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5년 연초에 만난 김영덕 전 빙그레 이글스 감독. 여든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건강했다. ⓒ신명철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지난 7일 한화 이글스와 KT 위즈 경기가 열린 KT위즈파크에 원로 야구인 한 분이 어려운 발걸음을 했다. 국내 프로 야구  첫 한국시리즈 우승 사령탑인 김영덕 전 빙그레 이글스 감독이다.

김 전 감독은 자신이 팀을 맡고 있을 때 애정을 갖고 이끌었던 한용덕 한화 감독에게 남은 시즌 선전을 당부하고 격려했다고 한다. 김 전 감독은 가끔씩 야구장을 찾아 옛 제자들에게 좋은 말을 한마디씩 한다고 한다. KT위즈파크가 있는 수원은 김 전 감독이 아내와 노후를 보내고 있는 분당에서 그리 멀지 않다.

김 전 감독으로서는 OB 베어스 삼성 라이온즈 빙그레 이글스 3개 구단 감독을 지내면서 재임 기간이 가장 길었던 까닭도 있고 천안 북일고 제자도 여럿 있어 한화 구단에 쏟는 애정이 각별한 듯하다.

글쓴이는 김 전 감독이 삼성 지휘봉을 잡고 있던 1985년 시즌 후기 리그 때 “정말로 한국시리즈를 없앨 생각이냐”며 공격적으로 질문했던 일이 여전히 가슴 한쪽에 남아 있다.

그런 김 전 감독과 3년 전에 만난 적이 있다. 감독 재계약 건과 페넌트레이스 운용 방침, 말썽꾸러기 선수 문제 등과 같은 머리 아픈 질문과 답변을 할 일이 없었다.

“신 형, 여전하시네. 아, 그때는 장발이었나?”

여전히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김 전 감독은 옛 얘기를 풀어 놓았다.

“교토에 있는 부모님에게 1, 2년만 (한국에서 야구를) 하고 돌아오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떠난 게 반세기가 훌쩍 지나 버렸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노(老) 감독의 얼굴에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인연을 맺은 70여년의 야구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사이 그의 이름은 가네히코 나가노리[金彦永德]에서 김영덕으로 바뀌었다. 가네히코는 본관인 언양(彦陽)에서 따온 성이고 그의 부모는 경상남도 합천이 고향이었다.

한국에 오기 전에 그가 듣고 배운 우리말은 경상도 사투리였다. 28살의 적지 않은 나이로 한국에 왔을 때 땅 설고 물 설은 환경은 둘째 치고 서울 말씨를 알아듣지 못한 것도 큰 어려움 가운데 하나였다.

1940년대 거의 모든 일본의 야구 소년들이 그랬듯이 김영덕도 초등학교 때까지는 동네 야구 정도를 하다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운동을 시작했다. 체격도 좋았고 형이 유도 선수로 명문 메이지대학에 입학할 정도였으니 집안 내력으로 운동 신경이 좋았던 김영덕은 나라현에 있는 즈시가이세이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6년 난카이 호크스(소프트뱅크 호크스 전신)에 입단했다. 어려운 집안 사정 때문에 고졸 신인의 길을 택했다. 그 무렵 일본에서도 큰아들은 어떻게 해서든 대학에 보냈다.

3년의 2군 생활 끝에 1959년 1군에 올라간 김영덕은 그해 6승6패 평균자책점 3.09의 수준급 성적을 올렸다. 이후 한국행을 결정하기 직전인 1963년까지 4시즌 동안 7승9패 평균자책점 3.57의 기록을 남겼다. 글쓴이에게 김영덕은 감독보다는 선수로 더 익숙하다. 까까머리 때,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본 키 큰 투수 김영덕의 기억이 워낙 강렬하기 때문이다.

1959년 재일 동포 학생 야구단의 일원으로 모국 방문 경기를 한 뒤 1960년 귀국해 성공적으로 한국 실업 야구(교통부→기업은행)에 적응한 김성근을 보고 김영덕은 큰 용기를 얻었다. 한국 진출을 결심할 무렵 도에이 플라이어즈에서 활약하고 있던 백인천이 대한해운공사를 소개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지인이 제일은행도 소개했다.

이런저런 사연 끝에 대한해운공사에 입단한 김영덕은 말 그대로 펄펄 날았다. 장년층 팬들은 스리쿼터 투구 폼에서 뿜어져 나오는 날카로운 슬라이더로 타자들을 손쉽게 처리하는 김영덕을 기억할 것이다.

