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펜싱에서 2개의 금메달이 나온 1990년 베이징 아시아경기대회 입장식 장면 ⓒ대한체육회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이어 1960년 8월 제17회 로마 올림픽을 앞두고 열린 FIE(국제펜싱연맹) 총회에 참가해 회원국으로 가입하면서 국제 무대 진출의 발판을 마련했다.

1960년 12월 전국남녀개인펜싱선수권대회가 개최된 데 이어 1961년 1월 대한체육회 정식 가맹 단체가 됐고 1962년 대구에서 열린 제43회 전국체육대회 때 정식 종목으로 채택돼 7개 시도에서 출전했다. <1편에서 계속>

펜싱은 올림픽 원년 종목이지만 국내 보급과 발전이 다른 종목에 견줘 늦었기 때문에 올림픽 출전도 1964년 도쿄 대회 때 처음 이뤄졌다. 도쿄 올림픽에는 4명(남 3, 여 1)이 출전했다.

1972년 8월 AFF(아시아펜싱연맹)에 가입한 뒤 아시안게임에서 펜싱이 처음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1974년 제7회 테헤란 아시아경기대회에 5명이 출전해 남자 플러레 단체전에서 북한과 중국을 누르고 일본에 이어 은메달을 땄다. 이 결과가 이후 ‘한중(韓中) 펜싱 대전(大戰)’의 서막이 될 것으로 예상한 이는 많지 않았다.

1978년 제8회 방콕 아시아경기대회에서 한국은 플러레 남자 단체전에서 일본과 중국을 누르고 두 대회 출전만에 금메달을 획득하는 쾌거를 이뤘다. 한국은 은메달 1개와 동메달 3개를 보태 중국(금 4 은 4)과 일본(금 3 은 3 동 4)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1979년 8월 멜버른에서 열린 세계펜싱선수권대회에 남자 선수 6명이 출전해 국제 대회 경험을 쌓은 한국은 1986년 제10회 서울 아시아경기대회에서 단숨에 중국과 양강 체제를 만들었다.

최정식과 김봉만, 이일희, 이상기, 윤남진이 나선 남자 에페 단체전 결승에서 중국을 8-1로 꺾고 금메달을 차지했고 이 종목 개인전에서는 이일희가 우승해 2관왕이 됐다. 고낙춘과 조재봉, 이영록, 홍영승 그리고 김승균이 출전한 남자 플러레 단체전 결승에서는 중국을 8-6으로 누르고 1위 올랐고 이 종목 개인전에서 한국은 고낙춘과 조재봉이 금메달과 은메달을 나눠 가졌다. 한국은 은메달 3개, 동메달 2개를 더해 일본(동 4)을 멀찌감치 따돌리고 중국(금 4 은 5 동 2)과 엇비슷한 성적을 올렸다. 1982년 뉴델리 아시아경기대회에서는 펜싱 경기가 열리지 않았다.

비약적인 발전을 하고 있었지만 1990년대까지만 해도 펜싱은 아시아경기대회 메달박스 정도로 여겨졌다. 펜싱의 발상지인 유럽과 실력 차가 엄청나다는 생각을 펜싱 관계자들은 물론 스포츠 팬들도 갖고 있었다. 글쓴이도 1980~90년대 태릉선수촌 취재를 가면 펜싱 선수들 훈련장소를 지나치기 일쑤였다.

펜싱이 오늘날 대표적인 효자 효녀 종목이 될 가능성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움트고 있었다. 한국은 이 대회 남자 플러레 단체전 조별 리그 D조에서 오스트리아를 꺾고 조 1위 독일과 함께 8강에 올랐다. 접전 끝에 준우승 팀인 쿠바에 져 준결승에 오르지 못했지만 유럽 나라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됐다.

1990년 제11회 베이징 아시아경기대회에서 중국은 홈 피스트의 이점을 최대한 누렸다. 한국은 플러레 여자 개인전에서 탁정임이, 에페 남자 개인전에서 양달식이 각각 금메달을 찔렀고 에페 남자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추가했다. 에페 남자 개인전에서는 한국 선수들이 1위~3위를 모두 차지했다. 한국(금 3 은 6 동 20은 나름대로 선전했지만 중국은 10개 세부 종목 가운데 7개의 금메달을 휩쓸었다. 모든 금메달을 한국과 중국이 나눠 가졌다.

1994년 제12회 히로시만 아시아경기대회에서도 한중(韓中) 싸움은 변함없이 이어졌다. 한국(금 2 은 3 동 4)은 중국(금 5 은 2)에 이어 종목 2위에 올랐다. 이 대회에서는 펜싱뿐만 아니라 여러 종목에서 변화가 있었다.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 나라들이 출전했기 때문이다. 펜싱에서는 카자흐스탄(금 1 은 1 동 1)이 일본(은 2 동 3)을 제치고 종목 3위에 올랐다.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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