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5년 조선체육회 주최 제1회 전조선빙상경기대회에 출전한 선수들. ⓒ대한체육회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평창은 2011년 7월 6일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열린 제123차 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에서 뮌헨(독일)과 안시(프랑스)를 1차 투표에서 가볍게 제치고 대회 유치에 성공했다. 삼수 끝에 거둔 성과였다. 이제는 대회를 잘 치르고 대회 이후 경기장 시설 등을 활용해 성공한 올림픽으로 남기게 하는 일이 중요하다. 동·하계 올림픽과 축구 월드컵, 세계육상선수권대회 등 굵직한 스포츠 이벤트가 지난 30년 사이 한반도 남쪽에서 펼쳐진다. 중·장년 스포츠 팬들에게는 감격스러운 일이다. 한국 겨울철 스포츠는 그동안 어떻게 발전해 왔을까. 겨울철 올림픽 출전사로 알아본다. <편집자 주>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제국주의 일본이 대한제국을 병탄한 지 20여년이 흐른 1930년대 이 땅의 젊은이들은 스포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마라톤과 축구, 농구 등은 물론 겨울철 종목에서도 일본인 선수들과 겨뤄 밀리지 않는 실력을 자랑했다.

이 땅에 빙상경기가 들어온 시기는 야구 농구 등과 거의 비슷하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맨 처음 스케이트를 신고 얼음을 지친 이는 현동순이다. 1908년 5월 임무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가는 서울YMCA 총무 필립 질레트(한국 이름 길례태·吉禮泰)가 불필요한 가구를 경매했을 때 15전을 주고 질레트가 사용했던 스케이트를 사서 현동순이 그해 겨울 삼청동 개천에서 탄 것이 우리나라 첫 스케이팅으로 알려져 있다. 필립 질레트는 여명기 우리나라 스포츠의 큰 은인이다. 우리나라 청년들의 체력 향상을 위한 스포츠 활동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필립 질레트는 1904년 야구에 이어 1907년 농구도 이 땅에 소개했다.

1908년 2월 1일 평양 대동강에서 일본인들이 빙상 운동회를 가진 것이 우리나라 첫 빙상경기 행사다. 1910년 2월 6일 일본인이 발행한 일출신문사 주최로 한강에서는 처음으로 우리 민족의 빙상 운동회가 열렸다.

그런데 2015년 12월 KBS가 방영한 다큐멘터리 ‘조선을 사랑한 의사 에비슨 42년의 기록’에는 우리나라 스케이팅 역사와 관련한 흥미로운 내용이 나온다. 1894년으로 추정되는 해에 캐나다에서 온 의사 올리버 에비슨은 고종의 초대로 경복궁 안에 있는 연못인 향원지에서 국내에 머무르고 있는 외국인들과 함께 스케이트를 탔다. 그때 고종은 먼발치에서 이들이 얼음을 지치는 장면을 지켜봤다고 한다. 19세기 말에 이 땅에 스케이팅이 소개된 것이다.

1920년대 초반까지 스케이트장 개설과 중국 빙상경기단 초청 스케이트 대회 개최 등으로 조금씩 보급돼 가던 스피드스케이팅은 1923년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1923년 동아일보사 평양 지국은 대동강에서 우리 민족 손으로는 처음인 빙상경기대회를 열었다. 1월 20일 대동강빙상대회라는 이름으로 치러진 이 대회에는 참가금 50전만 내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었다. 경기 종목은 크게 전진 경기, 배진(背進=후진) 경기 두 가지로 나뉘었으며 한 바퀴 320야드의 링크를 30바퀴까지 도는 최장거리까지 여러 세부 종목이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이 처음 여는 빙상경기대회여서 대동강 강변의 양쪽 성벽 위에는 수많은 관중이 모여 경기를 지켜봤다. 

조선체육회(오늘날의 대한체육회)는 대동강빙상대회보다 2년 뒤인 1925년 1월 5일 한강에서 제1회 전조선빙상경기대회를 개최했다. 경기 종목은 전진부에 100m와 400m, 800m, 1500m, 5000m, 1만m 그리고 후진부에 300m와 600m, 800m 계주가 있었다. 이날은 날씨가 포근해 얼음이 두껍지 않다 해서 많은 사람이 얼음 위에 몰리면 자칫 얼음이 깨져서 위험할지 모른다고 경찰이 대회 중지를 명령했다. 그러나 주최 측은 선수 63명만 얼음 위에 입장시킨다는 조건으로 경찰을 설득해 대회를 강행했다.

