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0년대 한국의 방수현과 경쟁한 인도네시아의 ‘배드민턴 여왕’ 수지 수산티.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문재인 정부의 주요 경제 정책 가운데 하나인 ‘신남방정책’이 가시화되면서 필리핀 인도네시아 베트남 태국 등 동남아시아 나라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스포츠 분야에서도 이 지역 나라들과 한국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고 있다. <편집자 주>

한국과 인도네시아가 스포츠 분야에서 큰 규모로 교류한 첫 번째 사례는 1962년 제4회 아시아경기대회다. 이 대회 관련 소개는 잠시 뒤로 미루고, 이보다 앞서 두 나라가 각각 일본과 네덜란드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을 때 열린 1938년 제3회 FIFA(국제축구연맹) 월드컵 관련 일화를 소개한다.

축구에 조금만 관심 있는 이라면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일본 축구 대표 팀으로 김용식 선생이 출전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이 1938년 제3회 프랑스 월드컵 지역 예선에 대비해 1936년 11월 소집한 국가 대표 팀 명단에 김용식, 이유형, 배종호, 박규정 등 4명의 한국인 선수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는 많지 않을 것 같다. 1930년대 중반부터 1940년대 초반까지 연인원 40여 명의 한국인 선수가 각종 국제 대회에 대비한 일본 축구 대표 팀 훈련에 소집됐다. 한국 선수들의 실력이 뛰어났다는 방증이다.

그런데 1938년 프랑스 월드컵 지역 예선 12조에 속한 일본이 자기들이 일으킨 중일전쟁 문제 등으로 기권하지 않았으면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스포츠 교류는 이때 이뤄졌을 수도 있다. 12조에서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오늘날의 인도네시아)와 일본이 겨루게 돼 있었다. 가정이긴 하지만 일본이 이 대회 예선에 나섰다면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주전으로 활약한 김용식 선생이 출전했을 것이고 그라운드에서 인도네시아 선수들과 마주쳤을 것이다.

예선을 치르지 않고 월드컵 본선에 나선, 아시아 첫 번째 나라인 인도네시아는 1회전에서 대회 준우승국인 헝가리에 0-6으로 져 탈락했다.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축구 인연은 1960년대에 결국 이뤄진다. 1962년 5월 26일과 29일 자카르타에서 열린 두 차례 친선경기에서 한국은 인도네시아 선발 A 팀과 B 팀을 각각 2-1로 이겼다. 이어 그해 9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메르데카컵에서는 인도네시아에 0-3으로 완패했다. 앞에 친선경기는 자카르타 아시아경기대회 출전을 앞둔 국가 대표 1진, 메르데카컵에는 국가 대표 2진이 인도네시아와 겨뤘다.

신세대 축구 팬들에게는 2007년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태국, 베트남이 공동으로 개최한 2007년 아시안 컵(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 조별 리그 D조(자카르타)에서 김정우의 결승 골로 인도네시아를 1-0으로 누르고 1승1무1패로 어렵사리 1라운드를 통과한 일이 기억날 것이다. 한국은 이 대회에서 8강전 이후 일본과 치른 3위 결정전까지 계속 승부차기를 하는 특별한 기록을 남겼다.

내년 8월 제18회 아시아경기대회를 자카르타와 팔렘방 두 도시에서 여는 인도네시아는 반세기 전인 1962년 제4회 대회를 개최했다. 그런데 이 대회는 당시 국제 정치적인 문제로 조금 소란스러운 분위기에서 열렸다.

그 무렵 제3세계 리더로 자부하던 인도네시아는 정치적인 문제로 이스라엘과 자유중국(당시 한국에서 부르던 나라 이름. 오늘날의 대만)에 ID 카드 발급을 거부했다. 그때 인도네시아는 한국보다 북한과 가까웠고 비행기 공포증이 있는 김일성이 비행기를 타고 간 유일한 나라였다.

아무튼, 개최국이 특정 국가의 출전을 가로막자 국제육상경기연맹과 국제역도연맹은 각각 이 대회의 해당 종목에 출전하는 나라는 제명 또는 각종 국제 대회 출전을 금지한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한국 선수단은 신중한 검토 끝에 육상과 역도 종목에는 출전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1954년 제2회 마닐라 대회와 1958년 제3회 도쿄 대회에서 연속으로 종합 3위에 올랐던 한국이 종합 6위(금 4, 은 9, 동 10)로 밀려난 까닭이기도 하다. 출전 종목 성적만으로 계산하면 한국은 일본에 이어 종합 2위였다.

이 대회의 종합 1위는 금메달 73개를 쓸어 담은 일본이 차지했다. 이 대회에서 일본 외 나라들이 얻은 금메달은 40개였다. 중국이 아직 국제 스포츠 무대에 얼굴을 내밀지 않던 시절 일본은 아시아에서 절대 강자로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일본에 이어 인도가 금메달 10개와 은메달 13개, 동메달 10개로 종합 2위를 차지했고 그 뒤를 개최국인 인도네시아(금 9, 은 12, 동 17)와 필리핀(금 7, 은 4, 동 16)이 이었다.

이 대회 축구 종목은 이스라엘과 자유중국이 불참하면서 출전국이 8개로 줄었지만 정상적으로 경기가 진행된 가운데 한국은 결승전에서 인도에 1-2로 져 은메달을 획득했다. 한국은 조별 리그에서 인도를 2-0으로 꺾었기에 아쉬움이 컸다. 이때까지 한국은 아시아경기대회 구기 종목에서 금메달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1956년(홍콩)과 1960년(한국)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며 아시아 정상의 실력을 지니고 있던 한국 선수들의 실력과 페어플레이 정신에 축구를 무척 좋아하는 인도네시아 국민들은 열광적인 응원을 보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이 무렵 만해도 한국보다는 북한과 가까웠던 인도네시아와 축구로 어느 정도 우호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됐으니 적지 않은 스포츠 외교 성과였다.

그리고 1970년대에 열린 ‘박대통령배 쟁탈 아시아축구대회’에 인도네시아는 단골 초대 손님이 됐다. 축구로 인연을 맺은 한국과 인도네시아는 내년 여름, 아시안 게임에서 다시 한번 스포츠로 우의를 쌓게 된다.

1952년 헬싱키 대회에 처음으로 올림픽에 출전한 인도네시아는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대회까지 금메달 7개와 은메달 13개, 동메달 12개를 획득했는데 금메달 7개가 모두 배드민턴에서 나온 배드민턴 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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