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티비뉴스=도쿄(일본), 한준 기자] 도쿄 출장 이틀째. 하루는 길고, 웃을 일은 거의 없다. 일본은 출장이든, 여행이든 여러 번 방문했지만 도쿄는 초행길이라 24시간 내내 긴장의 연속이다. 서울보다 훨씬 남쪽에 있는 일본의 수도는 춥지 않다고 했지만, 체감온도는 춥다. 더 춥던 한국에서도 끄덕 없던 감기가 출장 첫날 습격했다.


일본에서 선수 생활을 오래 한 홍명보 대한축구협회 전무이사는 일본 출장 전 도쿄의 겨울 날씨를 묻자 “두꺼운 점퍼까지 입을 필요는 없고 외투 하나 걸치고 다닐 만하다”고 했다. 하지만, 주의하라고 한 것은 실내 온도. “오히려 방 안이 춥다. 일본 집들은 한국처럼 온돌이 없어서 난방이 좋지 않다.” 말 그대로였다. 밖은 다닐 만한데, 안은 춥다.

내부의 적이 더 무서운 법이다. 바깥 바람이 아무리 세차게 불어도 집안이 아늑하면 몸도 마음도 충전된다. 아직 경기 일정이 시작되지 않은 7일 취재는 남자부 미디어 데이와 동아시아축구연맹 창립 15주년 심포지엄 참석이 있었다. 

낮 12시에 시작한 남자 본선 진출 4개국 감독 인터뷰에서, 혼이 빠지게 일하는 기자들을 바히드 할릴호지치 일본 대표 팀 감독이 웃게 해 줬다. 전날 훈련에서 뇌진탕 증세를 보여 병원으로 이송된 핵심 미드필더 기요타케 히로시의 상태와 동아시안컵 엔트리 합류 여부를 묻는 아사히신문 기자의 질문에 대한 답에 위트를 녹였다. 

“안타깝게도, 여러분이 보신 대로 여러 어려움이 있습니다. 우선 우라와 레즈 선수들이 (FIFA 클럽 월드컵 참가로) 올 수 없고, 가시마의 니시 다이고 선수가 수술을 받았습니다. 또한, 우연히 세레소 오사카 선수 3명도 호텔에 올 수 없는 상황입니다. 스기모토 선수는 왔으나 부상한 상태입니다. 발목 부상이 새로 발견됐습니다. 수술을 받을 예정입니다. 어제(6일)는 기요타케가 듀얼(일대일 대결, 할릴호지치 감독이 일본 대표 팀 부임 후 가장 강조하는 능력) 상황에서 머리를 다쳤습니다. 병원이 가까워서 바로 검사 받으러 갔어요. 큰 부상은 아니었지만, 메디컬 스태프가 10일 간 훈련을 해선 안되다고 판단했습니다.” 

할릴호지치 감독은 동아시안컵 참가 4개국 가운데 명단 구성에 가장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국은 유럽파를 제외한 정예 멤버를 데려왔다. 상당수 선수들이 2018년 러시아 월드컵 본선에 갈 수 있는 구성. 중국은 베테랑들에 22세 이하 신예 선수를 섞어 2019년 AFC(아시아축구연맹) 아시안컵 본선에 도전하는 기틀을 다지고 가는 대회. 북한은 이탈리아 세라에 B 한광성을 제외하면 풀 전력. 일본은 유럽파 비중이 높은데다, J리거 가운데에서도 핵심인 우라와 레즈 선수들이 아시아 챔피언이 되면서 부르지 못했다. 

▲ 가장 어려운 상황에도 가장 밝은 모습을 보인 일본의 할릴호지치 감독 ⓒ연합뉴스


여기에 J리그에서도 개별적으로 뛰어난 성과를 낸 선수들이 부상으로 하나둘 빠져나갔다. 일본은 한중일 3국 가운데 가장 늦게 리그 일정이 끝나면서 휴식도, 훈련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런 첩첩산중의 상황을, 할릴호지치 감독은 위트를 담아 이야기했다.

“기요타케 선수는 어제, 그제 훈련 내용이 좋아서 정말 아쉽습니다. 기요타케 선수도 리듬을 타서 즐겁게 훈련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팀 구성을 바꿔야 하는 상황이다. 가시마의 선수를 부를 생각입니다. 도이 쇼마 선수입니다. 하지만, 지금 일본의 어딘가, 북쪽 지역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빨리 찾아야겠습니다.”

취재진이 한바탕 웃음을 터뜨린 대목. 할릴호지치 감독은 대체 발탁 선수의 이야기를 더 풀었다. “그 선수는 지금 결혼식을 준비하는 것 같은데요. 정말 미안하지만, 결혼식은 할 수 있겠지만, 경기 때문에 여기 와야겠습니다. 결혼식의 행복을 방해하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픕니다만, 여기 참가하시는 감독님들은 모두 좋은 팀을 꾸리고자 하고 있으니까요.” 

셰익스피어는 “힘들 때 우는 것은 삼류, 참는 것은 이류, 웃는 것은 일류”라는 말을 남겼다. 셰익스피어 기준에 따르면 할릴호지치 감독은 일류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알제리 대표 팀을 이끌고 자신이 유능한 사령탑이라는 것을 입증한 할릴호지치 감독에게, 2018년 러시아 월드컵은 16강 이상의 성적을 요하는 더 어려운 도전. 

