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수주에 두루 뛰어났던 김재박을 상징하는 이 사진, 1982년 서울과 인천에서 열린 제27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일본과 사실상 결승전에서 김재박이 ‘개구리 번트’를 성공하고 있다. 이 사진은 대한체육회 90년사에도 실려 있다.

한국 야구 유격수 계보의 중심 인물 김재박, 그의 선수 시절은 어땠을까(1)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2018년 KBO 리그 포스트 시즌이 한창인 요즘 야구 팬들에게 관심 있는 포지션 가운데 하나가 유격수인 듯하다. 이종범 전 한화 이글스 코치가 4년여 만에 그라운드로 돌아오면서 LG 트윈스 유니폼을 입게 돼 류중일 감독과 함께 한국 야구 유격수 계보를 잇는 두 지도자가 한 팀에서 활동하게 됐기 때문이다. 2019년 시즌 LG 수비진, 특히 내야진 전력이 어느 정도 향상될 것인가에 대한 기대감도 섞여 있을 듯하다.

내야 수비의 축인 유격수는 야구 팬들의 눈과 귀가 집중되는 포지션이다. 유명 선수들이 거쳐간 포지션이기도 하다.

한국 야구의 활동 무대가 아시아에 한정돼 있을 때 대표적인 유격수로는 강대중(1954년 제1회-1955년 제2회 마닐라 아시아선수권대회) 김희련(1959년 제3회 도쿄 대회) 박정일(재일 동포, 1962년 제4회 타이베이 대회 1963년 제5회 서울 대회, 한국 첫 우승 주역 가운데 한 명) 이재우(국내 야구 첫 3연타석 홈런 기록 보유자, 1965년 제6회 마닐라 대회) 등을 꼽을 수 있다.

1971년 제9회 서울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김동률 하일 등을 비롯한 유격수들은 신세대 팬들에게는 낯설 듯하다.

한국 야구가 처음으로 세계 정상에 선 1977년 슈퍼월드컵 대회에 나선 김재박부터 시작해 1983년 서울 아시아선수권대회 류중일에 이어 1989년 서울 아시아선수권대회 이종범에 이르기까지는 나이와 관계없이 이 시대를 사는 야구 애호가들 모두에게 매우 익숙한 이름이다.

1989년 건국대 1학년이던 이종범을 비롯해 고려대 박동희(작고) 연세대 조규제 한양대 정민태 구대성(이상 투수) 한양대 김동수(포수) 영남대 양준혁 경성대 공필성 연세대 안경현(이상 내야수) 등은 그해 처음 태극 마크를 달았고 이후 프로 무대에서 맹활약하게 된다.

대략적으로 살펴본 2000년대 이전 국내 야구 유격수 계보인데 그 중심에는 아마추어와 프로에 걸쳐 큰 발자취를 남긴 김재박이 있다. 선수 시절, 특히 아마추어 때 김재박은 어떤 선수였을까.

1971년 8월 서울운동장(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제1회 봉황대기전국고교야구대회에는 전국 대회 사상 가장 많은 37개 팀이 참가했다. 지역 예선을 치르지 않고 모든 팀에 출전 기회를 줬기 때문이다.

청량공고와 철도고 등 올드팬들 기억에나 남아 있는 팀들이 이 대회에 출전한 가운데 8강 대진은 대전고-경북고, 선린상고-중앙고, 대구상고-영남고 등 전통의 강호들로 짜였다. 그런데 낯선 팀이 8강 대진에 끼어 있었다. 부산고와 맞붙을 대광고였다.

대광고는 이 대회 1년 전에 창단했으니 그럴 만했다. 그리고 1981년 시즌을 끝으로 야구부를 해체한 대광고는 이 대회 준우승이 역대 최고 성적이다. 초대 감독 선우종과 프로 야구 초창기 심판 위원으로 활약한 백대삼, 실업 야구 한전 출신의 최정상 등 여러 지도자가 지휘봉을 잡았지만 1974년 청룡기대회 4강이 봉황기대회 준우승 외에 내세울 만한 성적이다.

신생 팀 돌풍을 일으킨 대광고는 봉황기대회 준결승에서 중앙고를 3-0으로 꺾고 경북고와 결승에서 맞붙었다. 그러나 신생 팀의 돌풍은 거기까지였다. 대광고는 느린 커브를 잘 던진 기둥 투수 이동한이 역투하고 안타 수에서 6-5로 팽팽했으나 남우식이 완투하고 천보성과 정현발 등이 활약한 경북고에 0-1로 졌다. 경북고는 그해 6관왕이었다.

이듬해인 1972년 대광고는 부산에서 열린 제24회 전국고교야구대회 결승에서 경북고에 또다시 0-1로 져 준우승했다. 이 대회 결승에서는 황규봉이 승리투수가 됐으니 그 무렵 경북고의 전력을 알 만하다.

11년 야구부 역사에 두 차례 준우승이 전부지만 대광고는 야구 올드팬들에게 여전히 기억되고 있다. '그라운드'의 여우 김재박 때문이다. 그런데 1971년, 72년에는 야구 팬들 눈길이 온통 이동한에게 쏠렸다. 두 대회 결승전에서 경북고 강타선을 맞아 워낙 좋은 투구 내용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동한 대신 김재박을 주목하게 되는 건 그가 영남대에 진학 이후 일이다.

봉황대기 결승전에서도 뒷날 한국 야구 사상 최고의 유격수 가운데 하나로 꼽히게 될 김재박이 뛰었다. 그 경기에서는 1980년대 이후 상무 전성시대를 이끌게 되는 김정택도 대광고 유니폼을 입고 외야수로 그라운드를 누볐다.

이 둘을 눈여겨본 야구 팬은 많지 않았다. 김재박 외에 야구 팬들이 알 만한 대광고 출신 선수는 유지훤과 김용달, 윤덕규 정도다.

봉황기대회 결승전 결승점의 빌미를 유격수 김재박이 제공했던 사실을 기억하는 야구 팬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대구에서 중학교를 다닌 김재박은 일정 수준의 내야수이긴 했지만 체격이 작아서 고향 팀인 경북고에 진학하지 못하고 서울에 있는 대광고에 입학하게 된다.

대광고를 졸업한 김재박은 또다시 신생 팀을 가게 된다. 대구에 있는 영남대는 1973년 3월 배성서를 초대 감독으로 야구부를 만들었다. 배 감독은 당시 대구은행 대리로 일하면서 영남대를 이끌었다. 그해 가을 전국체육대회부터 출전한 영남대의 창단 멤버는 대건고 출신의 오문현 정도를 빼곤 모두 무명이었다. 물론 김재박도 그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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