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4년 제5회 전조선야구대회 중학단에서 우승한 배재고보 선수들. 한자로 쓴 휘문 배재 학교 이름과 함께 이닝별 점수가 적힌 스코어보드 앞에서 우승 기념사진를 찍었다. 결승에서 배재고보는 휘문고보를 22-2로 크게 물리쳤다. 야구 개척자들인 이들은 2018년 현재 한국 야구를 어떻게 생각할까. ⓒ대한체육회 90년사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스포츠 잔치인 전국체육대회(전국체전) 99번째 대회가 다음 달 12일부터 18일까지 익산시 등 전라북도 14개 시·군에서 열린다. 내년 서울에서는 역사적인 제100회 대회가 펼쳐진다.

이번 대회에는 전국 17개 시·도에서 47개 종목 2만4,924명(임원 6,323명 선수 1만8,601명)이 참가한다. 최다 인원이 참가하는 종목은 육상경기로 1,381명이며 축구와 야구·소프트볼이 각 1,378명과 833명이다.

올림픽에 남녀부 종목으로 진입해 2020년 도쿄 대회 때, 2008년 베이징 대회 이후 12년 만에 올림픽 무대에 다시 서는 야구·소프트볼은 이번 전국체전 출전 선수 숫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국내 스포츠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하다.

한국은 아마추어 야구 강국이기도 하고 프로는 10개 구단으로 운용되는, 세계 3위 수준의 리그를 거느리고 있다. 올림픽 디펜딩 챔피언이고 연간 800만 명이 이상이 즐기는 ‘국민적 스포츠’다.

그런 야구가 문화·체육 분야 병역 특례 제도의 존치 여부에 영향을 미치는 ‘공공의 적’ 같은 처지에 몰려 있다.

그렇다면 선배 야구인들은 이런 상황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할까.

역사의 그날, 1920년 6월 16일 저녁 인사동 한 음식점에서 조선체육회(오늘날 대한체육회) 발기를 위한 준비 모임이 있었다. 이 자리에는 장두현 고원훈 이동식 윤기현 이원용 변봉현 이중국 김규면 원달호 김병대 김동철 등 50여명이 모였다. 우리나라 초창기 스포츠 발전에 이바지한 선각자들이다.

이들은 조선체육회 발기인 선정에 착수했는데 발기인 선정 기준은 학교 교장이나 학교를 대표할 만한 인물, 사회 유지로서 친일적인 색채가 없는 인물 그리고 체육인들을 대상 삼아 전국적으로 인물을 찾아봤다.

1920년 7월 13일 오후 8시 인사동 중앙예배당에서 지방 발기인 20여명이 참석하지 못한 가운데 70여명의 발기인이 모여 조선체육회 창립 총회를 가졌다.

조선체육회는 도쿄 유학생 체육인들과 국내 체육인들이 뜻을 모아 창립하는 과정에서 장덕수를 비롯한 민족 지도자급 인사들과 민족정신이 강한 교육계 중진, 서울YMCA 인사들의 후원과 참여로 민족 운동체로서 성격을 갖게 됐다.

조선체육회는 창립 첫해인 1920년 가을 첫 행사로 전조선야구대회를 열었다. 여러 종목 가운데 야구 대회를 가장 먼저 열게 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체육인들 가운데 조선체육회 창립 주동 인물들이 주로 야구인들이었던 데다 1915년 일본 오사카 아사히신문 주최 전일본중등학교야구대회에서 사용했던 야구 경기 규칙과 대회 운영 요강 그리고 기록부 등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 자료들을 참고 삼아 야구 대회를 무난히 치를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배재고보의 호의로 조선체육회 주최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는 1920년 11월 4일부터 사흘 동안 배재고보 운동장에서 치러졌다. 대회 명칭이 전조선야구대회였으나 첫 대회에는 서울 시내에 있는 팀들만 참가했다. 중학단에는 휘문고보 경신학교 중앙고보 배재고보 보성고보 등 5개 팀이 참가했고 청년단에는 경신구락부 천도교청년회 배재구락부 삼한구락부 서울YMCA 등 5개 팀이 출전했다.

이쯤에서 요즘 시각으로 보면 우습기도 한 일이 벌어진다.

입장료를 받느냐 마느냐를 놓고 의견이 엇갈린 것이다. 대부분 조선체육회 이사들과 학교 관계자들은 입장료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으나 “체육회의 유지 운영을 기부에만 의존할 수는 없다”는 김병대 회계 감독과 이중국 총무의 강력한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스포츠의 순수성을 느낄 수 있는 장면이다.

입장료는 어른 10전, 어린이 5전이었다. 막상 대회를 열고 보니 입장료를 내고 들어오는 관중들이 예상보다 많아 대회 수입이 200원 정도에 이르렀다고 한다.

1909년 첫 번째 도쿄 유학생 야구단 고국 방문 경기 이래 여러 차례 유학생 팀과 경기를 치러 본 데다 서울에 사는 일본인 팀과 경기 등으로 경기 운영 경험도 많았기 때문에 별 탈 없이 첫 대회는 성공적으로 치러졌다. 수입금으로 체육회를 어렵사리 운용하면서 진 외상값을 치르고도 몇 십 원이 남았다고 한다.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는 광복 후 대한체육회가 조선체육회의 창립 정신을 기리고 전통을 이어받는다는 뜻에서 단일 종목 대회지만 전국체전의 기원으로 삼았다. 우리나라 첫 번째 전국체전은 1920년 전조선야구대회인 것이다.

이런 유구한 전통과 역사에 빛나는 종목에 1982년 프로 야구 출범과 함께 야구 선수 출신이 아닌, 이른바 비 경기인이 대거 유입됐다.

그 무렵 웃지 못할 일화 하나. 어느 구단 고위 관계자가 야구 관계자들과 저녁 자리에서 “왜 투수가 완투를 하지요. 1이닝씩 9명이 나눠 던지면 될 텐데”라고 했고, 참석자들은 일제히 유구무언이었다. 농담이 아니고 매우 진지하게 얘기했기 때문이었다.


저작권자 © SPOTV NEW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