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원 관중 열기로 뜨거운 잠실 구장. 프로 스포츠는 팬들 사랑으로 먹고산다. 팬들의 외면을 받는 프로 스포츠 리그는 존속을 보장 받을 수 없다. ⓒ곽혜미 기자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글쓴이는 스포티비뉴스 고유라 기자가 쓴 7일자 "국민 정서 무시한 AG 후폭풍, 리그 전체 외면 부른다" 제하 기사 가운데 "(전략)평일이었기 때문일까. 휴식기에 들어가기 전까지 평일 경기 299경기에서 평균 관중은 8,846명이었다. 그러나 리그 재개 후 3일 동안 경기당 평균 관중은 7,132명에 불과하다. 아직 3일밖에 되지 않았고 경기 대진 등 변수들을 더 자세하게 고려해 봐야 하지만 한눈에 봐도 야구장은 날씨만큼이나 한산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팬들이 야구를 보는 시선이 부정적으로 바뀌었다.(후략)"라는 내용이 담긴 단락이 가슴에 와닿았다.

야구를 보는 팬들의 부정적인 시각은 2018년 자카르타 팔렘방 아시안게임 대표 팀 구성 문제에서 비롯됐다. 대표 선수로서 자질을 갖추지 못한 선수를, 병역 특례용으로 뽑았다는 야구 팬들 지적에 관련 단체에서는 이렇다 할 해명 또는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

글쓴이는 스포츠 기자 생활을 하면서 여러 리그가 길지 않은 번성기를 누리고 사라져 가는 과정을 지켜봤다. 인기 구기 종목의 아마추어 시절이 대표적이다. 스포츠에 영원한 강자가 없듯이 국내 최고 인기 종목이라고 자부하는 프로 야구 리그, 즉 KBO 리그도 예외는 아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이 끝나고 아이들이 모두 축구를 하겠다는 겁니다. 당연히 야구부를 지원하는 아이들이 확 줄었고요. 모두 '안정환, 안정환'이라고 하며 공을 차는 겁니다. 어느 대회에서는 일반 학생에게 유니폼을 입혀 라이트(필더)로 세워 놓고 경기를 한 적도 있습니다."

글쓴이가 4, 5년 전 서울 시내 초·중등학교 야구부를 순회 취재하는 과정에서 들은 얘기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 있는 이 학교는 초등부 야구 명문으로 이름이 꽤 알려져 있다. 글쓴이가 취재를 갔을 때에는 '월드컵 위기'를 극복하고 주전 조와 비 주전 조가 따로 훈련할 정도로 야구부가 제자리로 돌아가 있었다. 서울 근교 도시에서 야구 유학을 온 아이도 있다고 했다.

그 학교 감독이 얘기했던, 야구가 위기를 맞았던 2000년대 중반으로 잠시 돌아가 보자.

2006년 현대 유니콘스-한화 이글스의 플레이오프 1차전이 벌어진 10월 13일 수원 구장. 2년 연속 정규 시즌 300만 관중을 넘어선 데다 포스트시즌 첫 번째 관문인 한화-KIA 타이거즈의 준플레이오프 3경기 입장권이 모두 팔려 일부 프로 야구 관계자들은 플레이오프에서도 흥행 행진이 이어질 것으로 기대했다. 수원의 야구 열기가 다른 지역보다는 덜해 만원 관중이 아닐 수도 있다는 불안한 구석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런데 '혹시나'가 '역시나'가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외야 관중석이 휑한 가운데 1만 4,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구장에 절반을 겨우 넘긴 8,925명의 유료 관중이 들어와 경기를 지켜봤다.

이튿날인 10월 14일 수원월드컵경기장. 2006년 프로 축구 후기 리그 수원 삼성-성남 일화전이 2만 7,000여 관중의 뜨거운 성원 속에 펼쳐졌다. 후기 리그 선두를 달리는 수원과 전기 리그 1위 팀이자 그 경기 전까지 후기 리그 우승으로 통합 우승을 이루려는 꿈을 버리지 않고 있던 성남이 맞붙은 빅 카드였다.

