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천문:하늘에 묻는다'의 허진호 감독. 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천문:하늘에 묻는다'(연출 허진호, 제작 하이브미디어코프, 이하 '천문')를 보면 허진호 감독의 장기가 멜로드라마라는 걸 새삼 실감하게 된다. 세종과 장영실이란 두 개의 별, 조선만의 것을 꿈꾼 왕과 천민 출신 천재 과학자의 운명적인 만남이 군신의 관계를 훌쩍 넘어 깊어져 가는 과정을 그려낸 이 영화에는 멜로드라마 뺨치는 감정선이 진하게 녹아있다. 허진호 감독은 그 '관계'에 주목하며 '천문:하늘에 묻는다'를 연출하기로 마음먹었다 한다. 

허 감독의 손길을 거친 명배우들의 열연도 '천문'의 매력이다. 20년 만에 4번째로 만난 최민식과 한석규는 물론이고 연기의 장인이라 칭해 손색없는 배우 신구를 비롯해 허준호 등 묵직한 배우들이 저마다의 존재감을 뽐낸다. 겨울 극장가에 처음 도전장을 던진 허진호 감독에게 영화를 보며 떠오른 질문들을 던졌다. 

다음은 허진호 감독과의 일문일답.

▶사라진 장영실에 대한 궁금증이 시작이라고 언급했다. 어떻게 '천문'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됐나.

"사라진 장영실에 대한 의문과 궁금증이 출발이다. 다른 신하들의 경우에서 보듯 세종은 사람을 버리지 않았다. 흠이 있어도 능력이 있으면 거듭해 등용해서 썼다. 그런데 장영실은 안여사건(장영실이 만든 임금의 가마 '안여'가 부서진 사건) 이후 사라진다. 왜 그랬을까, 그것이 궁금증을 자극했다.

처음 제안받은 건 지난해 봄이다. 두 사람의 이야기가 재미가 있더라. 이 영화에서 여러 이야기가 있다. 홀로 서는 나라를 꿈꾸는 세종과 그것을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신하들의 관계, 영실의 신데렐라 같은 성공스토리, 미스터리 같은 이야기의 구조… 그 중 가장 큰 축은 세종과 영실의 관계다. 군신의 관계에서 벗까지 이르는 이야기에 흥미로운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연출해 보고 싶었다."

※아래부터는 영화 '천문'에 대한 스포일러가 될만한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이후 '천문' 프로젝트에서 달라진 부분이 있다면.

"틀은 바뀌지 않았다. 다만 두 사람 이야기가 훨씬 많이 들어갔다. 캐스팅을 위해 한석규 최민식을 만났을 때부터 제가 깊이 들어갔다. 시나리오를 쭉 같이 고쳤고 두 사람의 이야기가 늘어났다. 한글과의 연결고리를 어떻게 가져갈 것인가 고민이 있어서 만들어 넣었다. 장영실이 실제 갑인자라는 활자를 만들었다. 한글을 창제한 세종이 '활자로 만들어볼래' 하고 장영실을 부르지 않았을까 했다. 그리고 그 모던한 글자체, 활자 디자인을 장영실이 하지 않았을까 했다. 박현모 아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장이 본인도 그런 상상을 했는데 영화로 표현돼 좋더라고 이야기하셨는데, 저도 그 이야기를 듣고 너무 좋았다."

▶여러 독대 신을 통해 세종과 장영실의 관계가 표현된다. 특히 러브스토리에서 주로 쓰이는, 함께 별을 보는 장면이 둘의 관계를 표현하는 데 쓰이리라 상상도 못했다.

"'사미인곡' 같은 걸 보면 왕을 사랑한다는 신하의 표현이 절절하지 않나. 그런 느낌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른 하나는, 이 관계는 조금 다르기도 하다. 세종에게 영실은 벗과 같을 정도다. 그렇다면 영실에게는 세종이 무엇일까. 주군이지만 그 이상의 관계가 성립되지 않았을까. 그리고 또 하나, 최민식과 한석규가 가지고 있는 관계가 있다. 1970년대 구봉서 곽규석씨가 하셨던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하는 CF가 떠오르더라. 라면 한 그릇도 서로 양보할 만큼 서로 위하는 관계다. 그런 친밀감도 반영되지 않았을까."

▶감독과 두 배우, 서로에 대한 신뢰가 느껴진다.

"시나리오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런 과정을 그렇게 많이, 그렇게 오랫동안 해본 건 처음이었다. 그것도 두 배우가 서로 친해서 그럴 수 있었던 것 같다. 남녀 주인공이 함께 있어도 부딪침이 있을 수 있다. 어떤 신을 두고 욕심이 다르거나 해석의 차이가 있을 수도 있다. 이 둘은 그게 없다. 다 '형님 먼저 아우 먼저'다. '형님, 그렇게 생각하세요' '아유, 동생이 맞어' 이런 식의 대화가 늘 오갔다. 세종과 영실 관계 등에 대해 많이 찍었다. (촬영하는) 현장이 짧기도 하고, 미리 많은 대화를 통해 소통이 된 상태에서 찍었다."

