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크리스 와이드먼은 지난 9월 UFC 200 기자회견에서 세 개의 질문을 받았다.
#3

지난 9월 27일(이하 한국 시간) 미국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UFC 205 기자회견. 마흔 개가 넘는 질문 가운데 크리스 와이드먼(32, 미국)를 위한 질문은 단 세 개였다.

한때 뉴욕의 제왕으로 일컬어지던 그에게 쏟아진 관심, 아니 정확히는 그에게 쏟아진 무관심은 독설보다 가혹했다. 뉴욕의 제왕은 침묵했다. '맥그리거 쇼'가 돼 버린 기자회견장의 들러리가 된 듯했다.

하마터면 오는 13일 뉴욕에서 열리는 UFC 205에 나서지 못할 뻔했던 그이기도 했다. 자신의 고향인 뉴욕에서 종합격투기 프로 대회 개최가 합법화되기까지 UFC의 로비 활동을 전면에서 지원했지만, UFC 계약 협상은 이와 별개 문제였다. UFC 205 기자회견 하루 전까지도 새로운 계약 조건을 놓고 UFC와 줄다리기를 계속해다. UFC 회장(소유주) 자리에서 물러난 로렌조 퍼티타가 막판 협상 테이블에 합류해서야 극적으로 새 계약서를 썼다.

▲ 크리스 와이드먼(좌)은 지난해 12월 루크 락홀드에게 TKO로 지고 미들급 타이틀을 빼앗겼다.
#수모

만약 그가 지독한 앙숙인 캘리포니아 출신의 루크 락홀드와 경기(UFC 194, 2015년 12월 13일)에서 처참하게 지며 미들급 타이틀을 내주지만 않았더라면, 느긋하고 여유롭게 협상을 마쳤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비정한 파이트 비즈니스에서 당신은 가장 최근 경기로 평가 받는다. 그 경기에서 와이드먼은 3라운드 종료 후 이미 회복할 수 없는 충격에 빠진 것이 분명해 보였고 4라운드에는 경기에 나서는 것이 무의미해 보이기까지 했다.

팬들과 기자들은 "진작에 경기가 중단되었어야 했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이는 와이드먼을 더 비참하게 했다. '이스트 코스트 터프 가이'는 '웨스트 코스트의 프리티 보이'와 자존심 대결에서 졌다. 프로 첫 패배였다. 세 번을 성공한 타이틀 방어 행진도 거기서 멈췄다.

▲ 크리스 와이드먼의 UFC 선수 생활은 고난과 역경의 연속이었다.
#극복

돌이켜보면 와이드먼의 UFC 여정은 고난과 역경의 연속이었다. 2011년 3월 옥타곤 데뷔전에서 악조건과 싸웠다. '땜빵' 선수로 UFC와 계약했고 준비 기간은 2주였으며 갈비뼈가 금이 간 상태에서 13kg을 감량해야 했다.

2013년 역사상 최고의 격투기 선수로 평가 받던 전성기의 앤더슨 실바와 2연전을 치렀다. 이어 료토 마치다, 비토 벨포트를 연달아 상대했다. 이들은 모두 UFC의 위대한 챔피언이었으며 명예의 전당에 헌액될 전설들이었다. 그래서 와이드먼의 성과가 더 빛났다. 전례가 없는 것이었기에.

쉬운 경기는 단 하나도 없었다. 그저 앞으로 묵묵히 전진하며 케이지의 거장들을 함락했다. 어떻게든 이길 방법을 찾았던 그였다. 화려하진 않지만 담대했고, 그의 압도적인 정신력과 파이터의 기질이 관중과 시청자들을 설득했다. 911테러라는 최악의 비극과 상처를 딛고 일어선 뉴욕 사람들(뉴요커)들이 그러했듯 와이드먼은 고난과 역경을 지배하며 본인의 업적을 써 내려갔다. 독설도, 난장도 없이 묵묵히.

▲ 크리스 와이드먼은 그의 아내 마리비 와이드먼(왼쪽)과 세 자녀를 두고 있다.
#스트롱 아일랜드

앤더슨 실바를 두 번 이기며 그의 입지는 너무도 단단해졌다. 그의 경제적 상태나 명예는 한때 아내와 함께 아버지의 집 지하에 살던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좋아졌다. 하지만 그는 변하지 않았다. 라스베이거스의 호텔 수영장에서 비키니를 입은 미녀들에 둘러싸이지도 않았고, 슈퍼카를 인스타그램에 자랑하지 않았으며, 마약을 한 채로 자동차 핸들을 잡는 행동은 더더욱 하지 않았다.

와이드먼은 그가 그래왔듯 계속 '패밀리맨(가정적인 가장)'의 자리를 지켰다. 출신지인 뉴욕의 롱아일랜드에서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랐으며 와이드먼의 무명 시절부터 회계사로 일하며 그를 헌신적으로 지원해 온 아내가 있었다. 그 아내와 함께 세 아이를 끔찍하게 아끼는 젊은 가장으로 다른 유혹에 흔들리지 않았다.

