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3년 한국시리즈는 KBO 역사상 최초 일정 연기 사례로 남아 있다. 당시 해태 포수 김무종이 한국시리즈 2차전에서 홈으로 질주한 MBC 이해창을 태그아웃시킨 뒤 미소를 짓고 있다. ⓒKBO
[스포티비뉴스=이재국 기자] KBO는 10일 긴급이사회를 열고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에 따라 3월 28일 예정됐던 정규시즌 개막일을 결국 4월 중으로 잠정 연기하기로 결정했다.

프로야구가 우천과 미세먼지 등 날씨로 경기가 취소되거나 순연된 적은 있어도 공식일정 자체가 통째로 밀리는 것은 유례를 찾기 힘들다.

KBO 정규시즌 개막이 연기된 것은 알려진 대로 1982년 프로야구 출범 이후 사상 최초의 일이다. 그러나 역사를 추적해보면, 포스트시즌까지 범위 확대 시 KBO 공식 일정이 연기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KBO 역사상 두 번째로 볼 수 있다.

최초의 사례는 1983년 한국시리즈였다. 당초 일정대로라면 10월 12일 1차전이 열릴 예정이었으나 당시 국가 비상사태로 10월 15일로 사흘 연기된 바 있다.

▲ KBO 정운찬 총재(가운데)를 비롯한 각 구단 사장들이 10일 긴급이사회를 열고 있다. 이사회는 코로나19 확산에 따라 결국 정규시즌 개막일을 4월로 잠정 연기하기로 결정했다. ⓒKBO, 곽혜미 기자
◆37년 전 1983년, 그때 무슨 일이…

지금으로부터 37년 전인 1983년. 그해 10월에 비극적인 일이 벌어졌다. 바로 버마(현 미얀마) 아웅산 폭탄 테러로 무고한 희생자가 대거 발생했다.

아웅산 폭탄 테러는 그해 10월 9일 버마 아웅산 국립묘역을 방문 중이던 전두환 대통령과 수행원을 대상으로 북한 공작원이 벌인 폭탄 테러 사건이다. 당시 행사 예행연습을 위해 대통령에 앞서 먼저 도착한 서석준 부총리를 비롯한 외교사절과 기자 등 한국인 17명이 폭탄 테러에 숨졌고, 버마인 4명도 함께 희생됐다. 부상자도 50명에 육박했다.

1983년 한국시리즈는 전기리그 우승팀 해태 타이거즈(감독 김응용)와 후기리그 우승팀 MBC 청룡(감독 김동엽)의 맞대결. 그러나 아웅산 테러 사건으로 국장을 치르는 와중에 야구 축제를 벌일 분위기가 아니어서 10월 12일 예정됐던 한국시리즈 1차전은 일정을 3일 늦춰 10월 15일에 열게 됐다. 처음엔 1차전을 10월 20일로 연기했다가 다시 15일로 앞당기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 '빨간 장갑의 마술사' MBC 김동엽 감독은 쇼맨십의 대가이기도 했다. 왼발에 깁스를 한 채 목발을 짚고 나와 심판에게 항의를 한 장면은 전설로 회자되고 있다. ⓒKBO
◆MBC 보너스 문제로 자중지란…해태 첫 우승

당시 대부분의 전문가는 객관적인 전력상 해태보다는 MBC의 우세를 점쳤다. 해태는 그해 20승을 거둔 에이스 이상윤이 있었지만, MBC는 그해 평균자책점(2.33) 1위 하기룡(13승9세이브)을 비롯해 3위 유종겸(2.40), 5위 이길환(2.51), 6위 이광권(2.51)에다 신인으로 10승(4세이브)을 거둔 오영일(평균자책점 2.91) 등을 보유해 마운드의 양과 질에서 앞선다는 평가였다.

해태는 또 4번타자 김봉연이 올스타 브레이크 때 교통사고로 얼굴을 314바늘이나 꿰매는 중상으로 이탈하면서 후기리그에서 6개 팀 중 4위에 그쳤다. MBC는 후기리그 30승19패1무로 우승해 상승세에 있었다. 여기에다 한국시리즈 1차전만 해태 홈구장인 광주구장에서 치르고 2차전부터 7차전까지 내리 6경기를 MBC의 안방인 잠실구장에서 열기로 한 것도 MBC에 유리한 경기장소 배정이었다.

그러나 일정 연기는 큰 변수(?)가 됐다. 그렇잖아도 그해 광주에서 전국체전이 열리면서 한국시리즈는 후기리그 종료 후 곧바로 시작하기 어려웠다. MBC는 9월 26일 후기리그 우승을 확정했는데, 한국시리즈는 10월 12일 1차전이 거행되는 일정이 잡혔다. 여기에 아웅산 폭탄 테러가 터지면서 또 일정이 3일 뒤로 밀렸다. 긴장의 끈이 풀어지는 날이 길어졌다.

그러면서 MBC에 뜻하지 않은 돌발 변수가 발생했다. 보너스 지급 문제를 놓고 자중지란이 벌어진 것. MBC는 시즌 도중 김동엽 감독을 통해 "후기리그 우승을 하면 500만원씩의 보너스를 주겠다"는 약속을 했지만, 후기리그 우승을 하자 정작 100만원만 성과급으로 지급했다. 화가 난 선수들이 이를 모두 구단에 반납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여기에 "해태는 우승하면 1억 원을 지급한다더라"는 소문이 선수단 내에 퍼졌다.