그러나 포스트시즌 경기도 아니고 후기 리그 우승을 가리는 결정적인 경기도 아니었다. 프로 야구 관계자들로서는 축구 열기가 뜨겁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수원에서 벌어진 일이기에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어가려 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해 10월 둘째 주 주말 수원에서 나온 양대 종목의 관중 동원 결과는 25번째 시즌을 마무리하고 있는 한국 프로 야구의 현주소를 있는 그대로 보여 줬다. 지금으로부터 딱 12년 전 일이다.

2005년과 2006년 2년 연속 정규 시즌 300만 관중 돌파가 얼마나 낯간지러운 소식인지는 조금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바로 알 수 있었다. 1982년 프로 야구 원년 관중은 213만 명이었다. 6개 구단이 팀당 80경기씩 연간 240게임을 한 결과다. 이듬해에는 387만 명. 6개 구단이 팀당 100경기씩 연간 300게임을 치르며 동원한 관중이다.

1984년 1월, 당시 공식 명칭 한국야구위원회, 즉 KBO는 정기총회를 열고 프로 야구단 창설을 희망하는 기업이 갖춰야 할 조건을 제시했다. 그해 시즌이 끝나면 3년만 대전을 연고지로 하기로 약속한 OB 베어스가 서울로 올라와 대전 지역에 프로 야구 공백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프로 야구단 창설 기업의 필요조건은 △신생 구단은 1985년부터 참가한다. (빙그레 이글스의 리그 참여는 1986년으로 1년 늦춰졌다) △대전 구장의 관중 수를 7,000명에서 2만 명으로 늘릴 수 있도록 증축한다. (프로 야구 초창기 대전 구장 외야는 맨땅이었다) △충청도의 아마추어 팀을 10개 이상으로 늘린다. (2006년 현재 충청남·북도 고교 야구 팀은 천안북일고 공주고 세광고 청주기공 등 4개 팀으로 1980년대와 변함없었다) △가입금은 30억 원으로 하고 그 돈은 야구회관 건립 기금으로 한다. (한국야구위원회는 1985년 1월 16일 한국화약의 가입을 승인했고, 야구회관은 1988년 4월 완공됐다)

1980년대 중·후반 프로 야구는 경기 제도에 큰 변화가 있었다. 1985년 삼성 라이온즈의 전·후기 리그 통합 우승으로 포스트시즌이 무산되자 1986년부터 1988년까지 전·후기 리그 제도는 유지한 채 전·후기 리그 1, 2위 팀의 ‘티켓 따먹기’ 방식으로 포스트시즌 진출 팀을 가렸다. 1989년부터는 단일 시즌 제도로 바꾸면서 포스트시즌을 ‘사다리 타기’ 방식으로 운용하기 시작했다.

신세대 팬들에게는 새삼스러울 게 전혀 없는 조명 시설도 프로 야구 원년인 1982년 초에는 서울 동대문 구장을 빼고는 갖춰져 있지 않았다. 부산 구덕 구장은 그해 7월 1일, 대구 시민 구장은 7월 2일, 대전 구장은 8월 4일 각각 조명 시설을 완공했다. 인천 구장에서는 시즌이 끝나 가는 9월 13일이 돼서야 야간 경기를 할 수 있게 됐다.

프로 야구의 기본 틀은 1980년대에 거의 모두 만들어졌다. 그리고 오랜 기간 그 틀을 기반으로 리그 흥행을 이어 갔다. 1980년대 초 야구 축구 씨름 등이 잇따라 프로화가 될 때 1년 먼저 시작한 프로 야구는 프로 축구에 ‘선생님’ 같은 존재였다. 최근까지만 해도 그랬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상황이 아니다. 리그 전체가 흔들릴 수 있는 위기를 맞고 있다. 프로 야구가 다시금 팬들의 따뜻한 사랑을 받고 살아 숨 쉬는 역동적인 스포츠로 재탄생하기 위해서는 뭔가 결단을 모색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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