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티비뉴스=상트페테르부르크(러시아), 한준 기자] 이란이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이후 8년 만에 아시아 축구의 월드컵 본선 첫 승 주인공이 됐다.
경기 초반 25분동안 모로코의 현란한 공격에 휘둘렸던 이란도 러시아와 개막전에서 0-5 참패를 당한 사우디아라비아와 마찬가지로 세계 축구와 격차를 느꼈다. 하지만 결국 후반 추가 시간에 상대 공격수 부하두즈의 자책고를 끌어내며 승리의 주인공이 됐다. 에르베 르나르 모로코 감독은 “이란은 내려서서 기다리는 축구를 했지만 결국 승리한 팀이 옳은 것”이라며 고개를 떨궜다.
이란이 보여준 축구는 철저히 실리적이었다. 도전적이라고 볼 수 없었다. 르나르 모로코 감독이 “우리는 승리를 위해 위험을 많이 감수해야 했다”며 수동적인 경기를 한 이란의 방법론이 더 안정적이었다고 했다.
카를루스 케이루스 이란 감독의 생각은 달랐다. “우리는 모로코가 스피드와 기술에 강점을 바탕으로 초반에 밀어붙일 것을 예상했다. 블록을 만들어서 상대를 당황시키고자 했다. 결국 패닉에 빠트렸다”며 준비의 성공이라고 했다.
◆ 수비 축구로 거둔 승리, 내려선다고 다 되는 건 아니다
내려선다고 수비가 다 잘되는 것은 아니다. 모로코에 통했다고 어떤 팀에게든 통하는 것도 아니다. 케이루스 감독은 “스페인은 골키퍼부터 최전방 공격수까지 풀어나올 수 있는 팀이라 다른 전략으로 나설 것”이라며 자기 진영에서 기다리는 수비를 펼치다 역습하는 것이 단순히 잘 통한게 아니라고 했다.
모로코와 경기에서 중요했던 것은 자기 진영에 진을 친 것 그 자체가 아니다. 이란은 이날 전방 압박을 포기하고 하프라인 아래로 내려가 버티는 축구를 했다.
경기 초반에는 이란이 긴장한 탓인지 허점을 많이 노출했다. 풀백을 높이 올리고, 좌우 측면 공격수와 중앙 미드필더 간 유기전 논스톱 패스를 펼친 모로코의 플레이가 잘 먹혔다. 그러다 전반 30분께 이란 수비가 안정되기 시작했다. 주효했던 것은 언제 나가서 자르고, 언제 물러서서 공간을 메울지에 대한 판단이 잘 이뤄진 것이다.
축구는 필연적으로 틈이 생길 수 밖에 없는 광활한 그라운드에서 경기한다. 이란은 네 명의 수비수와 네 명의 미드필더가 두 줄을 구축했는데, 공격형 미드필더로 나선 아미리까지도 한 칸 밑으로 내려와 아즈문을 제외한 9명의 선수가 두 줄을 구축했다. 4-4 두줄에 한 명이 오르내리며 넓게 막고, 라인 사이를 더 조밀하게 좁혔다.
◆ 이란식 두 줄 수비의 비결, 물러설 타이밍이 완벽했다
두 줄 간의 협업이 잘 됐다. 5명의 1선에서 중앙 지역 모로코의 패스 전개를 적절히 막았는데, 무리하게 빼앗으려고 하기 보다 패스 동선을 괴롭히고 제어하는 것에만 집중했다. 공을 얻지 않아도 좋으니 상대를 공격하다가 지치게 만들었다.
공 소유가 중요한 이유는 공 없이 이리저리 따라다니다가 체력 소모가 상대보다 커지기 때문이다. 후반전 어느 시점에는 거의 대부분 체력이 떨어져 수비가 무너져 점유하는 팀이 유리한 형국이 된다. 이란은 이 조율이 잘 됐다. 간헐적인 역습 기회가 있었지만, 무리해서 달려들지 않았다. 90분 간 균형을 유지하는 데 집중하는 축구를 하며 모로코의 진을 빼놓았다.
