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화 노태형이 14일 대전한화생명이글스파크에서 열린 두산전에서 끝내기 안타를 치며 18연패를 끝낸 뒤 동료들의 축하를 받고 있다. ⓒ대전, 한희재 기자
[스포티비뉴스=이재국 기자] 뭉클했다. 눈물이 났다. 끝나고 보니 허무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피식’ 웃음도 났다.

‘1승, 대체 이까짓 게 뭐라고….’

욕하면서 보고, 신세한탄하면서 보고, 끊을 수 없어서 보고, ‘언젠가는 이기겠지’ 하는 기대감으로 지켜봤다. 그것이 팬들의 마음이었다.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는 애리조나 사막의 호피 인디언들처럼, 한화의 ‘보살팬’들은 무수히 쌓여가는 패전의 숫자들을 바라봤다. 그러면서도 언젠가는 우리들의 뜻이 하늘에 닿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을 거두지 않고 응원을 보냈다.

그러나 ‘승리의 비’는 좀처럼 내리지 않고, 5월 23일 NC전 패배 이후로 스물하고도 이틀 동안 하늘은 시련의 바람을 멈추지 않았다.

‘어어’ 하는 사이 10연패를 넘어서고, ‘설마설마’ 하는 사이 1985년 삼미 슈퍼스타즈가 작성한 전설의 기록과 35년 만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야 말았다.

무려 18연패.

프로야구 초창기 약팀의 대명사 삼미에게나 어울리는, 현 시대에서는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기록인 줄 알았지만 현실이 됐다.

그 사이 많은 일들이 있었다. 코치들이 대거 바뀌었다. 30년 한화 밥을 먹은 레전드 한용덕 감독도 초라하게 퇴장했다. 최원호 감독대행 체제 속에 무려 10명의 선수가 1군 엔트리에서 말소와 등록이 교차되는 우여곡절도 겪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비난과 비아냥, 조롱과 멸시. 여기에 한화조차 부인할 수 없는 뼈아픈 비판과 쓴소리들…. 때로는 시류에 편승한 가짜뉴스와 억측들…. 아팠지만 받아들여야 했고, 억울했지만 받아내야만 했다.

▲ 한화 선수들이 덕아웃에서 간절하게 승리를 기원하는 표정으로 경기를 지켜보고 있다. ⓒ대전, 한희재 기자
계속된 연패에 선수단은 열패감에 휩싸였다. 마치 날개가 부러져 동굴 속에 갇힌 독수리마냥 길을 잃고 웅크리고 있었다. 이들을 일으켜 세운 건 다름 아닌 한화 ‘보살팬’. 기나긴 암흑기의 세월을 견뎌내며 단련된 그들은 오히려 비난 대신 응원으로 잠자던 선수단의 힘을 깨웠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로 인해 야구장에 들어갈 수 없게 되자, 대전한화생명이글스파크가 내려다보이는 보문산 전망대에 올랐다. 찜통 뙤약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경기 내내 이글스 깃발을 흔들며 가열 찬 응원을 보냈다. 보문산에 오르지 못했지만 TV를 통해 응원의 깃발을 함께 흔든 또 다른 한화 팬들의 진심이 보태졌다. 야구장 밖에는 '한화이글스 선수단 여러분 힘내세요. 팬들은 포기하지 않습니다'라는 현수막이 팽팽하게 걸렸다.

‘제발 포기하지 말아달라’는 애절한 그 마음이, ‘제발 1승만 하게 해달라’는 간절한 그 마음이 하늘에 닿고 선수단에 닿은 것일까. 마침내 메말랐던 대지에 1승의 단비가 내렸다.

13일부터 14일까지 장장 1박2일간 펼쳐진 특별 서스펜디드 게임에서 한화 선수단은 투혼을 불살랐다.

0-2로 뒤진 1회말 맏형 김태균은 동점 2점홈런을 쏘아 올렸고, 2-4로 뒤진 2회말 막내타자 노시환은 추격의 솔로포로 화답했다. 절체절명의 위기를 벗어난 투수 김범수와 김진영은 주먹을 불끈 쥐며 포효했고, 다리를 향해 날아온 공을 피하지 않고 맞고 나간 캡틴 이용규의 투혼에 선수단 전체 눈빛이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1회부터 점수를 주고 나면 무기력하게 패했던 이전과는 달리 뭔가 가능성이 보였다.

팬들도 모처럼 느끼는 몰입감, 손에 땀을 쥐게 했다. 이날 경기를 중계한 한 포털사이트의 누적 접속자수가 400만 명을 넘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연패로 만들어진 콘텐츠가 2020시즌 최고의 관심사가 됐다. 역설적으로 1승에 대한 가치와 소중함이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느껴진 순간이었다.

▲ 한화 선수들이 덕아웃에서 동료들의 플레이 하나하나에 환호를 보내며 한마음이 돼 응원을 하고 있다. ⓒ대전, 한희재 기자
그리고 ‘야구는 9회말 2아웃’이라는 격언처럼 입단 7년생 무명 선수 노태형은 6-6 동점이던 9회말 2사 2·3루에서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인생극장 스토리를 풀어냈다. 1박2일의 처절한 승부를 마감하는 생애 첫 끝내기 안타.

지긋지긋한 18연패의 쇠사슬을 끊어내고 그라운드로 달려 나온 건장한 사내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울부짖자, 지켜보는 이들의 콧등도 시큰해졌다.

‘야구가 뭐라고, 이까짓 1승이 뭐라고….’

한화 선수단과 관계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축하한다"는 인사에 "이게 축하 받을 일인가"라며 쑥스러워 하면서도 모두들 울컥했다.

그러나 한화 구단은 기쁨 대신 냉정함을 택했다. 18연패에서 탈출한 24일, 홈페이지에 임직원 명의로 공식 사과문을 올렸다. 구단 임직원이나 선수의 일탈 등으로 구단이 사과를 한 적은 있지만, 성적 부진을 이유로 홈페이지에 사과문을 올리는 것은 이례적인 일. 미흡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만큼 한화는 통렬한 자기반성을 하면서 3주 동안 마음고생을 하며 응원을 보내준 팬들에게 미안한 마음과 감사의 뜻을 담아 전했다.

18연패는 분명 한화에게 ‘위기의 시그널’이다. 연패에서 탈출했다고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다. 더 큰 위기와 시련이 다시 시작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위기의 시그널'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한화 구단이 환골탈태할 수 있는 ‘기회의 시그널’로 바꿀 수도 있다.

'참나무가 더 단단한 뿌리를 갖도록 하는 것은 바로 사나운 바람이다'라는 명언이 있다. 2020년 한화에게 불어 닥친 이 '사나운 바람'이 부디 이글스가 단단한 뿌리를 내릴 좋은 기회로 승화시키기를 많은 팬들이 바라고 있다. 더 이상 부끄러움을 ‘보살팬’들의 몫으로 남겨서는 안 될 일이다.

1승을 간절히 원하며 선수, 프런트, 팬들이 한마음 한뜻이 됐던 그날의 그 순간을 잊지 않는다면, 끝내기 안타가 나온 순간 두 주먹을 불끈 쥐었던 그 순간을 잊지 않는다면, 부러진 독수리의 날개에도 다시 새살이 돋아날 것이라 믿는다.

스포티비뉴스=이재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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