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퇴한 지 20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이만수 전 SK 와이번스 감독의 포구 자세는 대구상고~한양대~삼성 라이온즈 시절과 똑같다. ⓒ한희재 기자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1977년 6월,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제32회 청룡기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 패자부활전에서 살아 올라간 대구상고는 동산고와 겨룬 결승 1차전에서 이만수의 역전 결승타로 3-1로 이긴데 이어 2차전에서는 박영진과 이만수가 투타에서 활약해 7-2로 승리해 1970년 대회 이후 7년 만에 다시 이 대회 정상에 올랐다. 

대회 최우수선수로 뽑힌 이만수는 타율, 최다 안타, 타점 등 4관왕에 올랐다. 뒷날 프로 야구 첫 타격 3관왕의 탄생을 예고한 대회였다.

야구 실력이 부쩍 향상한 그해 이만수는 국제 대회에서도 실력을 발휘했다. 한국 고교 선발 팀과 고시엔대회 우승 팀을 주축으로 꾸린 일본 고교 선발 팀 경기는 그 무렵 장안의 화제를 모으는 빅 이벤트였다. 

괴물 투수 에가와 스구루도 이 대회에서 국내 팬들에게 이름을 알렸다. 그해 9월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대회에서 1차전은 2-2로 비겼고 2차전에서는 1-3으로 졌으나 3차전에서는 양상문과 박영진이 이어 던지고 이만수의 선제 2점 홈런에 힘입어 6-3으로 이겼다.

1970년대 후반 국내 야구계는 대형 포수의 탄생을 고대하고 있었다. 배성서와 정동진 등 뛰어난 실력을 지닌 포수들이 차례로 유니폼을 벗으며 국가 대표급 포수 기근 현상이 예고됐다. 이때 나타난 대형 포수 유망주가 이만수였다. 

이만수는 1977년 이영민 타격상의 수상자이기도 하거니와 포수 치고는 빠른 주력, 수준급 투수 리드 능력 등으로 대학 야구 관계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대형 포수를 둘러싼 영입 경쟁에서 그 무렵 특별한 스카우트 실력을 발휘하고 있던 한양대가 3년 전 장효조에 이만수를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당시 스포츠 팬들 사이에서 화제는 이만수의 한 살 터울 동생 이용수가 테니스 선수로 성균관대에 진학한 일이었다. 형제는 대구상고 야구부와 테니스부 주장을 맡기도 했다. 또 형제가 서로 훈련 파트너가 돼 준다는 얘기도 이야깃거리였다. 

이만수는 그때 한 인터뷰에서 "시즌 오픈 전까지 열심히 훈련해 주전 포수가 되고 3할대 타율을 기록하겠다"는 목표를 밝혔다. 이만수의 목표는 곧바로 이뤄졌다. 1978년 3월 18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시즌 오픈 경기에 이만수는 포수 마스크를 쓰고 김시진과 짝을 이뤄 최동원과 박해종이 배터리를 이룬 연세대와 맞붙었는데 일반적인 예상을 깨고 4-1로 이겼다. 

시즌 오픈 경기는 요즘으로 치면 프로 야구 시범 경기쯤 되는 이벤트 대회인데 그해 고등부에서는 서울고가 경기고를 4-0, 일반부에서는 한국화장품이 롯데[프로 롯데 자이언츠의 전신쯤 되는 실업 야구 팀]를 6-4로 눌렀다.

1978년 4월 열린 대학 야구 춘계연맹전 결승 리그에서 고려대가 5승으로 1위, 연세대가 4승1패로 2위, 한양대가 3승2패로 3위를 한 가운데 최우수선수상은 노상수, 감투상은 최동원에게 돌아갔고 타격 부문은 한양대가 독차지했다.

타율 1위는 장효조(25타수 13안타, 0.520), 2위는 이만수(36타수 11안타, 0.472)였으며 타점상(10) 홈런킹상(4)은 이만수, 도루상은 장효조(11)가 받았다. 그해 추계연맹전 결승 리그에서는 고려대가 3승2무로 우승한 가운데 이만수가 타격상(38타수 18안타 0.474)을 수상했다.

한양대 입학을 결정 지은 뒤 치른 겨울 훈련에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에는 남산을 오르고 오전에는 소속 팀 훈련, 오후에는 대한야구협회가 실시한 동계 훈련을 받으며 땀을 흘린 결과였다. 

또 가족이 모두 서울로 이사하며 형제의 선수 생활을 뒷바라지한 값진 성과였다. 형제는 그 무렵 모든 종목 운동선수들이 그랬듯이 국가 대표 선수가 되는 꿈을 꾸고 있었는데 이만수의 꿈은 대학 진학 후 1년여 만에 이뤄졌다. 

1979년 6월 미국 그랜드래피츠에서 열린 한미대학야구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은 5승1패로 우승했고 대회 최우수선수로 이만수가 선정됐다. 당시 대학 선발 멤버는 김시진 김용남 박철순 양상문 임호균 선우대영(이상 투수) 박해종 이만수 김진우(이상 포수) 정학수 오대석 정영기 양세종 박종훈(이상 내야수) 우경하 박용성 김종윤(이상 외야수) 등 뒷날 프로 야구를 빛낼 선수들이었다. 

1980년 도쿄 세계야구선수권대회를 앞두고 대표 팀은 그해 2월 가고시마에서 한국 야구 사상 처음으로 국외 전지훈련을 실시했다. 이만수도 선배들과 함께 선수 생활 가운데 처음으로 외국에 가서 훈련을 했다. 태릉선수촌에도 들어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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