1964년 시즌, 실업 야구는 13개 팀이나 됐다. 전해까지 있었던 춘·추계 리그를 없애고 1~4차 리그로 시즌을 운용해 팀당 48경기, 전체 312경기였으니 1982년 팀당 80경기, 전체 240경기를 치른 프로 야구 원년 시즌보다 전체 경기 수가 많았다. 서울운동장과 육군 야구장(용산), 상업은행 야구장(수유리), 인천 야구장, 대구 야구장 등 전국 5군데 구장에서 5월 11일 개막해 10월 18일까지 107일 동안 열렸으니 사실상 프로 리그였다.

김영덕은 그해 33경기에 등판해 255이닝을 던져 9자책점만으로 0.32의 믿을 수 없는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이 부문 타이틀을 차지했다. 그렇게 잘 던졌는데도 그해 다승왕은 김영덕이 아니었다. 24승5패의 신용균이 1위에 올랐고 20승4패의 백수웅, 20승5패의 김성근에 이어 김영덕은 18승5패로 다승 4위였다. 백수웅을 빼고 모두 재일 동포였다. 재일 동포지만 사실상 외국인 선수들이 국내 리그 마운드를 장악한 것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기록이 있다. 재일 동포인 배수찬이 타율 3할3푼6리로 이 부문 1위를 차지한 가운데 김영덕은 3할로 6위에 올랐고 진원주가 6개로 1위를 차지한 홈런 부문에서는 4개로 재일 동포인 김금현과 공동 2위를 기록했다. 1950~60년대 홈런왕 박현식은 3개로 4위였다. 출루율은 4할7푼6리로 3위에 랭크됐다.

그해 한국 야구사에 길이 남을 두 차례 퍼펙트게임이 펼쳐지는데 9월 23일 고순선이 철도청과 경기에서, 9월 25일 김영덕이 조흥은행과 경기에서 각각 대기록을 세웠다.

김영덕은 이후 크라운맥주~한일은행에서 1969년까지 화려한 선수 생활을 이어 갔다. 1967년 시즌에는 팀이 치른 32경기 가운데 25경기에 등판해 17승1패, 승률 9할9푼4리의 놀라운 기록을 수립했다. 그해 54이닝 연속 무실점에 10연승 기록도 세웠고 평균자책점은 0.49였다. 1968년 10월 3일 육군과 경기에서는 노히트노런을 기록했다.

1970년 시즌 2차 리그가 끝나고 강대중 감독의 뒤를 이어 한일은행 사령탑에 오른 김영덕은 곧바로 그해 우승 감독이 됐다. 1971년 제9회 서울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는 1차 리그에서 5개국 가운데 4위로 밀린 한국을 2차 리그부터 감독 대행을 맡아 역전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때 받은 체육 훈장 청룡장은 인생 최고의 영광으로 간직하고 있다.

1971년 김응룡에게 감독 자리를 넘겨주고 은행 창구 업무를 보게 된 김영덕은 어려운 한글 받침 때문에 고국에 온 이후 두 번째로 마음고생을 하게 된다. 1977년 장충고등학교 감독으로 야구계로 돌아온 김영덕은 이후 천안 북일고등학교 감독을 거쳐 1982년 프로 야구 OB 베어스 초대 사령탑을 맡아 한국시리즈 1호 우승 감독의 영예를 누렸다.

그리고 삼성 라이온즈 감독(1984년~1986년)과 빙그레 이글스 감독(1988년~1993년)을 지낸 뒤 LG 트윈스 2군 감독(1997년~1998년)을 끝으로 현역에서 물러났다. 그의 나이 환갑을 조금 넘어서였다.

눈비가 섞여 내리던 그날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어느 음식점에서 만난 노 감독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얼마 전 건강 검진을 하면서 재 보았더니 키가 3cm가 줄었다”는 농담을 건네면서. 건강이 조금 좋지 않았지만 매일 50분 정도 걷기를 하면서 많이 회복했다고 했다. 2014년 연말에는 일구회 주최 행사 등에 참석했다고.

고국이긴 하지만 아무런 연고가 없는 이 땅에서 반세기를 넘게 살아오는 동안 그의 곁에는 해운공사 시절 팀 동료 성기영 전 롯데 자이언츠 감독 소개로 백년가약을 맺은 아내 김해영이 늘 함께했고 이제는 성규 성연 성란 1남 2녀가 낳은 친손자 2명과 외손자 2명이 그의 곁을 든든히 지키고 있다.

그리고 며칠 뒤 노 감독의 조촐한 팔순 잔치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성기영 김인식 한영관 신현석 유승안 신경식 김정수 이정훈 이상군 송진우 김경호 등 이름을 대면 알 만한 야구인들이 참석해 노 감독의 건강을 기원했다. 바쁜 일정이 있었던 박철순은 아들을 대신 보냈고 강정길 강석천 등은 잔치 비용을 보탰다고 한다.

이후 3년의 시간이 또 흘렀고 노 감독은 여전히 야구를, 제자를 사랑하고 있다.
저작권자 © SPOTV NEW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