▶그래서일까. 막바지 둘의 독대신은 울컥 마음을 울린다.

"세종이 의금부를 나온 영실과 변복한 채 만나는 장면은 마지막 촬영이었다. (최민식 한석규) 둘이 계속 뭐라고 이야기를 하더라. 작전을 짠 거다. 그 장면을 보다가 컷을 하지 못했다. 쭉 빠져들게 되더라. 삐친 듯 왔던 영실이 세종이 웃으니까 애틋해지고, 새종이 '내가 부쉈다'는 대사를 일상적으로 툭 던지고 할 때, 이들의 마음이 읽힌다. 농담을 주고받는 대목, 둘의 표정은…. 그 신에서 한석규 배우가 정말 하고싶었던 걸 한다. '자네같은 벗이 있지 않은가.' 사실 우는 신이 아니다. 최민식이 울었는데 한석규가 울컥 하는거다. 그 신이 긴데, 호흡을 다 살렸다. 쉬었다 가고 다시 쉬었다 가는 호흡이 좋아 차마 자를 수가 없더라. 둘이 내게 말 안하고 보여주려 했던 게 이거였구나 했다."

▶아닌게 아니라 둘의 그런 엄청난 호흡이 영화가 끝난 뒤에도 길게 여운이 남는다.

"악기협주가 떠오른다. 첼로와 콘트라베이스가 삭 가는 느낌이 있었다. 연기는 편집도 오래 하고 정말 오래 했다. 편집을 이렇게 태어나 오래 한 영화 처음이다. 믹싱도 오래 했다. 지금은 또 새롭게 보인다. 그래서 이렇게 연기를 했구나. 쭉 이어서 보면 흐름이 보이지 않나. 끊어서 보던 것이 더 미세하게 보이는 맛이 있다."

▲ 영화 '천문:하늘에 묻는다'의 허진호 감독. 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명연기에 대한 호평이 자자해 연출자로서 더욱 흐뭇할 것 같다. 최민식 한석규뿐 아니라 어느 하나 빠지지 않는 배우군단이 돋보인다.

"최민식 한석규 배우가 들어오면서 그런 진용을 짤 수 있었던 것도 같다. 이 배우들이 한국 영화계에서 지닌 위치, 신뢰가 있다. 신구 선생님의 존재도 크다. 덕분에 윤제뮨, 김원해 임원희를 비롯해 김태우 오광록 등등이 작은 역할에도 들어왔다."

▶영의정 역의 신구의 존재감도 대단하다. 작업도 남달랐을 것 같다.

신구 선생님이랑 작업을 하니까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과 어떤 특별한 마음이 배우들에게 크게 미치는구나 생각이 들었다. 자기가 닮고 싶고 우러러 봤던 분과 연기를 같이 하는 것 아닌가. 거기서 오는 즐거움도 있었던 것 같다. 허준호도 선생님과 해서 좋다며, 그 존경심을 계속 이야기했다. 박지성, 손흥민이 차범근과 같이 시합하는, 그러면서도 승부는 승부다 하고 가는 느낌. 설렘과 떨림 중에서도 지지 않겠다는 느낌. 아마 신구 선배님이 가지고 있는 아우라가 이들에게 연기를 함에 있어서 신선한 긴장을 줬을 것 같다."

▶신구도 1순위 캐스팅이었나.

"물론이다. 영의정이라는 역할이 굉장히 컸다. 시나리오에서부터 중요한 역할이었다. 악역은 아니지만 긴장감을 가지고 갈 수 있는 인물이었고 당연히 1순위였다. 최민식 한석규가 일찍 캐스팅됐기 때문에 바로 신구 선생님이다 했다. 찾아뵙고 말씀을 드렸고, 선생님께서도 연극 스케줄까지 조절해서 참여하셨다."

▶'쉬리' 이후 최민식 한석규의 20년 만의 만남이지만, 허진호 감독과 한석규 신구가 '8월의 크리스마스' 이후 21년 만에 만난 셈이기도 하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릴 줄 몰랐다.(웃음) 최민식 배우도 굉장히 옛날부터 알았다. '조용한 가족' 그 언저리때부터 술을 같이 마셨고, 좋은 배우고 언젠가는 같이 하겠지 했는데 20년이 넘게 걸렸다. 한석규 배우랑 20년 넘게 못할 줄을 누가 알았겠나. 만나기가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의지만으로도 되지 않고, 시기도 역할도 많은 것이 맞아야 하고, 또 서로 하고 싶어야 한다. '내가 이런 배우들과 같이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홍파 배우도 최민식 배우와 친한 친구고, 오광록 배우도 '올드보이'부터 함께 한 62년생 친구들이다. 무엇보다 최민식 한석규가 다시 만났다. 20년 만의 만남이라는 것이 대단하다 생각이 들더라."

