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티비뉴스=노윤주 기자, 송승민 영상 기자] 뛰는 사람은 괴롭지만, 보는 사람은 즐겁다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박싱데이가 돌아왔다.

박싱데이는 유럽 중세 시대 영주들이 성탄절에도 일을 해야 하는 하인들에게 다음 날인 12월 26일에 휴가를 주면서 유래됐다. 현대에 와서는 영연방 국가들이 26일 박스에 선물을 주고 담아 전달한다는 의미로 굳어졌다.

또, 파격적인 세일 기간이라 영국인들은 1년 모은 돈을 박싱데이에 쓴다는 말까지 있다. 실제 박싱데이 기간에 영국에 가봤던 스포츠타임은 그 세일폭에 정말 놀랐다.

이런 박싱데이가 축구로 들어오면 의미가 묘하게 변형된다. 축구를 좋아하는 팬들에게는 그야말로 경기가 선물처럼 쏟아진다. 박싱데이 동안 팀들은 짧게는 이틀에 한 번, 길어도 일주일 동안 서너 경기를 치러야 하는 혹사 주간이다. 단순히 26일 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31일 또는 해를 넘겨 1월 2일까지 죽음의 일정을 소화하게 된다.

우리로 치면 설날이나 추석 등 명절에 대규모 스포츠 이벤트가 몰리는 셈이다.

하지만, 어디 프리미어리그만 할까.

프리미어리그와 리그컵, FA컵 등이 뒤섞여 열리기도 한다. 빡빡한 리그 일정은 휴식기를 갖는 다른 유럽 리그와 달리 프리미어리그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는데, 전체 일정의 절반 가까이 지나가는 절묘한 시기와도 맞닿아 있다.

리그 시작 시점에 따라 다르지만, 전력이 좋은 팀은 지옥의 일정을 견디며 승리를 누적하고, 그렇지 않은 팀은 승점을 잃는 희비가 명확하게 갈린다.

모든 팀이 체력 부담을 안고 싸우는 시기라 심심치 않게 이변도 볼 수 있다. 그래서 모두가 박싱데이에 열광한다.

산업적 측면으로 보면 박싱데이는 구단의 매출과도 직결된다. 유럽 5대 리그 중 유일하게 일정을 소화해 중계권료나 구단 입장권 등이 조금 더 비싸다. 아시아 시장을 겨냥해서 현지 시간으로 정오에 경기가 시작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오전 9시부터 경기장 근처는 관람객들로 가득하다. 유관중 시대였다면 비인기 팀이라도 꽉꽉 들어찬 경기장을 볼 수 있을 뻔했다. 박싱데이 기간에는 구단 상품 가격을 내려 판매율이 팍팍 올라간다고 한다.

박싱데이의 속설 중 하나가 바로 순위다. 이 기간에 기록한 순위가 시즌 종료 시점과 똑같다는 것이다. 즉, 박싱데이에 1위면 우승으로 시즌을 마감하고 강등권이면 강등을 피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최근 10시즌만 보더라도 박싱데이 1순위가 최종 1순위인 경우가 8회나 된다. 그렇다면 나머지 두 번은 언제였을까.

2013-14 시즌 박싱 데이까지 아스널이 승점 42점으로 1위였는데, 최종 순위는 79점으로 4위였다. 아스널에 1점 차 2위였던 맨시티가 86점으로 우승을 가져갔다. 아스널은 박싱 데이를 잘 견뎠지만, 리버풀이나 맨유 등 경쟁팀과 겨루기에서 패했거나 비기는 등 소위 승점 6점짜리 승부를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반면, 맨시티는 발목 잡히는 경기가 없었다. 그 점이 우승을 갈랐다. 2015-16 시즌에도 아스널이 우승을 놓쳤다. 레스터에 골득실에서 앞서 박싱데이 기간 1위였는데 최종 순위는 레스터에 승점 10점이나 뒤진 2위였다. 레스터의 동화 같은 우승에 크게 일조했다.

20개 구단 체제로 운영되기 시작한 1995-96 시즌으로 기준을 넓히면 1999-2000 시즌까지는 계속 뒤집혔다. 그러다 2000-01 시즌 맨유의 우승을 시작으로 쉽게 바뀌지 않는 형세로 굳어진다. 총 25시즌 중 11시즌이 뒤집어졌지만, 2010년대 이후에는 2번에 불과하니 그만큼 현대 축구에서의 리그 집중력이 훨씬 좋아졌다고 볼 수 있겠다.

올 시즌 아스널은 최악을 달리며 15위까지 미끄러져 있는데, 아스널 팬들은 마음이 찢어질 것 같다.

이번엔 강등 사례를 한 번 볼까.

지난 10시즌 동안 3팀이 그대로 강등된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적어도 1팀 정도는 운명의 칼날을 자력으로 피했다는 것이다. 최소 강등권 탈출 확률이 33%는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꼴찌 한 팀 대다수는 강등권을 벗어나지 못했다.

2009-10 시즌만 봐도 볼턴 원더러스, 헐시티, 포츠머스가 박싱데이 강등권이었는데 실제 강등은 번리, 헐시티, 포츠머스였다. 볼턴은 14위로 반전을 이뤄냈다. 지난 시즌에는 아스톤 빌라, 왓포드, 노리치 시티가 강등권이었는데 최종적으로는 본머스, 왓포드, 노리치였다. 분명 한 팀 정도는 탈출 여지가 있는 것이다.

역시 20개 구단 체제로 봐볼까.

지난 시즌까지 보면 박싱데이 강등권 팀이 그대로 강등된 경우는 1995-96 시즌 맨시티, 볼턴 원더러스, 퀸즈 파크 레인저스와 2001-02 시즌 더비카운티와 입스위치타운, 레스터시티가 유이하다.