후반전 시작 이후 30분 가까이는 양 팀 모두 슈팅이 없을 정도로 지리한 경기가 됐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이란 선수들이 서로 눈짓과 손짓으로 언제 압박을 나가고, 언제 뒤로 물러서고, 반대편에선 어떤 공간과 어떤 선수를 커버할지 치밀하게 대응했다. 그냥 뒤로 물러서서 버틴 게 아니라 순간 순간 틈을 주지 않기 위해 그물망을 유지했다.
케이루스 감독의 힘이다. 아시아 예선 13경기 연속 무실점 과정에서 이란의 수비 조직력은 빼어났다. 여기에 두 풀백과 두 윙어를 통한 속공이 강점이었는데, 더 강한 팀을 상대하는 월드컵 본선에는 풀백이 거의 전진하지 않고 윙어도 수비에 주력하며 공격 의지를 내려 놓았다.
전반 43분 아즈문이 결정적인 역습 기회에 결정력 문제를 드러냈고, 후반 34분 자한바크시의 문전 우측 돌파에 이은 슈팅도 모로코 수비 숫자가 충분한 상황에서 이뤄졌다. 역습 시 이란 공격수들은 외로웠다. 하지만 덕분에 수비의 위협은 적었다.
케이루스 감독은 “축구는 운이 따라야 한다”고 했다. 이란은 후반 추가 시간에 프리킥 기회를 살려 득점했고, 이길 수 있었다. 부하두즈의 걷어내기가 자책골이 되도록 계획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운이 따른 결과다.
이날 경기 최우수 선수는 패배한 모로코의 아민 하리트가 선정됐다. 이란이 상대 자책골로 승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득점 과정에서 레프트백 하지사피의 킥도 날카로웠다. 르나르 감독은 “이란의 3번이 때때로 미드필더로 올라오는 데 왼쪽 윙으로 올라와서 놀랐다”고 하기도 했다.
◆ 불가능에 가까웠던 90분 집중 성공, 감독의 전략+선수의 헌신+팬들의 지지
이란의 운은 그냥 운이 아니다. 90분을 흔들림 없이 버텼기에 찾아온 결실이기도 하다. “기적이고 마법 같은 승리였다. 선수들이 90분 동안 집중했고, 좋은 축구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케이루스 감독은 90분 간 집중력이 유지된 것 자체가 마법이고 기적이라고 했다. 그래서 자신의 전술 전략 보다 선수들의 헌신과 태도가 승리의 가장 큰 원동력이라고 했다.
전략과 전술이 먹히려면 수행이 잘 되어야 한다. 케이루스 감독이 시도한 수비 축구는 선수들의 체력과 정신력, 조직력이 모두 동반되어야 가능하다. 기본적으로 내려서서 수비하는 축구는 소모가 많다. 이란은 운의 도움이 더해져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를 위한 또 다른 힘이 믿음과 지지였다고 했다.
“솔직히 모든 감독들의 전략과 경기 계획이 있지만, 결국 선수들의 태도가 중요하다. 우리가 강조할 게 무엇인지, 얘기할게 무엇인지, 그 것은 환상적인 자세다. 선수들이 헌신했다. 1분, 1초, 오직 이기는 것만 생각한다. 긍정적인 생각이 중요하다. 8년의 시간동안 우리가 생각한 것은 이기는 것이다. 우리는 이 승리를 수 많은 희생을 해준 대표 팀의 진짜 팬들에게 바치고 싶다. 진짜 대표 팀의 팬. 이 선물과 이 승리는 팀을 지지해준 이들의 덕분이다.”
케이루스 감독의 말에는 울림이 있었다. 진짜 팬들의 헌신적인 지지.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도,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도 한국 대표 팀은 절대적 지지를 얻지 못한 채 외로운 싸움을 했다. 도마 위에서 싸웠다. 물론, 팬들의 비판에는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결전을 앞둔 선수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기를 보내주는 것이다.
수만 원정 관중이 경기장을 채운 이란팬들은 90분 간 이란이 소극적으로 수비를 하는 와중에도 환호와 갈채, 응원의 함성을 높이며 기를 보냈다. 케이루스 감독의 이란이 거둔 성공이, 한국 대표 팀에 좋은 참고자료가 될 것이다.
우리도 수비하고 버티고, 이겨내야 한다. 여기엔 선수들의 헌신, 감독의 전략과 더불어 팬들의 지지가 필요하다. 스웨덴과 경기에서 한국이 사우디아라비아가 될지, 이란이 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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