▶다른 결말도 있었다고.

"곤장 이후의 장면들이 있다. 장영실이 죽은 버전, 산 버전을 모두 찍었지만 편집 과정에서 모두 빠졌다. 전여빈은 좋은 배우인데 장영실 설명하는 이야기들이 흐름 때문에 들어낸 부분들이 있다. 찍으면서 너무 좋았던 에필로그가 있는데 영화가 안 끝나는 것 같아서 빠졌다. 세종 시선의 에필로그도 있었다. 늙은 말년의 세종이 '영실아' 하고 부르며 잠에서 일어나는 거다. 정내관이 '멀리 떠났사옵니다. 한참 전이옵니다' 하면 홀로 쓸쓸히 별을 보러 나가는 거다. 참 좋았다. 아쉽지만 역시 빠졌다.

▲ 영화 '천문:하늘에 묻는다'의 허진호 감독. 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언급했다시피 오래 편집하며 믹싱에 공을 들였기 때문일까, 좋은 배우가 했기 때문일까. 귀호강이다 싶을 만큼 잘 들리는 영화이기도 하다.

"언제부턴가 한국영화 소리가 잘 안들린다. 누군가는 잘 들리는데 왜 안 들린다고 하냐고도 한다. (소리가 잘 들리는 건) 첫 번째는 배우들의 발성이 다 좋아서다. 동시녹음도 잘 됐다. 그리고 후반작업을 길게 하면서 소리를 다 만졌다. 그 영향이 드러나는 것 같다. 신구 선생님 경우 후시녹음이 하나도 없다. 잡음을 깎아내면 소리가 뭉뚱그려져 잘 안들리는 경우가 많은데, 선생님은 잡음을 깎아내도 소리가 뭉개지지 않는다."

▶세종과 영실의 관계가 달라지며 수평으로 바뀌는 앵글이 눈길을 붙든다.

"촬영감독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은데.(웃음) 앵글에서 변화가 드러난다. 세종이 영실을 처음 처음 만났을 때 '말해보거라' 하며 앉으면서 관계가 달라진다. 카메라도 맞춰서 달라진다. 별을 보는 장면도 그렇다. 처음엔 걸으며 대사를 하는 장면이었다. 가을 내소사 단풍이 너무 예뻐 담으려 했다. 그런데 한석규 배우가 '감독님, 저 앉고 싶습니다' 한 거다. 개울에 돌을 놓을까 했는데 이번엔 '감독님, 저 눕고 싶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이런다.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더라. 동의했고, 누울 장소를 찾았다. 차라리 근정전에서 찍으면 어떨까 했고, 촬영감독도 동의했다. 거기서 개연성이 생긴 것 같다. 둘을 같은 높이로 찍은 카메라에서 이들의 관계가 느껴진다."

▶책으로만 보던 안여사건이 영상으로 구현됐다. 몹시 스펙터클하다. 저 정도면 역모가 맞다 싶을 만큼.

"원래 안여가 삐그덕 하고 넘어지는 거였다. 그런데 의도치 않게 굴러버린 거다. 스턴트맨이 타고 있었는데 위험했다. 뭔가 합이 안 맞은 거지. 몇백킬로 되는 육중한 소품이라 옮길 때도 크레인을 썼는데 워낙 큰 신이라 그대로 썼다. 넘어진 장면에 CG를 더하고 뒤집히는 장면만 다시 찍었다. 그걸로 쓰자 해서 추가로 CG를 넣어서 뒤집는 장면만 다시 찍었다. 예상된 게 아니었으니까 되려 진짜같은 느낌이 있었다.

▶자격루, 혼천의, 간의대 등을 보는 맛도 남다르다. 신경을 많이 썼을 텐데.

"실제 사이즈의 단을 쌓아 그 위용을 재현하려 했다. 더 크게 할까도 했는데 공터 사이즈를 생각하면 최대였다. 별 보는 건 설명을 들어도 모르겠더라. 조감독이었던 박봉수 감독('동창생' 연출)이 전문가처럼 그 쪽을 파서 도움을 많이 받았다.(웃음)"

▶여름 시장에 개봉한 '덕혜옹주'(2016) 이후 3년 만에 겨울 극장가에 도전장을 던진다.

"겨울 시장은 처음이다. 사랑받았으면 좋겠다. '천문'은 물론 세종대왕과 장영실의 이야기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개혁을 홀로 서기를 꿈꿨던 세종과 그걸 반대하는 신하들. 그런 모습들도 볼거리가 된다. 리더의 역할과 사람 관의 관계도 드러난다. 다양한 볼거리와 생각할 거리가 있다. 보시고 즐겨주시길 바란다."

스포티비뉴스=김현록 기자 roky@spotv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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