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최다승 2위의 아쉬움을 남긴 SK ⓒ연합뉴스
[스포티비뉴스=김태우 기자] 염경엽 SK 감독은 간단히 악수를 청하고 경기장을 떠났다. 특별한 이야기는 없었다. “수고했다”는 구단 관계자들의 격려에도, SK 선수들은 좀처럼 고개를 들지 못했다. 주섬주섬 장비를 챙기는 선수들은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경기 후 클럽하우스에서 열린 팀 미팅도 간단하게 끝났다. 공기는 무거웠다.

지난 9월 30일, 대전한화생명이글스파크에서 열린 한화와 정규시즌 최종전을 마친 SK 더그아웃의 분위기가 그랬다. SK는 이날 한화를 6-2로 누르고 144경기 레이스를 마무리했다. 성적은 좋았다. 88승55패1무(.615). 구단 역사상 최다승이었다. 그럼에도 분위기는 ‘88승’을 거둔 팀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다음 날 두산이 시즌 최종전에서 NC에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며 SK는 정규시즌 2위가 확정됐다. 승차가 없어, 마지막 경기가 극적이어서 가슴이 더 아렸다. 집에서, 그리고 사무실에서 초조하게 경기를 지켜보던 선수들과 구단 관계자들은 씁쓸한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88승을 하고도 고개를 숙인 채 끝날 수밖에 없었던 정규시즌. SK의 2019년 가을은 그렇게 시작됐다.

88승하고도 욕먹은 팀… 기대와 자부심이 깨졌다

SK는 2018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2010년 이후 8년 만의 쾌거였다. 그러나 정규시즌은 그들의 무대가 아니었다. 78승65패1무(.545)라는 성적은, 한국시리즈 우승팀이라는 타이틀과 거리가 꽤 있었다. 정규시즌 1위 두산(93승51패)과 경기차는 무려 14.5경기였다. 정규시즌 승률이 팀의 객관적인 전력을 가장 잘 대변하는 지표라면, SK는 사실 지난해 기세가 전력을 뒤덮은 셈이었다.

이를 생각하면 올해 성적은 충분히 고무적이다. 어쨌든 14.5경기의 차이를 모두 지웠다. “선두 두산과 승차를 얼마나 좁히느냐가 올 시즌 관건”이라고 했던 시즌 초를 생각하면 목표를 초과 달성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SK는 88승을 하고도 비판과 조롱에 시달린 KBO리그 역사상 최초의 팀이 됐다.

시즌 막판까지 여유 있는 1위를 지켰지만, 막판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그대로 무너졌다. 게다가 두산이 시즌 막판 집중력을 선보이며 결국 1·2위가 뒤집어졌다. 다만 88승을 하고도 비판에 시달린 것은 단순히 2위여서 그런 게 아니었다. “결국은 극복하고 1위를 지키지 않겠느냐”는 팬들의 기대치가 복합적으로 무너지며 생채기를 남겼기 때문이다. 

▲ 팬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SK는 88승이라는 성과에도 불구하고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 시즌을 마쳤다 ⓒ곽혜미 기자
“그래도 사정이 계속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가 깨진 것이 결정적이다. SK는 시즌 초반부터 타선이 불안한 양상을 보였다. 타격코치가 바뀌는 등 풍파가 적지 않았다. 팬들은 답답한 심정에도 “언젠가는 좋아질 것”이라고 애써 서로를 위로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SK는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한 끝에 이런 기대를 외면했다. 마지막은 차라리, “도대체 1년 동안 무엇을 했느냐”는 울분에 가까웠다. 

자부심의 붕괴도 비판을 자초했다. SK는 “홈런과 강속구로 대변되는 남자의 팀을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실제 지난 몇 년간 착실히 그 목표를 향해 전진했다. 그 결과가 지난해 한국시리즈 우승이었다. 정교한 맛이 떨어진다는 것은 팬들도 인정했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든지 대포를 터뜨릴 수 있는 화끈한 팀”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SK는 올해 그 팬들의 자부심을 지켜주지 못했다. 홈런은 급감했고, 타선은 무기력했다. 1년 사이 벌어진 일이었다. 