동시에 와이드먼은 변함없는 뉴요커였다. 2012년 그의 집이 미국 역사상 최악의 태풍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허리케인 샌디에 극심한 피해를 입었을 때 사람들과 함께 복구 작업에 나섰고 도시 복구를 위한 지원금도 내놓았다.

조용하게, 하지만 꾸준하게 그는 뉴요커들의 이미지를 케이지 안팎에서 투영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뉴욕의 화신이었다. 화려한 비즈니스맨들이 바삐 걸어 다니는, 잠들지 않는 '맨해튼의 뉴욕'이 아닌 블루칼라 노동자들이 살아 숨 쉬는 '롱아일랜드의 뉴욕'을 대표했다.

그는 가짜가 아니었다. 와이드먼은 진정한 의미에서 뉴요커들에게 '그들 가운데 하나'로서 인정 받았고 지지 받았다. 뉴욕은 그에게 기대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역사적인 뉴욕 대회가 열린다면 누가 메인이벤트에 나서야 할까?"라는 질문을 뉴요커에게 던지면 답은 정해져 있던 때가 있었다.

그렇게 와이드먼은 본인의 별명인 ‘올 아메리칸(ALL AMERICAN: 완전히 미국적인, 미국에서 최고인)'에 어울리는 행보를 계속해 나갔다. 종합격투기의 전설이자 그의 스승인 맷 세라 이후 뉴욕에서 탄생한 두 번째 UFC 챔피언의 앞날은 너무도 밝아 보였다.

▲ 크리스 와이드먼은 UFC 205에서 안티 팬이 많은 요엘 로메로와 경기한다.
#뉴욕, 뉴욕

하지만 그는 락홀드와 경기에서 많은 것을 잃었다. UFC 205가 화제로 떠오를 때 와이드먼의 자리는 크지 않았다. 모두가 맥그리거를 얘기하고 그의 상대 에디 알바레즈를 논한다.

인생은 타이밍이라고 했던가. UFC의 뉴욕 입성에 대한 기대와 함께 성장한 와이드먼의 커리어가 거짓말처럼 UFC의 뉴욕 진출을 즈음해 바닥을 친 것이다. 한때 뉴욕 대회 메인이벤터 영순위로 꼽혔지만, 타이틀을 빼앗기며 메인이벤터에 거론될 명분조차 잃었다. 와이드먼은 UFC 205 메인 카드 두 번째 경기에 자리 잡은 것으로 체면치레를 했다.

추측건대 와이드먼은 마음속 깊은 곳에 이번 대회에서 이겨 다시 뉴욕의 제왕, UFC의 제왕에 오르기 위한 여정의 첫걸음을 떼고 싶을 것이다. 와이드먼이 뉴욕에서 열리는 UFC 정규 대회의 첫 번째나 두 번째 경기에 포진되는 것은 그저 어색할 뿐이다. 최소한 UFC 팬들에게 와이드먼의 이름은 뉴욕과 연관 검색어가 아닌가.

하지만 상대는 와이드먼보다 크고, 힘이 세며, 더 좋은 레슬링 실적을 가졌으며, UFC에서 압도적인 무패 행진을 하고 있는 요엘 로메로, 쿠바의 괴물이다. 동시에 굳이 선악을 나누자면 '악'에 가까운 강자다. 로메로는 금지 약물 양성반응을 보였고, '스툴 게이트' 등 경기에서 승패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이상한 행동을 수차례 저질렀다. 와이드먼이 다시 한번 챔피언의 길을 걷기 시작하려고 하는 지금 만나기에 손색이 없다. 순전히 미국인의 시각에서, '정의'의 이름으로 맞설 수 있는 상대와 싸운다.

하지만 여기서 던지는 원초적인 질문은 과연 와이드먼이 로메로에게 승리할 수 있느냐는 것. 만약 와이드먼이 이번 UFC 첫 뉴욕 대회에서 진다면 유례 없이 치열해진 미들급 타이틀 전선에서 멀어지는 것은 물론, 본인의 커리어에도 치명적 오점을 남긴다. 하지만 승리를 거둔다면 와이드먼의 완벽한 컴백 스토리가 시작되는 것이다.

열쇠는 와이드먼이 쥐고 있다. 와이드먼은 그가 그래왔듯, 그리고 뉴욕이 그래왔듯 험난한 역경을 다시 한번 지배할 수 있을까.

필자 소개- 전 엠파이트 칼럼니스트. KBS N SPORTS 격투기(벨라토르·글로리) 해설 위원.

<기획자 주> 스포티비뉴스는 매주 수요일을 '격투기 칼럼 데이'로 정하고 다양한 지식을 지닌 격투기 전문가들의 칼럼을 올립니다. 앞으로 많은 관심과 성원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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