팀이 원한다면, 은퇴를 번복할 수 있나요?

“그런 일 없어요. 일어나지 않아요. 일어날 리 없어요. 단지 제가 몸이 다시 좋아졌다고, 좋은 모습을 보일 수 있다고 다시 하겠다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에요.” (Q. 그 시점에 대표팀에서 간절히 원한다면?) “세상에 못 일어날 일은 없어요. 그건 제가 어떤 식으로라도 단정을 지어선 안돼요.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제가 얘기할 수 있는 것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요.”

2022년 FIFA 카타르 월드컵을 준비하는 '벤투호'는 기성용과 구자철이라는, 아직 만 30세인 두 베테랑 기둥을 은퇴로 잃었다. 이영표 전 대표팀 수비수는 둘의 리더십 공백이 벤투호의 아시아 예선 여정에 위기가 될 수 있다고 우려하기도 했다. 만약 둘이 대표팀과 잠시 떨어져 몸이 좋아지고,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다면, 2022년 그들을 대표팀에서 다시 볼 수 있지 않을까? 구자철은 단호하게 답했지만, 세상 일은 무엇도 단정할 수 없다며 작은 문을 열어뒀다. 다만, 그가 돌아온다면, 그것은 개인적인 미련이 아니라 한국 축구를 위한 상황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미련은 아닌 거 같아요. 저는 제 자신한테 부족했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미련은 아닌 거 같아요. 돌이켜 보면 1등은 못했어요. 2등도 아닐 수 있어요. 어쩌면 꼴등일 수도 있어요. 근데 제 자신한테는 그 모든 시간이 의미가 있었기 때문에 모든 대회가 의미가 있었기 때문에 다만 그 기대에 충족을 못했던 것에 대해서는 돌이켜보면 죄송한 마음이 있는 건 사실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미련은 없어요.” 

“축구 선수로 더 성장하고 싶고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이런 게 너무 아쉬웠다는 게 있었기 때문에 그런 걸 나누고 싶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거죠. 그래서 좋은 방법이 뭘까 생각해서 요즘 트렌드에 맞게 유튜브 채널을 만들어서 용기도 희망도 주고 나란 사람도 보여주고. 축구 선수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 어떤 훈련이 있고, 모든 것들, 다방면으로 저를 응원해준 그 동안, 저는 지금도 스토리가 많은 팬들이 있어요, 10년 넘게 한 팬들이 있어요. 전 그런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선수이기 때문에 그로 인해 또 다른 행복을 주고 싶은 것도 있어요.”

▲ 구자철 ⓒ한희재 기자

스포티비뉴스=용산, 글 한준 기자, 영상 한희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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