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은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됐다. 그리스인들이 제우스 신에게 바치는 경기였던 올림픽은 종교·예술·군사훈련 등이 삼위일체를 이룬 헬레니즘 문화의 하나였다. 근대 올림픽은 프랑스의 피에르 쿠베르텡 남작의 노력으로 시작됐다. 1896년 올림픽 발상지인 그리스 아테네에서 제 1회 대회가 열렸고 어느덧 제 31회 대회인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을 눈앞에 두고 있다. 전 세계 스포츠 축제인 올림픽은 수많은 일이 일어났고 대회를 빛낸 스포츠 영웅들이 탄생했다. 올림픽 역사에 선명히 기억될 사건과 인물은 다큐멘터리와 영화, 음악, 공연으로 다시 탄생했다. 스포티비뉴스는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을 앞두고 영화화된 올림픽 일화와 인물을 조명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영화로 보는 올림픽 정신① - 누구를 위하여 '불의 전차'는 달리나(영화 불의 전차)

영화로 보는 올림픽 정신② - 아직도 끝나지 않은 뮌헨의 비극(영화 뮌헨)

영화로 보는 올림픽 정신③ - '원조 체조 요정' 코마네치를 기억하세요?(영화 나디아)

영화로 보는 올림픽 정신④ - '우생순' 스토리는 왜 결말이 없을까(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 영화 '불의 전차'의 실제 주인공 에릭 리델 ⓒ GettyImages

[스포티비뉴스=조영준 기자] 한 노인의 엄숙한 장례식 장면이 지나가고, 반젤리스의 전율적인 배경음악이 흐르며 해변을 달리는 이들이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앞을 향해 질주하는 인물들의 표정은 모두 다르고 이들이 추구하는 신념도 다르다.

이 장면은 영화 사상 가장 유명한 오프닝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1981년 개봉된 이 영화는 1924년 파리 올림픽을 배경으로 한다. 파리 올림픽 육상 100m에 출전한 실존 인물 헤럴드 에이브라함(1899~1978년)과 에릭 리델(이상 영국, 1902~1945년)의 생애를 그린 이 작품은 초기 올림픽에서 나타난 '스포츠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주인공 헤럴드 에이브라함은 명문 캠브리지대학에 입학한다. 출세가 보장되는 대학에 진학한 그는 남부러울 게 없는 듯 보인다. 그러나 에이브라함은 멸시와 차별을 받으며 성장했다. 대학에 입학한 뒤에도 이러한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유대인인 그를 순수한 명문대 학생으로 보는 이는 드물었다. 에이브라함은 이런 차별과 멸시를 떨치기 위해 운동을 선택한다. 파리 올림픽에서 우승해 유대인 차별의 부당성을 알리는 것이 그의 신념이자 목표다.

스코틀랜드 출신 리델은 피나는 훈련으로 영국 육상 대표 선수로 선발된다. 그의 직업은 선교사다. 에이브라함이 육상을 선택한 목적은 유대인 차별을 극복하려는 신념 때문이다. 리델은 종교적 신념 때문에 트랙 위에서 뛴다. 리델과 에이브라함은 나란히 파리 올림픽에 출전하고 남자 100m에서 맞붙는다. 그러나 리델은 이 경기가 일요일에 열리기 때문에 출전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한다.

▲ 영화 불의 전차 포스터 ⓒ 프레인글로벌 제공

1924년 파리 올림픽 단거리 명승부는 왜 불발됐나

에이브라함은 1920년대 영국 육상을 대표하는 선수였고 이단아이기도 했다. 아마추어였던 그는 프로 코치인 샘 무사비니를 고용했다. 유대인 에이브라함과 아랍계 이탈리아인 코치 무사비니를 보는 당시 시선은 따가웠다. 에이브라함은 당시 영국을 지배하고 있던 관습에 도전하며 올림픽 금메달을 따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에이브라함은 100m와 200m는 물론 멀리뛰기와 400m 계주에도 출전했다. 무사비니의 지도로 한층 성장한 에이브라함은 1924년 파리 올림픽을 앞두고 당시 멀리뛰기 최고 기록인 7.38m를 뛰었다. 이 기록은 그 뒤 32년 동안 깨지지 않았다.

에이브라함은 잉글랜드에서 마땅한 적수가 없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의 바람'으로 불린 리델이 나타나면서 이들은 경쟁 구도를 이룬다. 리델은 어려서부터 운동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달리기를 유독 잘했던 그는 럭비와 크리켓 팀에서 주장을 맡았다.

영국육상선수권대회 100m에서 우승한 리델은 1924년 파리 올림픽에 출전한다. 동료이자 라이벌인 에이브라함과 100m 종목에서 경쟁할 예정이었지만 안식일에는 경기할 수 없다는 종교적 신념을 내세워 불참한다. 100m에서 이루지 못한 금메달 꿈을 400m에서 달성한 그는 200m에서는 동메달을 땄다. 에이브라함은 리델이 나서지 않은 100m에서 우승했다.

파리 올림픽이 끝난 뒤 선교사로 활동한 리델은 1928년에서 1930년 사이에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중국에서 주로 선교 활동을 했던 리델은 제 2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에 붙잡혀 수용소에서 생활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몇 달을 남겨 둔 1945년 4월 21일 리델은 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에이브라함은 영국 스포츠를 대표하는 인물로 오랫동안 활동하다 1978년 별세했다.

▲ 1924년 파리 올림픽 포스터 ⓒ IOC

순수한 정신이 살아 있었던 초창기 올림픽과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올림픽은 철저한 아마추어리즘에서 시작됐다. 에이버리 브런디지(미국, 1887~1975년)는 순수한 아마추어 정신의 옹호자였다. 브런디지는1936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이 됐고 1952년 제 5대 IOC 위원장에 취임했다. 그는 스포츠 상업주의와 대립했고 올림픽은 아마추어리즘의 대표적인 무대라고 강조했다.

에이브라함은 유대인에 대한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뛰었다. 그는 자신의 삶을 묶은 올가미를 풀기 위해 육상을 선택했다. 당시 체육계의 민족, 인종차별은 대단했다. 에이브라함은 자신이 영국인이라고 주장했지만 주변의 시선은 그렇지 않았다.

리델을 뛰게 만든 원천은 종교적 신념이었다. 피나게 훈련하는 이유는 부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올림픽이 끝난 뒤 리델은 편안한 삶을 뒤로하고 머나먼 아시아에서 선교 활동을 하다 43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92년이라는 기나긴 시간이 흐른 현재, 올림픽과 스포츠는 자본주의와 밀접한 관계가 됐다. IOC는 프로 선수의 출전을 종용하고 있고 광고 계약 체결에 힘을 쏟고 있다.

시대 변화가 변하면서 이런 현상은 자연스럽게 여겨진다. 오늘날 스포츠와 상업주의는 서로 분립해서 볼 수 없다. 스포츠 정신이나 개인의 신념을 첫 번째로 꼽는 선수들이 여전히 있기는 하다.

그러나 대부분 선수의 움직임과 스포츠계의 흐름은 돈으로 결정되고 있다. 92년 전, 순수한 자기 신념에 따라 달렸던 에이브라함과 리델이 이끄는 '불의 전차'는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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