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자신의 야구인생 50년 이야기가 담긴 자서전을 낸 이광환 감독이 제주도 서귀포시 강창학구장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서귀포, 고봉준 기자
-한국야구의 ‘살아있는 역사’ 이광환 감독
-LG 마지막 우승, 히어로즈 창단 등 숱한 경험
-사령탑 은퇴 후 자서전 통해 야구인생 회고

[스포티비뉴스=서귀포, 고봉준 기자] 카리스마 넘치던 추억 속 그때처럼, 멋들어진 ‘보잉 선글라스’를 낀 노년의 신사는 초록빛이 감도는 그라운드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자신의 손때가 하나하나 묻은 야구장에서 구슬땀을 흘리는 선수들을 바라보는 눈빛에선 흐뭇함이 감춰지지 않았다.

KBO리그의 살아있는 역사이자 한국야구의 참된 교육자로 꼽히는 이광환(72) 감독을 최근 제주도 서귀포시 강창학구장에서 만났다. 이곳은 이 감독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으로 얽혀있다. 2005년 강창학체육공원 부지 내 처음으로 야구장이 생길 때, 이 감독이 자문을 맡아 사실상의 산파 노릇을 했고, 2008년 초대 사령탑으로 부임한 우리 히어로즈의 창단 첫 전지훈련을 바로 이곳에서 진행했다. 또, 일반 학생들로 이뤄진 서울대 야구부 감독을 맡은 뒤로는 강창학구장을 매년 스프링캠프로 활용하곤 했다.

이 감독은 “여기에만 오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프로 진출이라는 꿈을 안고 열심히 뛰고 있는 고등학생과 대학생 선수들이 보고 싶으면 가끔 들르곤 한다. 또, 어린 친구들이 보고 싶을 때면 바로 옆 리틀야구장으로 가서 구경을 한다”고 웃었다.

▲ 올해 2월 서울대 야구부에서 마련한 이광환 감독의 퇴임식 장면(왼쪽)과 제자들이 손수 작성한 롤링페이퍼. ⓒ서울대 야구부
◆제자들의 축하 받으며 지도자 인생 마무리

어느덧 고희를 넘긴 이 감독은 올해 2월 뜻깊은 잔칫상을 대접받았다. 2010년부터 함께한 서울대 야구부원들과 졸업생이 모여 준비한 퇴임식 자리였다. 이 감독은 지난해를 끝으로 서울대 감독에서 물러나면서 기나긴 사령탑 생활을 정리했고, 이날 퇴임식을 통해 ‘감독 이광환’이라는 직함을 내려놓았다.

은퇴 후 한일은행에서 평범한 회사원으로 일하던 1977년, 모교 선후배들의 부탁을 받고 중앙고 감독을 맡으면서 시작한 지도자 인생만 43년이 흘렀다. 이 감독은 “밥이나 한 끼 먹는 줄 알고 상경했는데 지난 10년간 서울대에서 동고동락했던 제자들이 모두 모인 것 아닌가. 야구계 인사들도 몇 분 오시고…. 내가 뭐 대단한 사람이라고 그런 자리까지 만들었는지, 하하. 그래도 지겹도록 듣던 ‘감독’ 퇴임식이라고 하니까 기분은 좀 이상했다”고 멋쩍게 웃었다.

이 감독은 야구계 ‘삼김’으로 불리는 김응룡(79), 김성근(78), 김인식(73) 감독과 함께 KBO리그의 탄생과 성장을 이끈 거목이다. 1982년 OB 베어스 코치로 첫발을 들인 뒤 1988~1990년 OB 감독을 거쳤고, 이듬해 말 라이벌 구단인 LG 트윈스로 자리를 옮긴 후 1996년까지 지휘봉을 잡았다.

▲ 1994년 LG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끈 뒤 팬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는 이광환 감독(맨 왼쪽). ⓒLG 트윈스
당시로선 파격적인 '자율야구'를 이식하면서 1993년~1995년 LG 트윈스의 최전성기를 만들었던 그는 1994년 LG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면서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이 감독은 2001~2002년 한화 이글스 감독과 2003년 LG 감독을 거친 뒤 2008년 탄생한 우리 히어로즈의 초대 사령탑을 맡아 KBO리그 안착을 이끌었다.

화려한 경력을 뒤로하고 이제는 야인(野人)이 된 이 감독은 “수십 년 세월이 금세 흘렀다. 1982년 프로야구가 생긴다고 모두가 들떠 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40주년이 눈앞이다. 그러고 보니 LG에서 마지막 우승을 맛본 지도 25년이 넘었다”고 회고했다.

