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선애의 전영배드민턴선수권대회 우승 소식을 알린, 1981년 3월 30일 자 동아일보 1면 기사.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1970~80년대 양궁을 관심 종목으로 이끈 선수가 김진호(1979년 서베를린 세계선수권대회 5관왕)라면, 배드민턴에는 황선애가 있다.

1981년 3월 30일 자 신문과 TV 스포츠 뉴스를 본 스포츠 팬들은 깜짝 놀랐다. 국내 매체 영국 특파원들과 AP통신 등 외신이 보도한 내용은 19살의 한국체대 학생이 전통을 자랑하는 전영(全英)배드민턴선수권대회 여자 단식 결승에서 대회 2연속 우승자인 덴마크의 르네 캐팬을 세트스코어 2-0(11-1 11-2)으로 꺾고 우승했다는 것이었다.

세계 무대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던 아시아의 무명 선수가 권위의 전영 오픈에서 우승하자 전 세계 배드민턴 관계자들은 깜짝 놀랐다. 이 선수가 바로 황선애다. 황선애는 그해에 스웨덴 오픈과 일본 오픈에서도 금빛 스매싱을 했다.

부상으로 20대 중반 나이에 비교적 일찍 은퇴한 점이 아쉽긴 하지만 황선애가 배드민턴 발전에 기폭제 구실을 한 사실은 한국 스포츠 역사에 기록해 둘 만하다.

그 무렵 배드민턴은 동네 뒷산에서 아저씨들이 하는 운동 정도로 인식돼 있었다. 그런데 생활체육으로서 배드민턴은 그때도 상당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한국 대만 일본의 배드민턴 동호인들이 겨루는 대회가 장충체육관에서 열리기도 했다.

그러나 엘리트 스포츠로서 배드민턴은 존재감이 약했다. 그럴 만했다. 올림픽 종목은 언감생심인 시절이었다. 아시아경기대회에서는 비교적 이른, 1962년 제4회 자카르타 대회에서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지만 한국은 이 대회 배드민턴 종목에 출전하지 않았다.

1966년 방콕 대회에서 여자 단체전 동메달을 땄지만 스포츠 팬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어 1970년 방콕 대회 여자 단체전에서 또다시 동메달을 획득한 게 1970년대까지 배드민턴이 국제 대회에서 거둔 성적의 거의 전부다.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에서 금메달 2개와 은메달 1개, 동메달 1개의 뛰어난 성적을 거두며 효자 효녀 종목으로 화려하게 등장한 한국 배드민턴이 30여년 사이에 이렇게 발전하리라고 내다본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배드민턴의 유래와 발전과 관련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12세기께 영국 왕실 문헌에 배드민턴과 비슷한 놀이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와 같은 경기의 원형은 인도 봄베이 근교 푸나 지방에 옛날부터 있던 놀이다. 처음에는 양가죽으로 만든 공을 손바닥으로 치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발전해 코르크에 새 깃털을 꽂아서 라켓으로 치는 놀이로 바뀌었다.

1873년 인도에 주둔한 영국군 장교가 귀국 후 영국 그로스터셔에 거주하는 T.D.보퍼트의 영지인 배드민턴 마을에 있는 그의 별장에서 인도에서 하던 놀이를 소개했다. 배드민턴이라는 종목 이름의 유래다.

1890년에 이르러 일정한 코트와 네트의 높이에 의한 배드민턴 게임이 활발해지자 1893년 9월 영국배드민턴협회가 창립됐고 1899년 제1회 전영국선수권대회가 열렸다. 황선애가 우승한 대회는 제71회 대회다.

영국배드민턴협회 창립에 이어 캐나다(1921년)·뉴질랜드(1927년)·덴마크(1930년)·네덜란드(1931년)·프랑스(1934년)·미국(1937년) 등에서 협회가 창설됐다. 1934년 런던에서 9개국 대표가 모여 국제배드민턴연맹을 결성했고 1939년 경기 규칙을 제정했다. 

1949년 국제배드민턴연맹 초대 회장을 맡은 G.A.토머스 경이 기증한 높이 70cm 순은제 컵을 놓고 겨루는 남자선수권대회가 3년마다 열리며 여자 경기로는 1956년 영국 선수권자인 H.S.위버 부인이 기증한 높이 약 50cm의 순은제 컵을 다투는 대회가 3년마다 개최되고 있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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