발칸의 화약고인 보스니아 출신이지만 프랑스에서 오랫동안 활동해 프랑스어로 소통한다. 할릴호지치 안에 여러 문화가 혼재된 느낌. 그런 점에서 일본이라는 나라와 잘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 할릴호지치 감독은 아기자기한 패스 축구 중심의 일본 대표 팀에 듀얼 상황의 힘을 강조하며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아직 확실한 결과물로 이어지지 못했다. 

할릴호지치 감독은 2015년 동아시안컵도 참가했다. 그때도 J리거 중심 일본은 큰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 과정에도 기복이 있었다. 최종 평가는 러시아에서 이뤄지겠지만, 중간 점검 과정인 동아시안컵 선수 구성 단계가 어려워 실익을 챙기기가 가장 어려운 상황이다. 그래도 할릴호지치 감독은 웃었다. 

그는 2014년 브라질에서도 한국을 꺾기 전까지 알제리 취재진과 ‘전쟁 상황’이었다. 한국전 승리 후 회견장에서 알제리 기자단 간사의 사과를 받고, 기립 박수를 받았다. 할릴호지치 감독은 이를 기분 좋게 받아 줬다. 어쩌면 그 경험이 지금 할릴호지치 감독을 더 느긋하게 만들어 줬을지 모른다. 이번 대회도 결국 어느 정도 조직력이 다져졌을 최종전, 한국과 경기가 가장 중요할 것이다. 

일본은 제6회째를 맞는 동아시안컵 개최국으로 우승에 유리한 조건이다. 중국과 북한은 일본의 전력으로 해볼 만하고, 한국을 상대로도 제대로 선수단만 구성했다면 승산이 없지 않다. 일본 대표 팀의 상황도 도쿄의 겨울 같다. 외부의 바람이 세찬 것은 아니지만, 내부가 시리다. 이럴 때 중요한 것은 흥분하지 말고, 분노하지 말고, 좌절하지 말고 중심을 잡는 것이다. 할릴호지치 감독이 기자회견장에서 고난을 웃음으로 승화한 모습은, 그런 그의 정신을 보여 줬다. 

재미있는 것은 대체 발탁된 도이 쇼마가 일본 언론에 결혼식을 준비하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며, 다른 동료 선수의 이야기를 감독이 착각한 것 같다고 해명한 것. 우스꽝스러운 일이지만, 온전히 대회에 집중할 수 있는 선수를 대체 발탁했다는 점은 할릴호지치 감독에겐 불행 중 아주 작은 다행이 됐다고 할 수 있겠다. 

▲ 미디어 데이와 심포지엄은 도쿄타워 인근에서 열렸다 ⓒ한준 기자


미디어 데이 이후 진행된 동아시아축구연맹 창립 15주년 심포지엄 행사는 꽤 성대했다. 미디어데이가 열린 도쿄 프린스호텔 인근의 프린스타워파크 호텔에서 진행됐다. 동아시아축구연맹의 10개 회원국이 동아시아 축구가 하나로 뭉쳐 장차 월드컵 우승국을 배출해 유럽, 남미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축구 발전을 이루자고 결의했다. 이를 위한 상호 교류와 세미나, 대회 운영을 확대하자고 다짐했다. 

스즈키컵의 대흥행을 이룬 아세안축구연맹(AFF)과 파트너십을 맺고 MOU를 체결해 서아시아와 구분되는 범동아시아의 결속도 도모했다. 아세안축구연맹은 호주도 가입하는 등 세를 늘려 가고 있다. 동아시아 안의 나라들은 서로 경쟁심을 거쳐 발전했지만, 이제는 협력으로 상생해야 한다는 점에 공감하고 있다. 다시금 유럽, 남미 등 축구 선진 세력과 격차가 벌어지고, 동남아시아의 추격을 받는 동아시아는 축구 내부의 결속을 다지는 것으로 발전의 기틀을 만들고자 한다. 

미디어 데이와 심포지엄이 열린 장소가 도쿄타워 소재지였다. 도쿄로 향하면서 특별히 도쿄에 대해 알아간 것이 없고, 도쿄타워나 한번 보고 가면 되겠다는 생각이었는데 출장 이틀째에 낮에도 밤에도 도쿄타워를 볼 수 있었다. 놀러 온 게 아니니 감흥은 없었다. 파리의 에펠탑을 그대로 닮았는데 주변부는 더 삭막한 느낌. 

이날도 밤 10시가 다 되어 문 연 식당을 찾아 끼니를 때웠다. 밤이 깊었지만 남은 일은 산더미다. 도쿄타워의 야경은 스치듯 사진만 찍고 떠나 왔다. 숙소로 향하는 발길이 무거웠던 것은 도쿄타워에 대한 여운이 아니라 더 춥고 적막할 숙소로 향하는 마음이 스산했기 때문이다. 밖이 춥고 안이 따듯한 쪽이 좋다. 

글=한준 (스포티비뉴스 축구팀장)



관련기사

저작권자 © SPOTV NEW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