◆아직도 생생한 LG의 1994년 우승 추억

1994년은 LG는 물론 이 감독에게도 가장 화려했던 해로 기억된다. LG는 그때 이후 아직 한국시리즈 정상을 밟지 못하고 있고, 이 감독 역시 사령탑으로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우승을 경험한 해가 1994년이기 때문이다.

이 감독은 “프로야구 출범 후 10년이 넘은 상태였지만, 아직 많은 부분이 부족한 때였다. 구단 행정부터 운영, 선수단 관리, 게임 내용 모두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면서 “그래도 자율야구, 신바람 야구라는 칭찬을 들으면서 재미있게 야구를 했다. 김용수와 김동수 등이 중심을 잘 잡아줬고, 유지현과 서용빈, 김재현이 신인 돌풍을 일으켜준 덕분이었다”고 말했다.

▲ LG 김용수(가운데)를 비롯한 선수단이 1994년 한국시리즈 우승 직후 포효하는 장면. 이상훈과 김동수 등 당시 우승 주역들도 함께 보인다. ⓒLG 트윈스
그러나 LG의 황금기는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이후 단 한 번도 한국시리즈 정상을 밟지 못하면서 자존심을 구겼다. 김성근과 김재박, 김기태, 양상문 등 많은 사령탑들이 LG를 거쳐갔지만, 이광환 감독의 업적을 이어간 이는 없었다.

요새도 TV를 통해 LG 경기를 지켜보고 있다는 이 감독은 “OB부터 LG, 한화 등 많은 팀들을 거쳤지만, 그래도 가장 정이 가는 곳은 역시 LG 아니겠는가. 1994년 우승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면서 “그런데 그동안 LG가 참 어렵게 야구를 했다. 개인적으로 아쉬웠던 부분은 LG만의 색깔이 사라졌다는 점이었다. 그러면서 매년 하위권으로 밀려났다. 그래도 최근에는 좋은 선수들이 많이 들어오면서 전력이 강해졌다. 올해 창단 30주년을 맞이한 만큼 팬들에게 뜻깊은 선물을 했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 이광환 감독이 최근 내놓은 자서전. ⓒ기파랑
◆반세기 야구인생 담은 자서전

이 감독은 최근 자신의 야구인생이 담긴 자서전을 내놓았다. 책 제목은 ‘이광환 야구 이야기’(저자 정범준·출간 기파랑). 부제는 한국야구의 교육자 이광환 평전이다. 195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반세기 넘게 체험한 자신의 야구인생을 오롯이 담아냈다. 야구계 대기자로 추앙받는 고(故) 이종남 스포츠서울 기자가 1995년 집필한 ‘LG, 이광환, 자율야구’ 이후 25년 만에 야구인 이광환을 다룬 책이기도 하다.

이번 자서전은 대구국민학교 4학년이던 1958년 선생님의 손에 이끌려 야구경기로 강제 차출된 뒤 대구중과 대구상고, 중앙고, 고려대를 거친 뒤 한일은행과 육군으로 이어진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 이어 한일은행에서 월급쟁이로 일하다가 모교 중앙고 감독을 맡게 된 사연, OB 코치 시절 김성근 코치와 2인자 다툼을 벌였던 뒷이야기 그리고 자율야구로 대표되는 감독 철학 등을 자세하게 그린다. 일생의 업으로 삼은 육성 철학도 함께 담았다.

이 감독은 “아마 내 인생 마지막 책이 되지 않을까 싶다”며 웃더니 "그동안 걸어 온 야구인생을 정리하고 싶어 책을 내게 됐다"고 설명했다.

1958년 처음 배트를 잡은 뒤 한평생을 야구인으로 산 이 감독에게 마지막 질문을 건넸다. 반세기 야구인생을 돌아봐달라는 부탁이었다. 일흔을 넘긴 노장(老將)은 야구장을 한참을 바라본 뒤에야 어렵게 운을 뗐다.

“사실 그동안에는 주변을 돌아보지도 못했다. 솔직히 말하면 경쟁하고 이기느라 바빴다. 그러나 이렇게 돌아보니 모두가 소중한 동료였고, 귀중한 내 자식이었다.”

스포티비뉴스=서귀포, 고봉준 기자

▲ 이광환 감독이 강창학구장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서귀포, 고봉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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