올해 4월 영국 스카이스포츠의 발표에 따르면 1888년 이후 박싱 데이에서 역대 가장 좋은 승률을 기록했던 팀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인데, 92경기에서 50승 15무 27패로 54.35%였다고 한다. 리버풀은 87경기에서 45.88%의 승률로 프리미어리그 팀 중 상위권에 속했고 나머지는 현재 2부 리그인 챔피언십이나 리그원 등 하부리그에 있는 팀들이다. 그만큼 맨유와 리버풀이 전통 명문의 위엄을 박싱데이에 지켰다는 뜻이다. 우승이든 잔류든 '운명을 피할 수 없다면 그대여 그 운명에 당당하게 맞서라'라는 말이 딱 생각난다.

박싱데이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감독들은 불만이 많다.

위르겐 클롭 리버풀 감독은 "더 많은 팀들이 48시간 이내에 프리미어리그 경기를 치러야 할 이유가 없다. 몸은 특정한 정도의 회복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걸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며 분노했다. 

조제 무리뉴 토트넘 감독도 지난해 박싱데이에서 "선수들이 48시간 이내에 경기를 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 이건 범죄다. 모든 생물학적 법칙에 어긋나는 것이다"라고 강력하게 비판했다. 펩 과르디올라 맨시티 감독은 프리미어리그 사무국에 편지까지 써서 폐지를 요구했다고 한다.

전통을 깰 수 없는 프리미어리그는 대신 2월에 2주 정도 되는 휴식기를 주기로 결정하고 지난 시즌부터 도입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휴식기에 챔피언스리그 16강이나 유로파리그 32강 일정이 잡혀 있다는 것이다. 또, FA컵 재경기가 걸린 팀도 일정을 소화해야 한다. 이거 쉬어도 쉬는 게 아니다.

한국인 프리미어리거들도 박싱데이와 인연이 깊다.

'우리흥' 손흥민은 토트넘에 입성한 2015-16 시즌부터 2018-19 시즌까지 박싱데이마다 골을 기록했다. 특히 2017-18 시즌 박싱데이 경기였던 사우스햄턴과 20라운드에서는 1골 2도움을 기록하며 5-2 승리에 일조했다. 

이 경기가 의미 있었던 이유는 케인이 해트트릭을 해냈는데, 손흥민은 케인의 두 번째 골에 도움을 기록하며 2017년 리그와 컵 대회, 유럽 클럽대항전을 포함한 한해 최다골 기록에 일조했다. 즉 케인은 2017년에만 총 56골을 넣은 것이다.

'해버지' 박지성도 맨유 데뷔 시즌이었던 2005년 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언전에서 폴 스콜스의 선제골에 도움을 기록하며 맨유 팬들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2011-12 시즌 18라운드 위건전에서는 전반 8분 영혼의 단짝 파트리스 에브라의 도움으로 선제골을 넣더니 후반 33분에는 직접 페널티킥을 얻어내 디미타르 베르바토프의 페널티킥 성공으로 1골 1도움, 5-0 승리에 일조했다.

스완지시티에서 뛰었던 기성용은 2012-13 시즌 선덜랜드 소속으로 에버턴과의 18라운드에서 스스로 만든 페널티킥을 넣으며 프리미어리그 데뷔골을 넣었다. 2015-2016 시즌 18라운드 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언전에서는 결승골을 넣으며 무려 두 달 만에 팀에 1-0 승리를 안겨다 준 동시에 강등권 탈출을 이끌었다. 스완지는 최종 12위로 마감해 기성용의 골은 분명 영양가가 있다.

선덜랜드 소속으로 뛰었던 지동원도 2011-12 시즌 19라운드 맨시티전에서 결승골을 넣으며 1-0 승리를 이끌었다. 사실 지동원의 상황은 지금처럼 VAR이 있었다면 오프사이드였겠지만, 뭐 어쨌든 강렬한 골을 남겼다. 이후 한 남성 팬의 키스 세례는 덤이었다.

어쨌든 올 시즌 박싱 데이는 26일 레스터시티-맨유전으로 시작한다. 코로나19로 리그 시작이 다소 늦어져 15라운드부터 진행된다. 3경기를 치르는데 어떤 결과를 낼지에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

아스널-첼시의 런던 더비를 비롯해 에버턴-맨시티, 맨유-울버햄턴, 토트넘-리즈, 첼시-맨시티 등 빅 매치들이 라운드마다 배치됐다. 순위 싸움이 매우 치열할 것 같다.

한 가지 변수는 토트넘, 맨유, 맨시티, 에버턴, 뉴캐슬, 아스널은 리그컵 8강을 치르고 왔다는 점이다. 피곤이 누적된 상황에서 박싱데이를 어떻게 견뎌낼 것인지가 관건이 되겠다.

현재 1위는 승점 31점의 리버풀, 2위는 27점의 레스터시티다. 맨유, 에버턴, 첼시 순으로 3~5위에 올라 있고 토트넘은 공동 1위에서 6위까지 추락했다. 

지금 순위라면 유럽클럽대항전 출전권 확보는 어렵다. 우승을 원한다면 3전 전승 또는 2승 1무 이상의 성적을 거둬야 리버풀 추격이 가능할 것 같은데 울버햄턴, 풀럼, 리즈. 만만치 않다. 손-케인 듀오의 결정력과 무리뉴 감독의 전략을 믿어봐야겠다.

어쨌든 축구로 물드는 박싱데이, 누가 팬들을 웃기고 울릴지 함께 지켜볼까.

스포티비뉴스=노윤주 기자, 송승민 영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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