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OB 베어스 시절 마스코트 ⓒ두산 베어스

[스포티비뉴스=이재국 기자] "김경원을 4회에 투입해 점수를 지키는 작전이 주효했습니다. 김경원은 신인이지만 담력과 배짱이 있기 때문에 과감하게 내보냈는데 기대대로 아주 잘 던졌어요. 그리고 4회 3루타로 선취점의 계기를 만든 이명수가 오늘의 수훈갑입니다."

1993년 가을. OB 베어스 윤동균 감독은 준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LG에 승리를 거둔 뒤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로 의기양양하게 소감을 밝혔다.

OB로서는 오랜만에 맛보는 가을야구 승리였다. 1987년 해태와 격돌한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최일언의 호투 속에 4-1로 승리한 뒤 6년 만에 포스트시즌 승리를 올렸다. 그것도 라이벌 LG를 상대로 1-0 짜릿한 1점차 셧아웃 승리를 거뒀으니 기쁨이 배가됐다.

두산 베어스가 4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2020 신한은행 SOL KBO 준플레이오프(준PO)' 1차전에서 선발투수 크리스 플렉센의 역투와 타선의 효율적인 득점생산으로 LG를 4-0으로 물리치고 기선을 제압했다. 베어스 역사상 가을잔치 무대에서 잠실 라이벌 LG를 상대로 팀 완봉승을 거둔 것은 1993년 가을 무대 이후 무려 27년 만이다.

▲ 2020년 준플레이오프 1차전 선발투수 크리스 플렉센은 6이닝 11탈삼진 무실점으로 LG 타선을 봉쇄하며 4-0 승리를 이끌었다. ⓒ잠실, 한희재 기자

◆27년 전 가을야구에서 처음 만난 잠실 라이벌

시계를 27년 전으로 돌려보자.

올해처럼 1993년 정규시즌에서도 OB는 3위, LG는 4위를 차지해 준PO 무대에서 만났다. 올해 양 팀은 게임차 없이 순위가 갈라졌는데 그해 역시 0.5게임차로 박빙의 순위싸움을 펼쳤다. OB가 서울에 입성한 1985년 이후 잠실야구장 덕아웃을 양분해 사용하면서 '잠실 라이벌'이 됐지만, 양 팀이 포스트시즌에서 격돌한 것은 이때가 사상 최초였다.

당시엔 와일드카드 결정전이 없어 곧바로 3전2선승제의 준플레이오프에 돌입했다.

1차전은 LG가 2-1로 승리해 먼저 웃었다. LG는 9월에 노히트노런을 거두며 기세를 올린 김태원을 선발로 내보내고, 소방수 김용수를 투입하면서 먼저 승리를 챙겼다. OB는 연습생 신화를 쓰며 마운드의 주축이 된 '베트맨' 김상진과 신인 마무리투수 김경원으로 이어던지며 맞불을 놓았지만 1점차로 무릎을 꿇었다.

10월 3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2차전. 물러설 곳이 없는 OB 윤동균 감독은 선발투수로 이광우를 깜짝 발탁했다. 전년도 해태에서 트레이드돼 온 이광우는 두산 투수진이 두꺼워 정규시즌에서는 주로 중간계투 요원으로 활약했지만, 유난히 LG전에 강한 면을 보였던 터였다. 그해 정규시즌에서 32경기에 등판했는데 선발등판은 8경기에 불과했다. 그러나 LG를 상대로만 3승1패1세이브를 기록하며 'LG 킬러'의 위용을 보여 윤동균 감독도 벼랑 끝에서 이광우 선발 카드를 꺼내들었다.

LG 이광환 감독은 정삼흠을 2차전 선발투수로 내세워 2연승을 노렸다. 정삼흠은 그해 15승11패, 평균자책점 2.99를 기록하며 해태 조계현(17승)에 이어 다승 2위에 올랐을 뿐 아니라 LG 팀 내 최다승 투수였다.

선발투수들의 팽팽한 투수전. 올해 1차전에서 2안타 2타점을 올린 오재원처럼 그날도 2루수가 타선의 주인공이 됐다. 바로 2루수 3번타자로 선발출장한 이명수. 1차전에서 실책으로 결승점을 내줘 자책을 하던 이명수는 2차전 4회초 선두타자로 나서 우중간을 가르는 통렬한 3루타를 날려 찬스를 만들었다. 이명수는 정규시즌 때 정삼흠에게 12타수 6안타로 매우 강했는데, 포스트시즌에서도 데이터는 틀리지 않다는 것을 입증했다.

이어 타석에 등장한 선수는 그해 최다안타왕(147안타)에 오른 4번타자 김형석. 결국 중전 적시타를 때리면서 이명수를 홈으로 불러들여 선취점을 뽑았다. 1-0 리드. 이때만 해도 이 점수가 끝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본 이는 거의 없었다(올해 최다안타왕 호세 미구엘 페르난데스가 1회 2점홈런으로 선취타점 및 결승타를 기록한 장면이 오버랩되는 순간이었다).

▲ OB 베어스 시절의 김형석 ⓒ두산 베어스

◆ 팀 완봉 합작한 선발 이광우-마무리 김경원 그리고 포수 김태형

LG로선 4회말 절호의 찬스를 놓친 것이 두고두고 아쉬웠다. 김상훈의 중전안타와 송구홍의 볼넷으로 만든 무사 1·2루. 4번타자 노찬엽이 타석에 들어서자 이광환 감독은 희생번트 대신 강공으로 밀고 나갔다. 그러나 가장 믿었던 ‘검객’ 노찬엽이 병살타를 치면서 찬스는 물거품이 됐다.

