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2년 뉴델리 아시아경기대회 육상 남자 200m에서 우승한 장재근이 관중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대한체육회
[스포티비뉴스=신명철 편집국장] 1970년 방콕 아시아경기대회 마라톤 동메달리스트 강명광의 기록은 2시간26분47초8로 그리 좋지 않았지만 마라톤 침체기에도 1958년 도쿄 대회의 이창훈 금메달, 1966년 제 5회 방콕 대회의 이상훈 동메달로 이어지는 메달의 맥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데 의의가 있었다. 한국 마라톤은 세계 무대에서는 1990년대 초반까지 이렇다 할 성적을 올리지 못하지만 아시아경기대회에서는 1982년 뉴델리 대회에서 김양곤이 우승하는 등 명맥을 유지했다. 그런 노력을 바탕으로 1990년 베이징 대회 김원탁, 1994년 히로시마 대회 황영조, 1998년 방콕 대회와 2002년 부산 대회 이봉주의 대회 4연속 우승을 이루게 된다. <11편에서 계속>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한국 육상은 또다시 세계의 높은 벽을 실감했다. 남자 높이뛰기의 박상수는 2m로, 1970년 방콕 아시아경기대회 금메달리스트인 여자 포환던지기의 백옥자는 15m78로 결선에 오르지 못했다. 박상수는 10위, 백옥자는 15위였다. 세계 무대가 문제가 아니었다. 한국 육상은 아시아 무대에서도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

1974년 테헤란 아시아경기대회에서는 백옥자가 여자 포환던지기에서 금메달, 박석관이 남자 1500m에서 동메달을 땄지만 전반적으로 저조했다. 백옥자는 전 대회인 1970년 방콕 대회보다 1m71을 더 던진 16m28로 2개 대회 연속 대회 신기록을 세우며 1위를 차지했다. ‘아시아의 마녀’로 불릴 만했지만 무대는, 별명 그대로 아시아였다. 오세진이 남자 100m 준결승에서 탈락하고 박상수가 남자 높이뛰기에서 9위에 그치는 등 트랙과 필드에서 모두 이렇다 할 성적을 올리지 못했다.

육상 종목 순위에서 한국(금 1 동 1)은 일본(금 10 은 11 동 11)과 이 대회에서 아시안게임에 데뷔한 중국(금 5 은 10 동 6) 그리고 인도(금 4 은 7 동 4) 등에 밀리는 건 그렇다 치고 스리랑카(금 2), 싱가포르(금 1 은 1 동 2)에도 뒤지는 공동 10위에 그쳤다. 중국과 함께 아시아경기대회에 처음 얼굴을 내민 북한은 해머던지기에서 김명근이 유일한 메달(동)을 따 남북한 모두 저조한 성적을 남겼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는 '기초 종목 가운데 기초 종목'인 육상이 선수단에 들지 못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몬트리올 올림픽 한국 선수단은 임원 22명과 선수 50명으로 4년 전 뮌헨 대회를 약간 웃도는 규모였다. 출전 종목은 레슬링과 유도, 남녀 배구, 복싱, 사격이었다.

1978년, 방콕에서만 3번째 열린 아시아경기대회에서 한국 육상은 '노 골드' 성적표를 받았다. 여자 200m에서 이은자가 은메달, 남자 100m에서 서말구가 동메달을 딴 게 메달의 전부였다. 이 대회 한국의 육상 종목 순위는 8위였는데, 직전 대회보다 순위가 오른 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아시아경기대회에 두 번째 출전한 중국(금 12 은 9 동 13)은 일본(금 10 은 15 동 10)을 제치고 1위에 올라 뒷날 아시아를 넘어 세계의 '스포츠 공룡'이 될 예고편을 상영했했다. 북한은 김옥선이 여자 1,500m와 3,000m에서 금메달을 목에 거는 등 금메달 2개와 은메달 2개, 동메달 4개로 5위를 차지했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 불참한 한국 스포츠로서는 1982년 뉴델리 아시아경기대회가 1980년대 들어 맞이하는 첫 번째 국제종합경기대회였다. 대회가 열린 그해 11월에는 이미 1986년 아시아경기대회와 1988년 올림픽의 서울 개최가 결정돼 있었다. 양대 대회를 앞둔 한국 스포츠에는 경기력 향상이라는 발등의 불이 떨어졌다.

경기력에서 세계적인 수준에 뒤진 종목에는 특히 비상이 걸렸다. 주최국으로 최소한의 체면치레는 해야 했기 때문이다. 모든 종목에 걸쳐 ‘88꿈나무’ 발굴 사업이 벌어졌다.

"경기 단체별로 서울 올림픽에 대비한 유망주들을 뽑아 경기력 향상을 위한 각종 프로그램을 시행했다. 당시 꿈나무들의 연령대를 보면 서울올림픽뿐만 아니라 단기적으로는 1986년 서울아시아경기대회, 장기적으로는 서울 올림픽 이후까지 내다보고 있었다." 오진학 전 대한체육회 사무차장의 회고가 아니더라도 한국 스포츠는 서울 올림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한 단계 더 발전할 수 있었다. 육상 꿈나무들이 미국 전지훈련에 나서는가 하면 탁구 꿈나무들은 유럽 클럽에 유학을 가기도 했다. 한국 스포츠는 1990년대, 나아가 2000년대에 접어들 때까지도 '88 꿈나무' 사업의 성과를 누렸다. 어느 체육 관계자는 한국 스포츠가 오랫동안 '88 꿈나무'를 털어먹었다고까지 표현했다. 그 무렵 꿈나무라는 말이 얼마나 많이 돌아다녔는지 '88 꿈나무'는 1988년에 입학한 대학생들을 일컫는 말로 전용되기도 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였다고 하기에는 시기적으로 맞지 않지만 뉴델리 아시아경기대회 육상에서 한국은 직전 대회 '노 골드'에서 벗어나 남자 200m에서 장재근이 20초89, 남자 멀리뛰기에서 김종일이 7m94로 트랙과 필드에서 각각 금메달을 기록하며 어느 정도 체면을 세운 뒤 마라톤에서 김양곤이 2시간 22분 21초의 기록으로 1위로 골인해 한국 선수단의 메달 레이스에 한몫했다. 한국이 아시아경기대회 마라톤에서 우승한 건 1958년 도쿄 대회 이창훈 이후 24년 만이었다. <1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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