SK가 지나치게 느슨했다는 비판도 있지만, 되돌아보면 그 경기마다 사정이 있었고, 나름대로의 객관적인 결정 속에 경기 운영을 했다. 선수들이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비판에는 쉽게 고개를 끄덕이기 어렵다. 누구보다 1위에 절박한 것은 선수단이었다. 그러나 프로는 결과로 말하는 집단이다. 결과론적인 패착의 연속이었고, 그 흐름에 휩쓸려나갔다.

선수들과 벤치 모두 중압감을 이겨내지 못했다. 승부처마다 새파랗게 질려 허둥지둥 대는 모습은 1위 팀과 어울리지 않았다. 벤치도 돌파구를 만들어주지 못했다. 이것 또한 한 시즌 내내 응원의 목소리를 높였던 팬들에게는 실망스러운 일이었다. 

반대로 두산은 “우리는 끝까지 최선을 다하며 기적을 만들어낸 팀”이라는 팬들의 믿음을 지켰다. 두산 선수들의 눈에는 자신감과 독기가 살아있었고, 이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던 SK에는 없었던 것이었다. 설사 두산이 2위를 했더라도 박수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다. 똑같은 88승이지만, 체감이 달랐던 셈이다. 

가을은 이제 시작… 지금은 ‘행복회로’가 필요할 때

▲ 아쉬움을 털어낸 SK는 2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에 도전한다. 풀어야 할 과제가 만만치 않다 ⓒ곽혜미 기자
올해 정규시즌의 실패는 구단 매뉴얼에 반드시 참고자료로 남아야 한다. 아프지만 수없이 복기해야 할 사안들이다. 몇 년째 같은 실패가 되풀이되는 부분이 있다. 충분히 대비했다고 생각했지만, 매년 뭔가 놓치는 것이 있었다는 의미다. 내부에서 반성의 목소리도 제법 된다. 

특히 타선이 그렇다. 웨이트트레이닝이라는 기본적인 요소부터 시작, 육성 시스템과 선수 보강에 대한 다양한 아이디어가 나온다. 올해 임시 체제로 이어졌던 타격코치 파트도 원점부터 폭넓게 논의가 시작됐다. 성공의 경험을 쌓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실패에서도 얻을 수 있는 교훈이 분명히 있다.

다만 상당수는 당장 실현하기 어려운 일들이다. 짧게는 오프시즌의 몇 달이 필요할 수도 있고, 길게는 3~4년 뒤를 내다본 계획이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포스트시즌을 앞둔 SK에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긍정적인 사고방식, 그리고 88승을 한 팀 전력에 대한 자부심이다. 어쨌든 정규시즌은 끝났다. 미안한 마음과 좌절감에 계속 고개를 숙여봐야 발밑밖에 보이지 않는다. 고개를 들어야 앞도 보인다. 

단기전에서는 약점 보완보다는 장점을 내세워야 한다. 지난해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가는 길을 되돌아보면 극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절대 진리다. 잘할 수 있는 것부터 잘하고, 차분하게 정비하는 것이 수순이다. 어차피 지난해와 올해 가을 시작은 위치가 다르지 않다. "매년 한국시리즈에 도전할 수 있는 순위를 확보한다"는 원래 목표에서도 궤도가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선수단 분위기는 비교적 잘 수습됐다. 아쉬움을 털고 오는 14일부터 시작될 플레이오프에 차분히 대비하고 있다. 체력이 완충될 투수들의 구위는 기대를 걸기 충분하다. 체력과 잔부상에 시달렸던 야수들도 보름의 휴식은 재정비에 넉넉한 시간이다. 벤치도 차분하게 전략 구상을 짤 수 있다. 88승을 할 만한 자격이 있는 팀이었음을 증명한다면, 올해 가을 전망도 결코 어둡지 않다. SK 선수단에 떨어진 과제이자 의무다.

스포티비뉴스=김태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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