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티비뉴스=정형근 기자] ‘토털 사커’를 완성한 요한 크루이프가 지난 24일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전설은 사라졌지만 그가 현대 축구에 남긴 메시지는 분명했다.  

"각 포지션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를 모아도 세계 1위를 차지할 수는 없다. 그러나 11명의 평범한 선수가 하나가 된다면 가장 강한 팀이 될 수 있다."

크루이프는 개인의 능력이 아닌 '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현대 축구는 돈이 많은 구단이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경우가 많지만 크루이프는 ‘돈은 골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고 믿었다. 우승을 위해서는 11명 선수 전원이 서로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유기적으로 플레이를 펼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크루이프는 그라운드 위 선수들을 포지션으로 구분하지 않았다. "첫 번째 공격수는 골키퍼고, 첫 번째 수비수는 스트라이커다"며 포지션 파괴를 기반으로 선수 전원을 멀티 플레이어화 했다. 감독 시절 선수들에게 순간마다 생각하는 축구를 강조했고 실수와 같은 모든 상황을 완벽하게 대비하고자 했다. 신체 조건과 순발력보다는 ‘축구 아이큐’를 중요시했고 효율적 움직임을 활용한 공간 장악을 보였다.

한 박자 빠른 패스로 끊임없이 공간을 만드는 크루이프의 토털 사커는 팬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축구 경기는 우선적으로 관중을 즐겁게 해야 한다"는 그의 철학처럼 전원 공격과 수비로 대변되는 토털 사커는 단 한 명의 뛰어난 선수가 아니라, 11명 모두가 경기의 주인공이 되는 축구였다. 패하지 않으려고 지키기만 하는 축구, 능력이 뛰어난 몇몇 선수에게만 의존하는 축구는 크루이프의 지향점과는 거리가 멀다.

 

크루이프의 이러한 ‘토털 사커’는 아약스 시절 리누스 미헬스 감독과 만남에서 비롯됐다. 1964년 아약스에서 데뷔한 크루이프는 미헬스 감독이 제시한 토털 사커의 효율성을 극대화했다. 수비와 공격의 경계를 없애고 전방 압박 수비를 기반으로 경기를 풀어 나가는 토털 사커는 크루이프에게 날개를 달아 줬다. 크루이프는 1972년 아약스를 5관왕으로 이끌었다.

1973~74년 2년 연속 발롱도르를 수상하며 승승장구하던 크루이프는 월드컵 우승과는 인연을 맺지 못했다. 1974년 서독 월드컵 결승에서 서독의 프란츠 베켄바우어와 만난 크루이프는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고 네덜란드는 서독에 1-2로 졌다.

크루이프는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 다시 한번 네덜란드를 본선 무대에 올렸다. 그러나 크루이프는 아르헨티나의 군부 독재 정권을 비판하며 본선에 불참했고 네덜란드는 결승에서 아르헨티나에 1-3으로 패했다. 네덜란드 팬들은 그의 결정을 쉽게 납득하지 못했다.

사건의 진실은 2008년이 돼서야 밝혀졌다. 크루이프는 스페인 방송과 인터뷰에서 당시 월드컵 불참 이유가 괴한의 납치 시도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본선 출전을 원했지만 가족이 함께 납치돼 충격을 받았고 결국 월드컵에 출전할 수 없었다고 얘기했다.

선수 은퇴와 동시에 아약스 유소년 팀을 지도한 크루이프는 아약스와 바르셀로나에서 감독 생활을 했다. 바르셀로나 감독 시절에는 팀을 4년 연속 프리메라리가 우승으로 이끌었다. 크루이프는 선수들에게 자신의 축구 철학을 끊임없이 전파했고 바르셀로나 유소년 육성 시스템을 갖추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승리는 소중하다. 그러나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해 남들이 따라 할 수 없게 만드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현대 축구의 시스템을 구축한 크루이프,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면 남긴 메시지는 분명하다.

[사진] 요한 크루이프 ⓒ Getty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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