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만수 전 SK 와이번스 감독은 프로 야구 1세대 포수로 큰 발자취를 남겼다. ⓒ한희재 기자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중·장년 팬들에게는 별명 ‘헐크’로, 신세대 팬들에게는 ‘팬티 세리머니’로 사랑 받은 이만수 전 SK 와이번스 감독의 일거수일투족은 여전히 야구 팬들 관심사다.   

아직 현역의 기운이 사라지지 않은 이 전 감독이기에 그가 말하는 '포수론’은 현장감이 있다. 그는 야구 팬들에게 포수라는 포지션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을 주고 있기도 하다. 

라오스에 야구를 전파하는 등 이 전 감독의 야구를 사랑하는 활동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그의 선수 시절이 어떠했는지, 아마추어 야구를 중심으로 몇 가지 이야기를 소개한다. 편의상 호칭은 생략한다. 

이만수가 숙소 방 안에서 뭔가 열심히 하고 있었다. 원정 팀 숙소를 찾아가 삼성 라이온즈 구단 관계자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글쓴이가 방문이 반쯤 열려 있는 이만수의 방 앞을 지나다 우연히 보게 된 장면이었다. 

이만수는 엎드린 채 공책에 빼곡히 성경을 옮겨 적고 있었다. 며칠 뒤 대구 홈구장에서 만난 이만수는 새로 구입한 배트의 포장지를 뜯더니 손잡이 끝부분에 십자가를 그려 넣었다. 

삼성이 전· 후기 리그 1위를 휩쓸어 한국시리즈를 아예 없애 버린 1985년 페넌트레이스가 한창이던 때 일이다. 한양대를 졸업하고 곧바로 프로 유니폼을 입은 이만수가 데뷔한 지 4번째 되는 시즌이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이만수는 선수 시절 생활 속에서 믿음을 실천했고 신앙을 바탕으로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하며 16시즌 동안 삼성, 한 팀에서만 활약했다. 

그리고 오랜 기다림 끝에 2011년 8월 18일 김성근 전 감독의 경질과 함께 SK 와이번스 감독 대행이 됐다. 40대 후반에 프로 감독이 된 또래나 후배들보다 늦은 나이에 대행이긴 하지만 사령탑에 오른 것이다. 

40대 이상의 야구 팬들은 모두가 1982년 프로 야구 원년 개막전이라고 하면 MBC 청룡 이종도의 연장 10회 말 끝내기 만루 홈런을 기억한다. 그리고 곧바로 "아, 이만수의 프로 1호 홈런도 있었지"라고 한다. 

그해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나온 OB 베어스 김유동의 만루 홈런과 함께 강렬한 인상을 남긴 이종도의 만루 홈런이 아니었다면 이만수의 프로 첫 홈런은 좀 더 또렷하게 야구 팬들 머릿속에 남게 됐을 것이다. 프로 1호 홈런을 치고 3루를 돌아 펄쩍펄쩍 뛰면서 홈으로 들어오는 장면과 함께. 

대구중학교에서 야구의 기초를 익힌 이만수가 전국의 야구 팬들에게 자심의 이름을 알린 건 1975년이었다. 

그해 한국 야구는 새로운 도약의 계기를 맞는다. 6월 서울에서 열린 제9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김호중 이선희 박상열(이상 투수) 우용득 박해종(이상 포수) 김봉연 김재박 배대웅 강병철(이상 내야수) 윤동균 김우열 이해창(이상 외야수) 등의 활약에 힘입어 1963년, 1971년 대회에 이어 세 번째 우승한 한국은 70년 야구 사상 처음으로 아시아를 벗어나 세계 무대를 두드리게 된다.

8월 몬트리올에서 열린 제2회 대륙간컵세계야구대회에 출전해 조별 리그 A조에서 일본과 캐나다에 이어 니카라과와 공동 3위를 기록해 4강 진출에 실패했지만 대회를 앞두고 야구 종목 사상 처음으로 태릉선수촌에 들어가 체계적인 훈련을 받았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9전 전승 금메달로 가는 첫걸음이었다.

바로 그해 뒷날 한국 프로 야구를 빛내게 되는 대구상고 1학년 이만수는 10월 대구에서 열린 제9회 국회의장배고교야구대회에서 타격상(10타수 5안타)을 받았다. 이 대회 결승에서 경남고는 최동원이 5안타 1실점으로 완투해 대구상고를 3-1로 꺾고 우승했다. 

그런데 이만수가 중학교 때 투수로 뛰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대구중은 3학년 투수 이만수를 앞세워 1974년 문교부장관기쟁탈전국중학야구대회에서 우승했다. 이만수는 대구상고에 진학한 뒤 포수로 정착했는데 투수 출신 포수다운 강한 어깨가 일찌감치 주목 받았다.

또래 야구 선수들이 초등학교 때 야구를 시작한 데 비해 이만수는 출발이 늦었다. 또 일반 학생을 대상으로 한 선수 모집을 거쳐 선수 생활을 시작했으니 남들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했다. 그때 이만수는 10년 후에는 최고의 선수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운동을 위해 중학교 1학년을 두 번 다녔다. 그래서 동갑인 김시진이 대구상고, 한양대 1년 선배가 됐다. 이만수는 각고의 노력으로 실력이 일취월장했지만 팔에 무리가 가서 대구상고에 진학한 뒤 포지션을 바꿨다. 이때 결정이 '포수' 이만수의 탄생을 가능하게 했다. 

1977년 6월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제32회 청룡기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는 강타자 이만수의 탄생을 알린 대회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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