이때 OB 벤치가 움직였다. 윤동균 감독은 그해 신인으로 혜성처럼 등장한 마무리투수를 호출했다.

"투수교체 김경원!"

김경원은 마운드에 오르자마자 힘있는 강속구를 앞세워 이병훈을 삼진으로 돌려세운 뒤 9회까지 5.1이닝을 2안타 2삼진 무실점으로 틀어막아 승리투수가 됐다.

올해는 이영하가 위력적인 공으로 두산 마무리투수로 변신했지만, 1993년 신인 소방수 김경원의 구위는 무시무시했다. 동대문상고와 중앙대를 졸업한 김경원은 그해 48경기에 등판해 32세이브포인트(9구원승+23세이브)를 올리면서 평균자책점 1.11을 기록했다(당시엔 구원왕을 구원승과 세이브를 합친 세이브포인트로 시상하던 시절이다).

팀당 정규시즌 126경기를 소화한 그해 김경원은 129.1이닝을 던지면서 규정이닝을 채웠다. 1993년 평균자책점 1위는 선동열의 0.78(역대 최저 기록). 김경원은 선동열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사실 3차례나 0점대 평균자책점(1986년 0.99, 1987년 0.89, 1993년 0.78)을 기록한 선동열을 제외하면 김경원이 1993년 기록한 평균자책점 1.11은 지금까지 역대 1위일 정도로 놀라운 수치다.

OB는 8회말에 위기를 만났다. 선두타자 김경하의 타구를 유격수 김민호가 실책을 범하면서 무사 1루를 만들어 준 것. 여기서 평소 재치 있는 타격과 작전 수행능력을 보여온 박종호가 타석에 들어섰다. OB 박상열 투수코치가 마운드에 올라 김경원에게 뭔가를 지시했다. 김경원은 바깥쪽 승부를 선택했다. 이때 박종호가 희생번트를 댔다. 번트타구는 포수와 1루수 사이로 낮게 떴는데 1루수 김형석이 몸을 던져 텀블링을 하면서 공을 잡아냈다. 여기서 사실상 경기는 끝났다.

OB는 1-0 승리를 거두고 1승1패 균형을 맞췄다.

흥미로운 점은 그날 경기를 뛴 인물 중 현재 두산 1군 선수단 내에 있는 인물은 딱 한 명 있는데, 김태형 감독이라는 사실이다. 당시 2차전 8번 포수로 선발출장해 3타수 1안타를 기록하며 OB의 6안타 중 하나를 뽑아냈고, 이광우(3.2이닝 무실점)~김경원(5.1이닝 무실점)과 배터리를 이루며 LG 상대 포스트시즌 최초 완봉승을 리드했다. 묘하게도 그로부터 17년 후 이번엔 감독으로서 다시 LG를 상대로 셧아웃을 지휘하게 됐다.

▲ 두산 김태형 감독과 가을사나이 오재원. 1993년 준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OB의 1-0 팀 완봉승을 리드한 포수 김태형은 두산 감독이 됐다. 그리고 27년 후 준PO 1차전 4-0 승리를 지휘했다. 1993년 2루수 이명수처럼 2020년 2루수 오재원이 타선에서 힘을 냈다. ⓒ잠실, 곽혜미 기자

◆ 4차례 가을잔치 덕아웃시리즈…그리고 2020년

그러나 1993년 준플레이오프 최후의 승자는 LG였다. 훗날 영구결번이 되는 팀의 상징들인 김용수(41번)와 박철순(21번)의 선발 맞대결 속에 시작된 3차전 승자독식경기(winner-take-all). LG가 1-2로 뒤진 8회말 한꺼번에 4점을 뽑으며 5-2 역전승을 거둬 2승1패로 플레이오프 무대에 진출했다.

지금까지 준플레이오프에서 양 팀은 두 차례 격돌했다. 그 두 번을 모두 LG가 이겼다. 1993년 2승1패에 이어 1998년에는 2승무패로 플레이오프에 올랐다.

역대 16차례 3전2선승제 준플레이오프에서 1차전 승리팀은 100% 플레이오프행 티켓을 따냈다. 그런데 두산은 이번엔 17년 전과 달리 1차전을 잡았다. 사상 처음으로 준플레이오프 무대에서 LG를 누르고 플레이오프에 진출할 수 있는 유리한 고지를 밟은 것만은 사실이다. 과연 역사는 되풀이될까, 아니면 새로운 역사가 창조될까.

한편, 포스트시즌 역사를 확대해 보면 두산과 LG는 플레이오프에서는 두 차례 만났는데 두산이 모두 LG를 꺾었다. 2000년에는 4승2패, 2013년에는 3승1패로 LG를 물리치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양 팀은 아직 한국시리즈에서는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한국시리즈를 덕아웃시리즈로 장식할 그날은 언제 올지….

포스트시즌 기간에 야구여행은 현 시점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기록과 상황, 인물 등을 통해 KBO리그의 가을야구 역사를 탐험하고 과거로 추억여행을 떠나려 합니다.

스포티비뉴스=이재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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