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기 시작 전, 한국은 뭉쳤고 독일은 따로 놀았다 ⓒ한준 기자
▲ 한국은 팀이고 독일은 개인이었다


[스포티비뉴스=카잔(러시아), 한준 기자] “숨어 있는 한국대표팀 만의 ‘멘털리티’가 있다. 어떤 순간에 ‘저런 에너지가 어디 숨어있었지’ 하는 에너지가 있다. 그런 기대는 있다. 위기의 순간에 나오는, 한국인만 갖고 있는 에너지가 있다. 그걸 조금 기대하고 있다.” (이영표)

“한국 축구의 가장 큰 장점은 희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선수들이 자신의 이익이 아닌 팀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부분. 어려서 그런 문화에서 자라서 어려울 때 팀에 희생하는 부분이 도움이 된다. 그런 부분이 한국 대표팀이 진짜 어려웠을 때 위기 극복하는 힘이 되어 왔다. 지금도 선수들이 얼만큼 그런 의지 보여주느냐에 따라 충분히 바뀔 수 있다.” (박지성)

한국 축구의 최전성기를 이끈 두 레전드의 말은 27일 카잔 아레나에서 현실이 됐다. 한국과 독일 모두 2018년 러시아 월드컵 F조 3차전 결과에 따라 16강에 오를 수도, 조별리그에서 탈락할 수도 있었다. 

1승을 안고 있던 독일이 더 유리했다. 하지만 1%의 가능성이라던 한국이 2-0으로 승리해 기적을 연출했다. 멕시코가 스웨덴에 0-3으로 완패하면서 기적이 완성되지 못했지만, 한국은 독일을 월드컵 역사상 처음으로 조별리그에서 탈락시켰다. 그것도 꼴찌로 쫓아냈다.

정신이 기술을 이길 수 있을까? 대한민국 대표 선수들은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경기가 시작하기 전, 한국 선수들은 벤치에 23명의 선수가 전부 모여 기합을 넣었다. 킥오프 직전에는 선발 11명이 다시 둥글게 모였다. 하프타임에는 부상으로 뛸 수 없는 기성용과 박주호가 전반전을 마치고 나오는 선수들 전원과 하이파이브를 했다. 경기를 마친 뒤 선수들은 다시 둥글게 모였다.

▲ 그래픽=김종래 디자이너


◆ 하나로 뭉친 한국, 모래알 조직력 보인 독일

독일은 따로 놀았다. 한국 선수들이 모여 의기투합할 때, 질서 없이 각자의 시간을 보내며 킥오프 시간을 기다렸다. 킥오프 이후 공을 지배하고, 공격 기회를 더 많이 만든 팀은 독일이었다. 하지만 26회나 된 독일의 슈팅은 6차례만 유효 슈팅으로 이어졌고, 한국은 11번의 슈팅 중 5개를 유효 슈팅으로, 그 중 2개를 득점으로 연결하며 효율적인 경기를 했다.

독일은 공격적이었다. 1,2차전과 마찬가지로 4-2-3-1 포메이션을 썼는데, 좌우 풀백 헥토어와 킴미히가 윙어 영역까지 올라오고, 마르코 로이스와 메수트 외질, 레온 고레츠카가 포워드 영역에서 뛰었다. 외질이 2선에서 프리롤을 맡고, 그 뒤에 크로스와 케디라, 훔멜스와 쥘레가 섰다. 한국의 역습에 대비했다.

독일의 볼 점유율은 70%였지만 공이 없는 상황에서 한국 선수들이 보여준 투혼은 이를 저지하기 충분했다. 한국이 독일은 통제한 것은 아니지만, 무력하게 만들었다. 앞선 두 경기 모두 한국 선수들은 투혼을 보였다. 이번 경기에는 두 경기의 경험으로 쌓인 침착함이 더해졌다. 

한국은 홍철, 김영권, 윤영선, 이용을 포백으로 두고, 그 앞에 정우영과 장현수를 배치했다. 장현수가 외질을 마크했다. 수비 라인이 밀리면 윤영선 옆으로 이동해 오른쪽 센터백 영역을 커버했다. 

