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임생 수원 삼성 감독은 경기 후 회견에서도 굳은 얼굴이었다. ⓒ한준 기자

[스포티비뉴스=수원, 한준 기자] "좋은 꿈을 꾼 것 같아요."

2일 저녁 킥오프한 2019 KEB 하나은행 FA컵 준결승 2차전. 비기기만 해도 FA컵 결승에 진출할 수 있었던 화성FC 김학철 감독은, 태풍 미탁의 영향으로 비바람이 몰아친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0-3 패배를 당한 뒤 1차전 1-0 승리 때보다 표정이 밝았다.

"선수들이 나름대로 열심히 싸워줬는데 여기까지인 것 같아요. 우리가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1996년 현 체제 FA컵이 시작한 이래 프로 1부리그 소속이 아닌 팀이 우승한 역사는 없었다. 2013년 출범한 프로 2부리그는 물론, 세미프로인 실업축구 내셔널리그 팀도 우승하지 못했다(같은 날 대전 코레일이 상주 상무를 꺾으면서 FA컵 결승에 올랐다). 4부리그 격 K3리그 어드밴스의 화성이 결승에 오른다면 축구계에서 클리셰처럼 언급되는 프랑스 축구계의 '칼레의 기적'에 버금가는 이변을 일으킬 수 있었다.

수원 삼성의 골이 터질 때마다 김학철 감독의 표정에 실망의 기색이 역력했다. 경기 한 시간 전 이뤄지는 취재진과 사전 인터뷰도 길어지는 듯 하자 "훈련을 봐야 한다"며 양해를 구한 뒤 그라운드로 향했던 김학철 감독이다. 이 패배가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쓰린 기억이 되지는 않았다.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고맙다. 처음부터 선수들에게 이기자는 이야기보다 후회없이 하자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 화성 시민 300여명이 원정 응원을 왔다. ⓒ한준 기자
▲ 수원 서포터즈에게 인사하는 화성 선수들. ⓒ한준 기자

◆ 졌지만 웃을 수 있는, 잘 싸운 화성

김학철 감독의 말대로 K3리그 소속 팀으로 4강에 오른 것 만으로도 이미 기적이고 성공이다. 대중교통으로 가기 어려운 화성종합경기타운에 자리잡고 있는 화성은 1차전 경기에 7700여 관중을 모았다. 2일 수원월드컵경기장은 태풍의 영향을 고려해도 4500여 관중이 모이는 데 그쳤다. 평일 저녁 경기라는 점에서 화성 시민들이 1차전에 보인 성원은 놀라웠다. 2차전 원정경기도 버스를 대절해 300여 명이 응원했다. 수원 삼성과 같은 열성 서포터즈가 아니라 우비를 입고 삼삼오오 모인 시민 팬이었다.

화성은 K3리그 내에서도 수준급 선수가 모인 팀이다. 프로선수로 굵직한 경력을 가진 김학철 감독은 물론해 K리그 득점왕 출신 공격수 유병수, 수원 삼성에서 프로로 데뷔한 문준호를 비롯해 K리그에 족적을 남긴 김동석 등이 뛴다. 하지만 이들 모두 프로 경력의 내리막길에 화성행을 택했고, 그 외의 선수들은 더 많은 실패와 좌절을 겪다가 화성까지 온 것이다. 화성 선수들은 참 오랜 만에 이런 관심을 받았고, 대부분은 축구를 시작한 이래 사실상 처음으로 이런 관심을 받았다.

"아무래도 K3리그라는 팀 자체가 다들 소외됐다는 생각이 든다. 언론에 기사도 거의 없는 상태다. K3리그에 있는 선수와 지도자 모두 많이 부족하다. 선수들도 나름대로 꿈을 갖고 있는 선수도 많다. 그 안에 경쟁력 있는 선수도 많다. 우리가 여기까지 온 자체 만으로도 K3리그 선수들이 자신감을 갖고 리그를 하면서 꿈을 잃지 않고 도전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선수들이 그라운드에서 보였던 모습도 그랬다. 수원 삼성이 주말 경기를 치르고, 더 큰 심적 부담 속에 경기했지만 결국은 기량 차이와 경험 차이를 그라운드 안에서 온몸으로 겪었다. 전반전에는 주도권을 잡은 순간도 있었으나 후반전 초반 염기훈의 프리킥 슈팅이 굴절되어 실점한 뒤로는 흔들렸다. 연장전 진입 후에는 조영진의 퇴장 여파와 거센 빗줄기를 견디지 못해 두 골을 더 내주며 무너졌다. 

경기를 마친 뒤 화성 선수들은 모두 주저 앉았지만, 수원 삼성 서포터즈와 수원 관중에게 허리 숙여 인사한 뒤 화성 원정 팬들에게 다가가 감사를 전했다. 수원 팬들까지도 박수로 격려할 정도로 화성의 투혼은 결과와 관계없이 스포츠가 갖는 가치를 표현했다.

