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8년 시작한 한일고교교환경기대회는 육상경기를 비롯해 두 나라 청소년 선수들의 경기력을 높이는 데 이바지했다. ⓒ대한체육회

 

[스포티비뉴스=신명철 편집국장] 1966년 방콕 아시아경기대회에서 육상경기는 여전히 부진했다. 출전 14개 종목 가운데 가장 많은 40명의 선수가 출전했으나 필드와 트랙 전 종목에서 은메달 1개와 동메달 3개를 따는 데 그쳤다. 마라톤에서는 이상훈이 동메달을 땄지만 2시간4056초로 기록은 좋지 않았다. 방콕의 무더운 날씨 탓이기도 했다. 우승자인 기미하라 겐지도 2시간3323초로 레이스를 마쳤다.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는 마라톤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을 했지만 투척 종목에서는 아시아의 마녀탄생을 예고하는 성적이 나왔다. <10편에서 계속>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마라톤에서는 우승 기록이 2시간 20분대일 정도로 전반적으로 기록이 저조한 가운데 이명정이 2시간3852초로 29위를 한 게 가장 좋은 성적이었다. 에티오피아는 마모 월데가 2시간2026초로 골인해 1960년 로마 대회와 1964년 도쿄 대회에 이어 한 나라가 올림픽 마라톤에서 처음으로 3연속 우승하는 기록을 세웠다. 이 기록은 2016년 현재 에티오피아가 유일하다. 2연속 우승 기록은 미국(1904년 세인트루이스 대회 토마스 힉스-1908년 런던 대회 조니 헤이스)과 옛 동독(1976년 몬트리올 대회-1980년 모스크바 대회 발데마르 치에르핀스키)이 갖고 있다.

여자 투포환의 백옥자는 12m67로 메달권 선수들과 6m 정도의 차이를 보였지만 유일한 아시아 선수였고 1966년 방콕 아시아경기대회 우승 기록인 14m48(스기야마 료코, 일본)에 근접해 아시안게임 사상 첫 투척 종목 금메달 가능성을 보였다.

50번째가 되는 전국체육대회가 19691028일부터 112일까지 26개 종목에 걸쳐 15천여 명의 선수단이 참가한 가운데 서울에서 열렸다. 이 대회는 경기력에서도 비교적 수준이 높았다.

육상경기에서 한국 신기록 5개와 한국 타이 기록 1개 그리고 역도에서 세계 주니어 신기록 1, 한국 신기록 8, 한국 타이 기록 1개나 나왔다. 육상에서 나온 기록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끈 것은 마라톤에서 박봉근(경남)이 기록한 2시간1818초의 한국 최고 기록이었다. 한국 마라톤은 19663월 제37회 동아마라톤대회에서 김복래가 2시간197초를 기록한 뒤 3년 넘게 19분 벽을 깨지 못하고 거북이걸음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박봉근의 기록은 주목을 받았고 기록 경신보다는 순위 싸움을 하는 전국체육대회에서 한국 최고 기록이 나와 육상 관계자들을 설레게 했다.

2위를 한 김차환(경북)은 이듬해인 19703월 제41회 동아마라톤대회에서 2시간 1734초로 박봉근의 기록을 깬 데 이어 19733월 제44회 동아마라톤 대회에서는 2시간 1701초로 다시 한번 한국 최고 기록을 경신한다.

전국체육대회에서 마라톤 한국 최고 기록이 깨진 건 해방 이후 2019년 현재 이 대회와 1962년 제43회 대회에서 김연범(전남)2시간 2356초로 우승했을 때 두 번 뿐이다.

서울이 유치했다가 반납한 1970년 제 6회 아시아경기대회가 전 대회에 이어 방콕에서 열렸다. 이 대회 육상경기에서 한국은 의미 있는 성적표를 받았다. 한일고교교환경기대회 등에서 실력을 발휘했던 백옥자가 여자 포환던지기(14m57 대회 신기록)와 원반던지기(44m02)에서 금메달과 동메달을 각각 목에 걸었다. 한국은 백옥자의 분전에 힘입어 아시아경기대회 출전 사상 처음으로 육상 투척 분문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남자 창던지기에서는 박수권이 은메달을 차지했다. 전해인 1969년 제 50회 전국체육대회 마라톤 우승자 박봉근은 1m, 강명광은 마라톤, 홍상표는 장대높이뛰기, 이복순은 여자 창던지기에서 각각 동메달을 보탰다.

강명광의 기록은 2시간26478로 그리 좋지 않았지만 마라톤 침체기에도 1958년 도쿄 대회의 이창훈 금메달, 1966년 제 5회 방콕 대회의 이상훈 동메달로 이어지는 메달의 맥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데 의의가 있었다. 한국 마라톤은 세계 무대에서는 1990년대 초반까지 이렇다 할 성적을 올리지 못하지만 아시아경기대회에서는 1982년 뉴델리 대회에서 김양곤이 우승하는 등 명맥을 유지했다. 그런 노력을 바탕으로 1990년 베이징 대회 김원탁, 1994년 히로시마 대회 황영조, 1998년 제 13회 방콕 대회와 2002년 부산 대회 이봉주의 대회 4연속 우승을 이루게 된다. <12편에 계속>

◆한일고교교환경기대회는?

1968813일부터 15일까지 서울에서 제1회 한일고교교환경기대회가 열렸다.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경기이고 양국 청소년 선수들이 벌인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대회였지만 한국 스포츠 발전에 이바지한 바가 큰 대회다. 한국은 이 대회를 치르며 육상경기 같은 낙후 종목의 장기적인 발전을 도모했다. 국제 대회 출전 기회가 그리 많지 않던 시절 청소년 선수들이 국제 무대 경험을 쌓는 소중한 기회가 됐다.

첫 대회에서는 육상과 축구, 농구, 배구, 연식정구, 배드민턴 등 6개 종목이 열렸고 이후 핸드볼과 탁구, 체조, 테니스 등이 추가됐으며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대회가 열렸다. 개인 종목은 두 나라 선발 선수들이 나섰고 단체 종목은 단일 팀 위주로 경기를 치렀다. 서울에서 열린 첫 대회 육상경기 13개 세부 종목에서는 여자 원반던지기의 백옥자가 14m021위를 한 것으로 빼고는 모두 일본 선수들이 1위를 차지했다. 두 나라의 육상경기 수준을 한눈에 알 수 있는 결과였다. 남자 농구의 경우 원정 팀인 일본은 마쓰에공고가 출전해 한국의 경복고, 양정고와 겨뤄 77-85, 55-59로 졌다. 이듬해인 19698월 도쿄에서 벌어진 제2회 대회 축구에서는 원정 팀인 한국의 중동고가 일본의 우라와시립미나미고에는 1-3으로 졌으나 주오다이가쿠부속고에는 4-0으로 이겼다.

1969년 제2회 대회 육상경기는 세부 종목이 남자 10개 종목, 여자 8개 종목으로 늘어났다. 한국은 남자 창던지기의 이성우, 여자 400m800m의 정순화, 여자 원반던지기와 포환던지기의 백옥자가 1위를 차지해 제1회 대회보다 발전된 기량을 보였다. 이 대회는 명칭이 1981년 한일주니어종합경기대회로 바뀌었고 1993년 중국이 합류하면서 한중일주니어종합경기대회로 확대 발전하게 된다.

이 대회는 19667월 대한체육회와 일본체육협회 사이에 두 나라 청소년 스포츠 발전을 위한 대회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이뤄져 첫 대회를 일본 아오모리에서 열기로 했으나 그 무렵 한일간 외교 마찰이 일어나 1968년 제 1회 대회를 한국에서 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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