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지난23일 MBC의 2020 도쿄올림픽 개회식 중계화면 캡처
[스포티비뉴스=김현록 기자]요즘 손꼽아 본방사수하는 드라마가 MBC 수목극 '미치지 않고서야'입니다. 그러던 며칠 전 MBC를 시청하다말고 "미치지 않고서야"를 외칠 일이 생겼습니다. 그것도 몇 번이나요. 우여곡절 끝에 지난 23일 개막한 2020 도쿄 하계 올림픽. MBC의 개회식 중계는 보던 이들의 눈을 의심케 했습니다.

MBC는 각 나라 선수단이 입장할 때 화면 왼쪽에 국기와 함께 대표 이미지를 띄웠습니다. 베네수엘라 선수단이 나오는데 비트코인이 나온 건 애교죠. 세상에, 우크라이나 선수들이 손을 흔들며 입장하는데 역사상 최악의 사고 중 하나인 체르노빌 원전참사 사진이 등장했습니다. 아이티엔 "대통령 암살로 정국은 안갯속"이라는 설명과 함께 화염 배경의 시위 사진이 들어갔습니다. 아프가니스탄 선수단이 등장할 때 당나귀가 운반하고 있던 건 마약 재료인 양귀비였다네요.

당장 여론이 들끓었습니다. MBC는 방송 말미 "부적절한 사진과 자막이 사용됐다. 해당 국가와 시청자 여러분께 사과드립니다"라고 사과했지만 비난을 잠재울 수는 없었습니다. 충격받은 네티즌이 SNS으로 캡처 사진을 퍼날랐고, 해외로도 퍼졌습니다. 가디언은 "모욕적인"이미지를 사용했다고 평가하면서 "무의미하고 이상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요. 정통한 관계자는 지난 1월 MBC 조직개편을 이유 중 하나로 꼽았습니다. 당시 MBC는 비용 절감 등을 이유로 스포츠국 PD 22명을 무려 10명으로 줄였습니다. 올림픽을 맞아 자회사 MBC스포츠플러스 소속 PD 2명이 파견왔을 뿐입니다. 대형 스포츠 이벤트를 눈앞에 두고 반토막난 부서에 일손이 얼마나 달렸을 지는 불보듯 뻔한 일입니다.

MBC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회식에서도 차드에 "아프리카의 죽은 심장", 키리바시에 "지구온난화로 섬이 가라앉고 있음", 가나에 "예수가 최초로 기적을 행한 곳" 등의 문구를 썼다가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주의' 조치를 받은 이력이 있습니다. 제재받은 사실을 미처 기억하지 못하고 일손이 바빠 13년전 매뉴얼을 다시 꺼내 반복했던 걸까요.

네티즌의 기준에도 미치지 못한 지상파 방송국의 데스킹 감수성은 또한 심각한 문제입니다. 매체 환경의 변화와 함께 유튜브와도 경쟁하는 방송국이 아슬아슬 선을 타다 가끔 본분을 망각했나 싶을 때가 있는데, 품격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MBC의 이번 개회식이 딱 그랬습니다. 노르웨이엔 연어, 아일랜드엔 흑맥주, 영국엔 엘리자베스 여왕에다, 루마니아엔 드라큐라라니요. 스피드 퀴즈 하나 싶은 일차원적 연상작용, 유머와 조롱이 절묘하게 녹아있는 한줄평은 익명성에 숨어 낄낄대곤 하는 커뮤니티의 댓글창을 연상시켰습니다.

하지만 이건 엄연한 준공영 방송사의 생방송이고, 스포츠정신과 희망과 다양성을 이야기하는 올림픽의 시작이었습니다. 올림픽이란 대형 스포츠 행사야말로 전통의 지상파가 규모와 저력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인걸요. 실망과 망신을 MBC가 스스로 자초했다 할 수 밖에요.

MBC는 거듭 사과했습니다. 개회식 다음날엔 장문의 사과문을 다시 내고 "선수단을 짧은 시간에 쉽게 소개하려는 의도로 준비했지만, 당사국에 대한 배려와 고민이 크게 부족했고, 검수 과정도 부실했습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잘못입니다. 다시 한 번 고개 숙여 죄송하다는 말씀드립니다"라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또 "MBC는 올림픽 중계에서 발생한 이번 사안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영상 자료 선별과 자막 정리 및 검수 과정 전반에 대해 철저히 조사한 뒤 그 결과에 따라 엄정한 후속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나아가 스포츠 프로그램 제작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재점검해 유사한 사고가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정말 유사한 사고가 발생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25일 한국 대 루마니아의 축구 조별리그 B조 2차전 축구 생중계. 루마니아의 마리우스 마린 선수가 자책골을 기록한 뒤 MBC 중계화면 상단에는 "고마워요 마린"이란 자막이 떴습니다. 배려도 공감도 하나 느낄 수 없는 그 한 줄에서 다시 불안해진 것이 비단 저 한 사람뿐일까요.

▲ 제공|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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