“우리가 이틀 동안 상대가 갖고 있던 전술을 선수들에게 4-4-2와 우리 진영에 오면 5-4-1 변형으로 이틀 간 훈련했다. 선수들이 잘 해줬다. 볼 점유율은 우리가 질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기회 올 것이다. 상대가 우리 보다 심리적으로 급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더 밀고 올라올 것이다. 그걸 잘 이용하면 원하는 결과 가져올 수 있다. 이런 것이 승리 원동력이다.” (신태용 감독)

1,2차전 모두 완벽한 수비를 펼쳤던 왼쪽 센터백 김영권은 독일 공격이 밀려 들어올 때 적절한 태클와 슬라이딩으로 차단했다. 단순히 몸을 던지는 게 아니라 적재적소에서 잘랐다. 

1,2차전에서 부진했던 장현수는 한 칸 앞인 수비형 미드필더로 전진해 불안을 덜고 중원 수비를 펼쳤다. 메수트 외질이 중앙 공간에서 사라지게 만들었다.  독일 공격이 둘을 모두 통과하면 골키퍼 조현우가 선방했다. 

"수비수들이 모여서 미팅을 매일 했다. 수비수들이 어떻게 버텨야 하고, 독일 선수들의 유기적인 움직임을 잘 막으려고 미팅을 했다." (김영권)

독일 선수들이 안으로 많이 치고 들어오고, 윙백들이 많이 올라왔다. 우리 센터백이 2명(김영권, 윤영선)이라 다 막기에 무리가 있어 공간이 생기면 커버를 내가 하기로 했다. 변형 스리백 식으로 뛰었는데 독일이 당황한 것 같다." (장현수)

▲ 일사분란한 4-4-2, 4-5-1 수비를 펼친 한국 ⓒ한준 기자
▲ 전방 압박, 중원 블록, 두 줄 수비를 영역별로 잘했다 ⓒ한준 기자


◆ 정신과 전술이 결합된 한국, 기술만 좋은 독일을 '저지'했다.

한국은 독일을 철저히 분석했고, 약속된 플레이로 막았으며, 기술과 운동 능력으로 밀릴 때 투혼으로 막아냈다. 팀으로 똘똘 뭉친 한국은 기어코 독일을 무실점으로 막았다. 독일도 다득점 승리가 필요했다. 

독일이 후반전에 수비 자원을 빼고(케디라->고메스, 고레츠카->뮐러, 헥토어->브란트) 공격수를 연이어 투입하면서 한국의 역습 기회가 열렸다. 한국은 여러 차례 기회를 맞았지만 마무리 과정이 세밀하지 못했다. 그러다 추가 시간에 극적으로 두 골을 넣었다.

조별리그 3경기 모두 상대에 대한 맞춤 전술을 준비한 신태용 감독. 각기 다른 라인업과 구조를 짰는데, 앞선 두 경기는 예기치 않은 페널티킥 선제 실점으로 계획이 흐트러졌다. 독일과 경기는 선수들이 완벽하게 수행했다. 

구자철과 황희찬이 부상으로 교체되는 상황에도 신태용 감독은 팀의 균형을 잃지 않는 교체 카드 투입을 잘 적용했다. 손흥민을 최전방에 두고 역습 첨병으로 삼은 실리 축구는 독일을 잘 괴롭혔다. 문선민과 이재성의 전방 압박도 눈부셨다. 문선민은 공격 마무리 판단을 제외하면 국가 대표 새내기답지 않은 플레이를 했다. 이재성의 기술은 월드컵에도 통했다. 

구자철은 몸 상태가 온전하지 않았지만 최대한 많이 뛰어주고 나가겠다고 했다. 전반전이 끝났을 때 이미 뛰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신 감독은 후반 11분 또 한번 쓰러진 구자철이 빠지자 그 자리에 황희찬을 투입했다. 

이어서 후반 24분에 문선민을 빼고 주세종을 투입했다. 주세종은 멕시코와 경기에서도 중앙 지역에서 전방 압박이 좋았다. 황희찬이 측면으로 이동하고 주세종이 중원에 자리 잡았다.

교체 투입한 황희찬의 부상에 신 감독은 2경기 연속 조커로 뛴 이승우 대신 고요한을 넣었다. 마지막까지 독일의 공세를 견딜 악착 같은 수비력을 중시했다. 