▲ 주저앉은 화성 선수들을 일으켜 세우며 격려한 수원 선수들 ⓒ한준 기자
▲ 해트트릭에도 웃지 못한 염기훈 ⓒ한준 기자


◆ 경기 후 회견장, 이임생 감독도 염기훈도 웃지 않았다

탈락한 화성과 대조적으로 경기장에서 골이 터질 때마다 웃을 수 있었던 수원 삼성 선수들은 정작 경기가 끝난 뒤에는 도로 표정이 어두웠다. 이임생 수원 삼성 감독은 경기 중 눈물을 흘릴 정도로 부담을 겪었다. 이임샘 감독은 경기 후 회견에서도 어두운 표정을 풀지 못했다. FA컵 결과에 따라 사퇴라는 책임을 질 수 있다고 말했던 이임생 감독은 "개인적으로 오늘 경기가 제스스로 마지막이지 않나 생각을 스스로 가졌다. 선수들이 승리를 줘서 너무 선수들에게 감사한다는 말밖에 생각이 안난다"고 했다.

해트트릭을 작렬하며 경기 최우수 선수로 선정된 염기훈은 1차전 결과는 물론, 당시 경기 후 이임생 감독의 발언으로 선수들의 사기와 심리 상태가 좋지 않았던 게 사실이라고 인정했다.

"분위기는 상당히 안좋았다. 감독님이 FA컵이 잘못되면 기사를 통해서 들었듯이 마음이 많이 무거웠던 게 사실이다. 2차전이 우리에겐 더 그래서 부담이 되지 않았나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화성FC와 경기했을 때 수원삼성이 무조건 이긴다는 말을 하시는데, 1차전이 잘못되다 보니까 부담감을 더 많이 가진 준비기간이었다."

▲ 수원 삼성은 팬들의 지지를 잃지 않기 위한 사투를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 이겼지만 끝나지 않은 수원의 악몽

수원은 화성을 완파하며 결승에 올랐지만, 아직 모든 마음의 짐을 벗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한 수 아래로 여겨지는 전력과 상황인 대전 코레일과 결승전에서 결과를 내야 하고, 당장 6일에는 5년 동안 이기지 못하고 있는 라이벌 FC서울과 슈퍼매치까지 치러야 한다. 수원은 정규 라운드 최종전을 앞두고 파이널 라운드B로 떨어진 상황이기도 하다. 

3골을 넣고 팀의 승리를 이끌었음에도 표정이 어두운 이유를 묻자 염기훈은 "솔직히 이겼지만 마음이 부담이 더 되어서, 환하게 웃지 못했던 것 같다. 솔직히 하위 스플릿으로 떨어졌고, FA컵을 준비하면서 팬들에게 안좋은 모습을 많이 보였기 때문에 환하게 웃을 수 없었던 경기였다. 개인적인 시즌 목표가 FA컵 우승이었는데, 우승을 하고 환하게 웃고 싶다"고 답했다.

마음 졸인 경기의 승리에도 수원 관계자들 역시 경기 후 침체된 분위기를 풀지는 못했다. 0-1 패배를 3-0 승리로 뒤집었으나 90분 간 득점은 프리킥 한 골이었고, 전반전 중후반 경기 내용에서 1차전의 흐름이 유지되었던 부분은 수원이 점수 차 만큼의 경기를 하지 못했다는 자성으로 이어졌다. 

승리를 위해선 간절함이 필수이지만 기술적 준비와 전술적 준비가 결합되어야 한다. 화성전에 수원은 힘과 높이에 투지를 갖춘 스트라이커 오현규, 돌파력과 기술력을 갖춘 전세진을 조커로 투입하며 경기 흐름에 변화를 주는 데 성공했다. 선수들 개개인이 주중, 주말 경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몸 관리를 철저히 했고, 정신 무장도 확실히 했다.

2010년에 입단한 수원의 주장 염기훈은 "선수들이 이번 화성FC와 2차전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남은 경기에 대비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했다. 스타군단이던 수원은 수원병이라는 말을 들으며 부진한 시기를 겪은 전례가 있고, 서정원 전 감독 체제에서 이를 해소했다가 또다시 무력감에 빠져들어 자멸하는 경기를 하던 일을 겪었다. 올 시즌에는 총체적 악재를 겪으며 안팎으로 비판을 받았다. 화성과 2차전과 서울과 슈퍼매치가 수원의 올 시즌 운명을 좌우할 것이라는 얘기가 나왔다. 주중 저녁 경기임에도 수원월드컵경기장을 찾은 취재진의 숫자가 평소의 세 배에 가까웠던 이유다.

수원은 화성전 승리로 비극을 미뤘지만, 아직 위기가 끝난 것은 아니다. 수원도 아직 악몽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잘 안다. 여전히 수원이라는 이름값은 큰 부담과 책임을 담고 있다. 슈퍼매치와 그 뒤에 이어질 하위권 팀과 파이널 라운드B, 그리고 FA컵 결승 두 경기는 수원 선수단에게 매 경기 중압감이 큰 테스트처럼 여겨질 것이다. 아직 수원의 악몽이 온전히 끝나지 않은 이유다. 선수들에게 필요한 것은 여전히 "이 사랑에 후회는 없다"며 골대 뒤를 지키는 팬들의 지지다. 수원은 이들의 지지를 잃지 않기 위한 혹독한 싸움을 하고 있다. 

스포티비뉴스=수원, 한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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