1927년 1월 5일 한강에서 열 예정이던 제2회 전조선빙상경기대회는 기온 상승으로 열지 못했다. 1928년 1월에도 조선체육회는 제3회 전조선빙상경기대회를 한강에서 개최하지 못했다. 높은 기온 때문에 경기를 치르기에 알맞은 두께의 얼음이 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무렵 빙상경기의 우수 선수가 대동강이나 압록강 부근에서 배출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결빙기는 서울 한강이 1개월 가량, 평양 대동강이 3개월 가량, 신의주 압록강은 거의 5개월이나 됐다. 서울에서 빙상경기대회를 개최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많았지만 그래도 1960년대까지 한강에서는 꾸준히 빙상경기대회가 열렸다.

높은 기온 관계로 제 2회 대회부터 제 4회 대회까지 치르지 못했던 전조선빙상경기대회의 제5회 대회가 1929년 1월 23일 한강에서 140여명의 선수들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조선체육회는 1930년 1월 25일 한강에서 동아일보와 공동 주최로 제6회 전조선빙상경기선수권대회를 열었다. 종전의 전조선빙상경기대회에 ‘선수권’을 넣어 대회 이름을 바꿨다. 대회의 위상을 높인 것이다.

조선체육회는 1932년 1월 24일 날씨에 신경을 쓰지 않고 빙상경기대회를 열 수 있는 압록강에서 제8회 전조선빙상경기선수권대회를 개최할 예정이었으나 만주사변이 일어난 만주와 한반도 사이의 압록강에서 대회를 갖는 데 불안감을 느껴 개최를 취소했다.

1934년은 우리 빙상경기 선수들이 눈부신 활약을 보인 해다. 전일본빙상경기선수권대회에서 메이지대학교에 재학하고 있던 김정연과 이성덕, 최용진이 종합 성적 1, 2, 3위를 휩쓰는 놀라운 활약을 보였다. 메이지신궁경기대회 빙상경기에서는 이성덕이 500m를 47초2, 1000m를 1분43초의 일본 신기록으로 달려 우승을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1500m도 제패해 3관왕이 됐다. 같은 대회 5000m에서는 김정연이 우승했다.

1935년 1월 서울 한강에서 조선체육회가 치를 예정이던 제11회 전조선빙상경기대회는 따뜻한 날씨 때문에 열리지 못하는 등 그때도 ‘겨울철 온난화’ 현상이 종종 나타났다.

1936년 2월 6일부터 16일까지 독일 가르미시-파르텐키르헨에서 열린 제4회 동계 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에 이성덕과 김정연, 장우식 등 우리 선수 3명이 일본 대표 선수로 참가했다. 일본은 1928년 제2회 생모리츠(스위스) 대회 스키 종목에 6명의 선수를 파견해 첫 출전한 이후 이 대회에는 스키 아이스하키 피겨스케이팅 등에 31명(여자 1명)의 선수단을 내보냈다. 스피드스케이팅에는 7명의 선수 가운데 3명이 조선인 선수였다.

당시 스피드스케이팅에서는 우리 선수들이 일본 선수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스피드스케이팅은 기록 경기여서 뛰어난 기록을 자랑하는 우리 선수들을, 농구나 축구처럼 일본체육협회가 무시할 수 없었다.

36명이 출전한 500m에서 이성덕은 45초0으로 12위를 했고, 37명이 참가한 1500m에선 김정연이 2분25초0의 일본 신기록을 세우며 15위로 골인했다. 이성덕은 이 종목에서 2분28초9로 23위를 했다. 39명이 나온 5000m에서 김정연은 8분55초9로 21위, 이성덕은 9분8초0으로 27위 그리고 장우식은 9분8초7로 28위를 했다.

'빙판 위의 마라톤’으로 불리는 1만m에는 ‘조선인 선수 3명만 출전했다. 30명의 선수 가운데 김정연은 18분2초8의 올림픽 신기록이자 일본 신기록을 마크하면서 13위로 들어왔다. 이성덕과 장우식은 각각 25위와 26위였다. 한강이 제대로 얼지 않아 대회를 열지 못하는 등 열악한 경기장 시설과 국제 대회 출전 경험 부족 등 악조건 속에서도 중위권에 들었다는 것은 한국 동계 올림픽 역사에서 주목할 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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