▲ 신태용 감독은 선발 전략과 교체 용병술 모두 완벽했다.


◆ 용병술도 탁월했던 신태용 감독, 그보다 위대했던 태극전사의 추가 시간 '투혼 득점'

독일전은 전술도 중요하지만 정신이 결과에 미친 영향이 더 켰다. 

“어제까지 1프로의 가능성 잡고 싶었다. 불굴의 투혼 발휘했다. 독일은 FIFA 랭킹 1위로 디펜딩 챔피언이다. 상대가 우리를 무조건 이길 것인가, 몇 골 차로 이길지 방심한 것 같다. 그걸 역으로 준비한 게 적중했다.”

만약 멕시코가 스웨덴을 꺾었다면 한국의 독일전 2-0 승리는 월드컵 역사에 길이 남은 명승부로 남았을 것이다. 90분을 넘어서까지 팀 정신이 흔들리지 않은 한국이었다. 김영권은 코너킥 공격에서 침착하게 득점했고, 손흥민은 노이어가 전진한 상황에 주세종의 적절한 패스를 받아 깔끔하게 마무리했다. 다리가 후들거릴 순간에 정확한 판단과 슈팅을 했다.

독일은 정신도 전략도 패했다. 베르너는 무게감이 없었고 결정력도 부족했다. 외질은 존재감이 없었다. 중원 강화를 위해 넣은 고레츠카는 팀과 따로 놀았다. 헥터어와 킴미히의 크로스는 날카롭지 않았다. 로이스의 속도 정도만 위협적이었다. 

반면 한국은 후반전에 공격진의 체력이 떨어지자 장현수와 김영권이 과감하게 전진하며 역습 상황에 독일 수비를 위협했다. 감독의 지시가 아니었다. 장현수는 "기회가 열려서 달려갔다"고 했고, 김영권도 "선수들이 힘들어 하고 있어서 뛰어올라갔다"고 했다. 선수들은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위해 한 발 더 뛰고 헌신했다. 이 기세가 독일을 눌렀다. 

▲ 김영권은 '킹영권'이 됐다
▲ 누구도 대표 팀의 간절함을 의심하지 못할 것이다


◆ 2014년의 경험, 2018년의 성과, 2022년의 기대

“어차피 3전 전패.” 자조적인 시선은 2014년 브라질 월드컵 실패가 남긴 상처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초반 2연패로 더 처참한 실패가 벌어지는 줄 알았다. 하지만 2014년을 경험한 선수들의 정신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기성용도, 구자철도, 김영권도, 그 때의 경험이 헛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겠다는 각오와 의지를 밝힌 터였다. 그리고 이들은 이를 증명했다.

기성용은 주장다운 리더십을 보였다. 김영권은 한국 수비 역사상 최고의 경기력에 마침표를 찍은 골까지 넣으며 최고의 대회를 치렀다. 구자철은 부상 속에도 독일전에 헌신하며 생애 첫 월드컵 승리라는 목표를 이뤘다. 김영권은 “죽어도 막는다”고 했고, 구자철은 “못 이기면 못 죽는다”고 했다. 정말 모든 것을 던졌다. 

장현수는 “낭떠러지에 몰려 있었다”고 했다. 선수들은 위기의 순간 한국인이 발휘하는 저력을 월드컵 무대에서 표출했다. 한국은 독일을 꺾을 자격이 있었다. 독일이 못해서가 아니라 한국이 이길 만해서 이겼다. 

멕시코전도 한국은 대등한 경기를 했다. 스웨덴과 첫 경기의 긴장이 새삼 아쉽다. 한국이 16강에 올랐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 지 모른다. 1994년 독일전처럼, 한국 축구는 큰 가능성과 기대를 남기고 대회를 마쳤다. 신태용 감독의 기지와 선수들의 간절함은 조별리그 탈락에도 한국 축구에 희망이 남았다는 것을 보여줬다. 

예선 10전 전승의 독일을, 대회 개막 한 달전에 5명의 선수를 부상으로 잃고, 대회 개막 후에도 두 명의 주력 선수를 잃은 한국이 잡았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한 것 보다 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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