김동엽 감독이 나서서 "일단 한국시리즈 우승을 하면 내가 보너스를 책임진다"며 분위기를 수습하려 했지만 선수들의 사기는 이미 떨어질 대로 떨어진 뒤였다.

▲ 해태 김봉연은 교통사고 후유증을 딛고 1983년 콧수염을 기른 채 한국시리즈에서 19타수 9안타 8타점으로 맹활약하며 MVP(미스터 파랑새)에 올랐다. ⓒKBO

10월 15일 한국시리즈 1차전이 마침내 열렸다. 그런데 MBC 선발투수는 예상과 달랐다. 베테랑 에이스 하기룡 대신 신인 오영일이 나섰다. 시작부터 승부가 갈렸다. 1회말 3루수 이광은의 실책 등으로 3점을 내주고 2회말 1실점을 해도 MBC 벤치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4회말에 추가로 3점을 내주며 총 7실점을 기록할 때까지 투수교체를 하지 않았다. 해태로선 처음이자 마지막 홈경기인 1차전을 7-4로 잡으면서 기선제압에 성공했다. 장소를 잠실로 옮긴 뒤 2차전과 3차전도 해태의 손쉬운 승리.

고(故) 김동엽 감독이 1995년 펴낸 자전적 에세이 '그래, 짤라라 짤라'에 따르면 당시 3연패로 벼랑 끝에 몰리자 MBC 사장이 뒤늦게 "우리는 우승하면 2억 원을 준다고 하라"고 말했는데, 김 감독이 이때 "늦었습니다. 2억 원이 아니라 10억 원을 준다고 약속해도 뒤집긴 힘듭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MBC는 4차전에서 연장 15회 1-1 무승부를 기록하며 버텨봤지만, 5차전에서 다시 해태가 8-1로 승리하며 4승1무로 첫 우승을 차지했다. 수술 자국을 숨기기 위해 콧수염을 기르고 나타난 김봉연은 한국시리즈 5경기에서 홈런 1방을 포함해 19타수 9안타(타율 0.473), 8타점을 기록하며 재기에 성공하면서 MVP에 올랐다. 해태와 김응용의 우승 신화는 이때부터 시작됐다.

역사에 가정법은 없다. 단지 상상할 뿐이다. 한국시리즈 일정 연기 때문에 우승의 주인공이 바뀌게 됐다고 단정할 순 없지만, 만약 한국시리즈가 일정 연기 없이 치러지고 MBC가 자중지란 없이 후기리그 1위의 여세를 몰아 우승했다면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1984년과 1985년까지 우승하지 못한 김응용 감독은 해태와 재계약될 수 있었을까. 해태 신화는 만들어졌을까.

▲ 해태 선수단이1983년 한국시리즈 우승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그해 한국시리즈 일정이 연기되면서 자중지란에 빠진 MBC를 상대로 첫 우승을 거뒀다. 타이거즈 우승 신화의 시작이었다. ⓒKBO
◆2020년 코로나19 개막 연기, 어떤 변수와 역사를 남길까

KBO 공식 일정이 연기된 것은 그로부터 37년 만이다. KBO는 코로나19의 확산에 따라 10일 긴급이사회를 열고 "2020년 정규시즌 개막일을 4월로 잠정 연기한다"고 공식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KBO가 경기 일정 시뮬레이션을 해본 결과 4월 중순에라도 개막전을 열 수 있다면 정규시즌 144경기를 치르고 11월까지 한국시리즈 소화가 가능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코로나19가 계속 진정되지 않는다면 무관중 경기나 경기수 단축도 불가피하다. 개막을 강행한 뒤 다시 코로나19가 확산되거나 선수단 내에 확진자라도 나온다면 리그가 중단되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

▲ 코로나19로 지치고 우울해진 국민들이 화창한 봄날 야구장을 찾아 마음껏 응원할 수 있는 날은 과연 언제 찾아올까. ⓒ한희재 기자

누구나 같은 처지라고 하지만 개막전 연기는 예상치 못한 큰 변수임에 틀림없다. 누구에게 유리할지, 누구에게 불리할지 알 수 없다.

일단 10개 구단은 외부와 최대한 접촉을 자제하면서 자체적으로 훈련하기로 했다. 다른 팀과 연습경기 없이 훈련과 청백전만 치러야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시범경기도 전면 취소됐는데 상대팀도 없이 실전 감각을 찾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스파링파트너도 없이 매일 허공에 섀도복싱만 하며 결전을 준비해야 하는 복서나 마찬가지다. 언제 시작할지 모르는 게 더 큰 일이다. 긴장감과 컨디션을 끌어올리기가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다.

1983년 이후 37년 만에 사상 두 번째로 발생한 KBO 공식 일정 연기 사태. 그때는 한국시리즈였고 3일간 연기했지만, 지금은 개막이 늦춰졌고 시작 시점은 기약이 없다. 2020년 KBO리그는 이 돌발 변수 속에 어떤 역사를 남길지, 어떻게 기록될지….

스포티비뉴스=이재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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