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23년 연희전문 운동장에서 열린 제1회 전조선중등학교육상경기대회 원반던지기 경기 장면. ⓒ대한체육회
한국 아마추어 스포츠의 본산인 대한체육회는 지난해 국민생활체육회와 발전적으로 통합해 명실공히 한국 스포츠를 총괄하는 기구로 기능하고 있다. 대한체육회가 주관하는 최대 이벤트가 전국체육대회(전국체전)다. 2019년 제100회 대회를 앞두고 오는 10월 20일부터 26일까지는 충주시를 중심으로 충청북도 11개 시·군이 힘을 모아 개최하는 제98회 전국체전이 열린다. 전국체전 역사는 곧 한국 스포츠 역사다. 100년 가까이 한국 스포츠 발전에 이바지한 전국체전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본다. <편집자 주>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1920년 5월 16일 용산 연병장(오늘날 국립 중앙박물관 일대)에서 열린 조선체육협회(일본인들이 조직한 단체) 주최 육상경기대회는 트랙과 필드를 합쳐 모두 15개 종목에 이르러 당시로서는 나름대로 규모를 갖춘 대회였다. 이 대회에는 일본인들뿐만 아니라 조선인 선수들도 서울은 물론 함흥, 평양, 밀양, 수원 등지에서 적지 않게 참가했다. 경성[서울] 일주 10마일 마라톤(당시에는 장거리 경기를 통상적으로 마라톤이라고 했다)에서 인력거꾼 최홍석이 1위를, 오사카시보 배달원인 김상동이 2위, 동아경제 배달원인 김용만이 3위를 차지했다.

우리 민족 손에 조직된 육상경기대회는 조선체육협회 주최 대회가 열린 직후인 1920년 5월 29일 서울YMCA 주최 사립중학교연합대회가 처음이었나 그 뒤 이어 나가지 못했다.

1923년 11월 3일 연희전문은 자기네 운동장에서 제1회 전조선중등학교육상경기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와 다음 해인 1924년 조선체육회가 시작한 전조선육상경기대회는 연희전문 주최 전조선중등학교육상경기대회와 함께 육상경기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조선체육회는 육상경기대회를 개최할 경기장으로 학교 소유주인 민영휘가 1923년 계동궁의 절반을 사서 마련한 휘문고보 운동장을 사용하기로 했다. 운동장 넓이를 측정해서 그 넓이에 알맞은 트랙을 앉혔으며 설계는 근대 육상경기의 발상국인 영국에 유학했던 서병희가 맡았다. 육상경기대회 준비로 조선체육회 사무실인 계명구락부는 한동안 분주했다. 그때까지 체육회가 각종 경기 대회를 열어 모아 둔 기금이 5,000원 가량 됐다. 체육회는 이 돈으로 육상경기대회 개최에 필요한 허들 기구와 필드 종목의 기구 모두를 사들였다.

경기장 한가운데에 100m 직선 코스를 마련하고 트랙은 한 바퀴가 333m였다. 1924년 6월 14일부터 이틀 동안 근대식 육상경기 시설을 갖춘 휘문고보 운동장에서 조선체육회가 주최하는 첫 전조선육상경기대회가 열렸다.

제1회 전조선육상경기대회 경기 종목은 *트랙 종목=100m, 200m, 400m, 800m, 1500m, 5000m, 마라톤, 400m 릴레이, 1600m 릴레이, 110m 높은 허들, 200m 낮은 허들 *필드 종목=높이뛰기, 멀리뛰기, 세단뛰기, 장대높이뛰기, 창던지기, 포환던지기, 원반던지기 등 18개 종목이었다.

그때 참가 자격에는 ‘평상시 다리 힘을 쓰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참가할 수 없다’는 제한 규정이 있었다. ‘다리 힘을 쓰는 직업’이란 인력거꾼, 우편 배달원, 신문 배달원 등을 가리킨다. 지금 시각으로 보면 어처구니없는 제한 규정이었으나 당시만 하더라도 다리 힘을 쓰는 직업을 지닌 사람이 육상경기에 참가하는 것은 아마추어리즘에 위배된다고 생각했다.

이 대회에는 전국 각지에서 400여명의 선수들이 몰려들었다. 소속 단체별로 보면 양정고보, 청년학관, 휘문고보, 경성상업, 선린상업, 협성실업, 제2고보, 보성전문, 중앙고보, 동래고보 그리고 강계, 평양 등지에서 은행원, 상인, 실업인들도 많이 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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