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티비뉴스=신명철 편집국장] ‘농구에 살고 농구에 죽는’ 필리핀이 축구에서 반세기 시차를 두고 한반도 북쪽과 남쪽 축구 대표팀에 골탕을 먹였다.   

30일 아침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 지역 2차 예선 결과를 본 축구 팬 가운데 상당수는 “어, 북한이 왜 최종 예선 진출국 명단에 없지”라고 고개를 갸웃했을 것이다. 한국과 일본,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 등 동·서 아시아 강호들이 A조부터 H조까지 각 조 1위 또는 각 조 2위 가운데 성적이 좋은 2위 자격으로 12강에 합류했다. 

그런데 2차 예선 마지막 날 경기 전까지 H조 2위를 달리며 12강 가능권에 있던 북한이 탈락하고 이라크와 시리아, 아랍에미리트연합과 중국이 최종 예선행 막차를 탔다. 예상 밖의 결과였다. 북한은 29일 밤 마닐라에서 열린 필리핀과 조 최종전에서 2-3으로 져 승점을 추가하지 못해 최종 예선에 오르지 못했다. 북한은 지난해 10월 8일 4만여 관중이 들어 찬 평양 김일성경기장에서 열린 필리핀과 홈 경기에서도 0-0으로 쉽지 않은 경기를 했고 결국 필리핀에 발목이 잡혔다. 

필리핀은 1950, 60년대 아시아의 스포츠 선진국으로 1954년 제 2회 아시아경기대회를 마닐라에서 열었고 제 1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도 그해 마닐라에서 개최했다. 필리핀에서는 미국의 영향으로 농구와 야구가 성행했다. 야구는 이제 아시아에서도 2류 수준이 됐지만 농구는 여전히 강자의 위상을 지키고 있다. 

1969년 11월, 방콕에서 열린 제 5회 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대회의 사실상 결승전에서 한국이 필리핀을 95-86으로 꺾고 우승한 건 필리핀인들에게 충격이었다. 이 경기에서 50점을 뽑은 신동파는 아직까지도 필리핀인들에게 영웅이다. 필리핀은 1960년 시작한 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 5차례 우승해 16차례 정상에 오른 중국에 이어 다승 2위를 달리고 있다. 1960, 70년대 외에 중국의 강세가 이어지던  1985년 제 13회 대회에서 우승했고, 신흥 강호 이란과 중국의 양강 체제로 개편된 최근 판도에서 2013년 마닐라 대회와 2015년 창사 대회에서 2연속 준우승해 필리핀 농구의 변함없는 전력을 확인했다.   

이런저런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농구는 필리핀의 국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축구는 이렇다 할 국제 대회 성적이 없다. 오래전인 1958년 도쿄 아시아경기대회 8강이 그나마 내세울 수 있는 주요 국제 대회 성적이다. 그런 필리핀에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8강에 빛나는 북한이 덜미를 잡힌 것이다.             

그런데 필리핀은 정확히 49년 전 남쪽 축구 대표팀에도 골탕을 먹였다. 1967년 9월, 도쿄에서는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축구 아시아 지역 A조 예선이 펼쳐졌다. 한국은 자유중국(오늘날의 대만)을 4-2, 레바논을 2-0, 월남(옛 남베트남)을 3-0으로 물리치고 같은 3승의 일본과 맞붙었다. 일진일퇴 숨 막히는 접전 끝에 두 나라는 3-3으로 승부를 가르지 못했다. 한국은 필리핀, 일본은 월남과 경기를 남겨 놓고 있는 가운데 한국은 골득실차에서 +7로 +21의 일본에 크게 뒤져 있었다. 일본이 필리핀을 15-0이라는 기록적인 스코어로 이겼기 때문이다. 많은 골에 대한 부담 속에 한국이 필리핀을 5-0으로 이긴 반면 일본은 월남을 1-0으로 누르고 본선 티켓을 손에 넣었다. 

한국 축구가 이 예선 결과를 두고두고 아쉬워 한 이유는 한국을 아슬아슬하게 따돌리고 본선에 오른 일본이 아시아 나라로는 처음으로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땄기 때문이다. 이스라엘[1980년대 초 OCA(아시아올림픽평의회)가 출범하면서 쿠웨이트 등 서아시아 나라들에 밀려 유럽으로 옮겨 가기 전까지 이스라엘은 아시아경기연맹(AGF), 아시아축구연맹(AFC) 등 아시아에서 스포츠 활동을 했다], 태국과 함께 멕시코시티 올림픽 축구 종목에 출전한 일본은 조별 리그 B조에서 나이지리아를 3-1로 꺾은 데 이어 브라질과 1-1, 스페인과 0-0으로 비겨 조 2위로 8강에 올랐다. 8강전에서 프랑스를 3-1로 잡은 일본은 준결승에서 우승국 헝가리에 0-5로 대패했으나 3위 결정전에서 홈 그라운드의 멕시코를 2-0으로 눌렀다. C조의 이스라엘도 2승 1패로 8강에 오르는 등 아시아 나라들은 이 대회에서 선전했다. 

한국으로서는 이런 과정을 땅을 치며 지켜봐야 했다. 필리핀이 일본에 ‘시원하게 골을 먹어 준 결과’였다.   

필리핀은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 지역 2차 예선 첫 경기에서 바레인을 2-1로 꺾으며 만만치 않은 전력을 드러냈다. 우즈베키스탄과 홈경기에서 1-5로 크게 지기는 했지만 이 경기를 제외하면 과거처럼 대책 없이 무너지지 않았다. 
 
최종 예선 진출이 좌절됐지만 29일 북한전에서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승리가 필요했던 북한을 상대로 한번 역전됐던 경기를 다시 뒤집는 저력을 보였다. 북한전 선제 골을 넣은 미사 바하도란은 이란 혼혈 선수다. 이밖에 잉글랜드, 덴마크, 스페인 핏줄이 섞인 선수들이 포지션마다 중심을 잡아 주고 있다. 해외 리그에서 주로 활약하는 이들을 앞세워 필리핀 축구의 경쟁력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사진] 필리핀 축구 대표팀 ⓒ FI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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