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8일 파주 국가 대표 트레이닝 센터에서 열린 오픈 트레이닝 데이에는 수많은 여성 팬이 몰려 치솟는 축구 인기를 실감하게 했다.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요즘 축구에 관심을 보이는 여성 팬이 부쩍 늘고 있다. 온라인은 물론이고 오프라인에서도 여성들 축구 사랑이 넘친다. 

지난 3일 2018년 자카르타 팔렘방 아시안게임 축구 금메달리스트들이 귀국한 인천국제공항은 이른 아침부터 소녀 팬들로 가득했다. 2-0으로 이긴 코스타리카와 경기가 열린 7일 고양종합운동장 풍경도 이와 비슷했다. 

8일 파주 국가 대표 트레이닝 센터에서 열린 오픈 트레이닝 데이 때는 행사 전날부터 기다린 여성 팬들도 있었다고 한다. 방탄소년단 수준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매우 이례적인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같은 축구로 보면 안정환 이동국 고종수 등이 화제의 인물이 된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직후, 다른 종목으로 보면 1990년대 중반 ‘독수리 5형제’로 불린 연세대 농구부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여성 팬은 10~20년 뒤 잠재적 고객을 확보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특정 종목 여성 팬은 아이들에게 자기 종목(?)을 물려주는 게 일반적이다. 

여성 팬 확보 노력을 가장 먼저 한 종목은 야구다. 여성 팬을 선점한 야구에 축구가 도전하는 모양새다. 30여년 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1981년 8월 27일 아침 신문에 실린 한 장의 사진. 전국의 여학생 야구 팬들은 경악했다. 모르긴 몰라도 적잖은 이들이 사진을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을 것이다. 홈으로 들어오는 선린상고 박노준의 왼쪽 발목이 슬라이딩하는 반대 방향으로 꺾인 장면이 TV 화면만큼이나 생생히 신문에 담겨 있었다.

전날,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선린상고와 경북고의 제11회 봉황대기전국고교야구대회 결승전 1회에 벌어진 일이었다. 박노준은 구급차에 실려 대회 주최 신문사 지정 병원으로 갔고, 두 달여 뒤인 10월 29일 퇴원했다. 경기인들 표현으로 하면 “발목이 돌아갈” 정도의 큰 부상이었다. 이 사진이 보도된 뒤 박노준이 입원한 병원은, 조금 부풀려 얘기하면 여학생 팬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이 대회 결승전에서 류중일 성준 문병권 등이 포진한 경북고는 선린상고를 6-4로 물리치고 우승했다. 경북고는 6월에 열린 제36회 청룡기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 결승전에서도 선린상고를 6-5로 따돌리고 정상에 올랐다. 9월에 벌어진 제35회 황금사자기전국지구별초청고교야구대회 결승전에서는 왼손잡이 기둥 투수 김정수(연세대를 거쳐 해태 타이거즈 입단)가 버틴 광주 진흥고를 6-0으로 완파했고, 10월 제62회 전국체육대회(서울)에서도 우승해 그해 4관왕에 올랐다. 1970년대 초반에 이은 경북고 제2의 전성시대였다.

기억력이 좋은 야구 팬이라면 그해 7월 17일 잠실구장 개장 첫 홈런의 주인공이 류중일이고, 그해 9월 재일 동포 김의명을 앞세운 일본 고교 야구 선발 팀과 경기에서 3연승한 한국 고교 야구 선발 팀 주축 멤버가 류중일 성준 김정수 조계현 차동철 등이었다는 걸 꿰고 있을 터이다. 

그해 일본 고교 야구 선발 팀에는 제63회 고시엔 대회 우승교인 호도쿠고의 김의명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일본 프로 리그의 ‘할아버지 투수’들 가운데 한 명인 구도 기미야스(2012년 4월 은퇴)도 있었다. 나고야전기고 3학년으로 고시엔 대회 2회전에서 노히트노런 기록을 세운 그는 2차전 선발로 나섰으나 일본의 0-1 패배를 막지 못했다. 류중일은 1회 선두 타자 안타로, 결과적으로 노히트 게임을 방지했고 3회 초 1사 뒤 볼넷을 고른 뒤 후속 땅볼과 구도의 악송구로 결승점을 올렸다.

그해 11월 동아일보가 프로 야구 출범 움직임을 보도하기 전에 있었던 일들이다. 그 무렵 고교 야구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당시 여고에 다니던 글쓴이의 사촌동생은 서울이 고향인데도 경북고 선발 라인업은 물론 후보 선수들 이름까지 줄줄이 외고 있었다. 박노준 류중일 정도면 여학생들에게 요즘의 방탄소년단 이상의 인기 스타였다. 그때는 이런 그룹이 없기도 했지만. 

1980년대 여학생 야구 팬들과 관련해 소개할 일화가 또 있다. 1982년 프로 야구가 출범한 뒤에도 고교 야구를 사랑한 이들은 동대문운동장(1981년 잠실 구장이 개장하면서 서울운동장에서 동대문운동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야구장 외야석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응원하던 덕수상고 여학생들을 기억할 터이다. 1910년 개교한 전통의 명문 덕수상고는 1984년부터 여학생을 받기 시작했고 이때가 1980년 창단한 덕수상고 야구부의 성장기에 해당한다. 

1986년 6월 9일, 그날도 덕수상고 여학생들은 동대문운동장 야구장 외야 스탠드에서 “덕수, 덕수”를 외치고 있었고 응원에 힘입은 김충훈(중견수) 김형균(투수) 황일권(유격수) 등은 대전고를 4-2로 물리치고 이성열 감독을 헹가래 쳤다. 제41회 청룡기대회 우승 순간의 장면이다. 

창단 뒤 첫 우승이었으니 동대문운동장 야구장에 있었던 덕수상고 여학생들은 40대 후반의 나이가 된 오늘도 그날을 잊지 않고 있을 것이다. 

좀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1960~70년대에는 남성과 동반하는 여성은 동대문운동장 야구장에 공짜로 들어갈 수 있었다. 모든 대회가 그런 건 아니고 몇몇 대회에서 요즘 말로, 프로모션을 하기 위해 그런 이벤트를 했다. 그때 이후 1980년대 중반까지 여성 팬들이 오늘날 ‘치맥파’ 팬들의 큰 이모뻘 되는 원조 그룹이다. 

다른 어느 종목보다 앞장서서 여성 팬을 경기장으로 끌어들인 야구가, 축구의 강력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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