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1930년 11월 조선체육회 주최로 제1회 전조선역기대회가 열렸다. 1928년 서울YMCA가 역기대회를 열었으니 그보다 2년 뒤늦었으나 이 대회는 이규현, 박종영, 이병학, 서상천 등이 조직한 조선체육증진연구소가 1930년 9월 중앙체육증진연구소로 이름을 바꾼 뒤 처음으로 후원하는 대회라 주목을 끌었다. 당시는 제대로 된 역도 기구가 없어 플레이트를 시멘트로 만들거나 궤도용 소형 화차의 쇠바퀴를 사용해 연습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 대회 경량급에는 11명이 참가해 장삼현이 우승했고 중량급에는 12명이 출전해 원희득이 우승했지만 얼마를 들었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2편에서 계속>
 
조선체육회 주최 제2회 전조선역기대회는 1931년 12월 5일부터 이틀 동안 하세가와공회당(오늘날의 상공회의소 자리)에서 열렸다. 당시는 들어 올린 무게가 아닌 득점제로 순위를 결정했다. 경량급은 이덕흥이 450점으로, 중량급은 송학준이 575점으로 각각 우승했다.
조선체육회 주최 제3회 전조선역기대회는 1932년 12월 10일 하세가와공회당에서 열렸고 이 대회부터는 조선일보사가 후원사로 나섰다. 경경체급 이덕흥(465점), 경체급 김용성(600점), 중(中)체급 송학준(635점), 경중(重)체급 김희학(550점)이 각각 체급별 우승을 차지했다.

조선체육회 주최 제4회 전조선역기대회는 1933년 11월 29일 천도교기념관에서 열렸다. 이 대회 경경체급에서는 최금석이 530점으로 우승했고 경체급에서는 이용성이 590점으로 왕좌에 올랐다.

조선체육회의 1934년도 마지막 사업인 제5회 전조선역기대회는 12월 1일 천도교기념관에서 치러졌다. 이 대회에서는 남수일, 김성집 등 세계적인 선수로 자라날 유망주들이 두각을 나타냈다. 경경체급에서는 남수일이 520점으로 우승했다. 경체급에서는 김용성이 630점으로 왕좌에 올랐고 2위는 600점을 기록한 김성집이었다. 중(中)체급에서는 박명준이 600점으로 우승자가 됐다.

나날이 발전하던 역도는 전조선종합경기대회(오늘날의 전국체육대회) 종목으로 채택되는 기쁨을 누렸다. 조선체육회는 제16회 전조선종합경기대회를 1935년 10월 22일부터 나흘 동안 경성운동장을 중심으로 개최했는데 이 대회는 지난 대회의 육상, 축구, 농구, 야구, 정구 등 5개 종목에 역기, 유도, 씨름, 검도 등 4개 종목을 추가했다.

역기는 경경체급에서 남수일이 590점, 경체급에서 김용성이 665점, 중(中)체급에서 김성집이 650점으로 각각 정상에 올랐다.

1936년 조선역기연맹이 조직됐고 그해 5월 제1회 전일본선수권대회에서 김용성·김성집이 각각 우승했다. 1938년 제3회 전일본선수권대회에서는 남수일이 60㎏급 인상과 추상에서 315㎏을 들어 올려 세계신기록을 세웠다. 그해 조선체육회가 조선총독부의 압력으로 해산되면서 조선역기연맹이 조선중량거연맹으로 개칭됐는데 1940년에는 이 단체마저 해산됐다.

일제 강점기 역기 선수들은 일본의 전국체육대회 격인 메이지신궁경기대회에서 특히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서울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남산에 착공한 지 7년 만인 1925년 9월 완공된 조선메이지신궁을 기리기 위해 때 맞춰 준공된 경성운동장에서 그해 10월 제1회 조선신궁경기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는 일본이 패망하기 3년 전인 1942년까지 계속됐다. 조선신궁경기대회는 1924년 도쿄 메이지신궁경기장에서 열리기 시작한 메이지신궁경기대회에 출전하는 조선 지역 대표를 뽑는 선발전도 겸했다.

메이지신궁경기대회는 매년 혹은 격년제로 개최됐으나 1932년 제6회 대회까지 조선 선수들의 참가를 받아 주지 않다가 1933년 제7회 대회부터 조선 선수들이 출전하게 됐다. 거의 우리 선수들끼리 패권을 다투는 조선신궁경기대회와 달리 메이지신궁경기대회는 조선 선수와 일본선수들의 대결이라는 점에서 많은 관심을 모았다.

1937년 제9회 메이지신궁대회 역기에서는 남수일(57kg급), 박동욱(60kg급), 김용성(67kg급), 김성집(75kg급), 박효상(82.5kg급)이 정상에 올라 일본 역기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1939년 제10회 메이지신궁대회에서는 이규혁(54kg급), 남수일(60kg급), 조택희(67kg급), 이영환(82kg급)이 왕좌에 올랐다. 남수일은 세계신기록으로, 이영환은 일본 신기록으로 각각 우승했다.

1940년 제11회 메이지신궁대회부터는 매년 개최로 바뀌지만 중국 대륙 침략이 장기전의 수렁에 빠져 있는 데다 제2차 세계대전에 돌입하기 1년 전 이었던 탓에 이른바 국방 경기가 대두돼 메이지신궁대회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런 와중에도 역기에서는 박동욱(56kg급)과 김성집(75kg급)이 세계신기록으로 우승했고 남수일(60kg급), 이병돈(67.5kg급), 이영환(82.5kg급)도 각각 우승했다.

한마디로 1930년대 후반 조선의 역기 실력은 축구 농구 복싱 등과 함께 일본을 압도하고 있었다. <4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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