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티비뉴스=신명철 편집국장] 당시 나라의 경제력으로 볼 때 큰 규모의 체육관을 짓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었다. 이런 어려운 여건에서 1960년 3월 서울시는 900여만 원의 예산으로 기공식을 한데 이어 총 공사비 9,200만 원을 투입해 1963년 2월 1일 국제적으로 손색없는 장충체육관을 완공했다. 이보다 조금 앞선 시기에 1960년 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를 열기 위해 만든 효창구장 건설에 2억 3천만 원이 들었으니 당시 체육관 건립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그때 효창구장은 천연 잔디 구장이었으나 워낙 많은 경기가 열려 1970년대에는 완전한 맨땅 구장이 됐다. 비가 오면 논바닥이나 다름없는 진흙탕이 됐다. 몸이 무거워지는 걸 막기 위해 선수들이 스타킹에 비닐을 씌우고 뛰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다. 1983년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FIFA U 20 월드컵 전신) 4강 기념 사업으로 인조 잔디를 깐 게 오늘날의 효창구장이다. <6편에서 계속> 

장충체육관이 건립되기 전후인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중반에 걸쳐 한국 농구를 상징하는 이가 김영기 KBL(한국농구연맹) 총재다.

김영기는 배재고~고려대를 거쳐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국가 대표를 지냈다. 김영기는 화려한 드리블로 대표되는 뛰어난 개인기로 농구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김영기는 1965년 은퇴한 뒤 직장 생활 틈틈이 박정희장군배동남아시아여자농구대회, 미국 프로 농구(NBA) 등 각종 경기의 해설을 맡아 선수 시절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  

김영기는 각종 기록을 근거로 특정 팀간 승패는 물론 예상 스코어까지 내놓아 농구 팬들의 관심을 끌었다. 요즘 같으면 스포츠 통계 회사에서 컴퓨터로 할 일을 거의 반세기 전에 수작업으로 한 것이다. 1967년 서울에서 열린 제 4회 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대회 때는 이 같은 예상이 족집게처럼 들어맞아 농구 팬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김영기의 해설은 그의 선수 시절 경기력만큼이나 뛰어났다. 어린 시절 기억을 떠 올리면서 이 일화를 스포츠 기자가 된 뒤에 김 총재에게 이야기했더니 김 총재는 “우연히 맞췄을 뿐”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이제는 폐간된, 2000년대 중반 스포츠 팬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스포츠 2.0’은 배재고등학교 시절 김영기를 179cm의 키, 가냘픈 체구였지만 리드미컬한 드리블, 요즘 더블 클러치라고 하는 이중 모션과 아마도 한국 농구 사상 처음일, 한 손 슛을 던지는 선수”라고 설명했다. 

한국 남자 농구는 1948년 런던 올림픽에 이어 1956년 멜버른 올림픽에 출전했다. 이 대회에 약관의 김영기가 출전했다. 한국 농구의 경기력이 세계 수준에 크게 못 미쳐 출전 15개 나라 가운데 14위에 그쳤지만 우승국 미국의 빌 러셀 같은 뛰어난 선수들의 플레이와 선진적인 전술을 본 것은 뒷날 지도자 김영기에게 큰 공부가 됐다.

김영기는 1964년 도쿄 대회에 두 번째로 올림픽에 출전했다. 당시로는 노장인, 우리나라 나이 29살 때였다. 1960년대 후반, 지도자와 선수로 힘을 모아 한국 남자 농구의 1차 전성기를 이끌게 되는 신동파가 20살로 대표팀 막내였다. 이 대회에서도 한국은 세계의 벽을 실감했다. 한국은 출전 16개국 가운데 꼴찌에 그쳤다. 개최국 일본은 10위에 올랐다. 이 무렵 한국 남자 농구는 1962년 자카르타 아시아경기대회에서 필리핀과 일본에 이어 3위를 하는 등 아시아권에서도 3위 안팎의 실력이었다.
    
농구인 김영기의 진가는 은퇴 이후 더 빛났다.   

김영기는 33살 때인 1969년 11월, 방콕에서 열린 제 5회 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대회 국가 대표팀 코칭스태프에 합류했다. 보직은 코치였으나 실질적인 사령탑이었고 대표 선수들 가운데 김영일 김인건 신동파 등은 선수 생활을 함께한 직계 후배들이었다. 9개 나라가 출전한 이 대회에서 한국은 개최국 태국에만 93-92로 아슬아슬하게 이겼을 뿐 일본과 자유중국(오늘날의 대만) 등을 가볍게 물리친 뒤 실질적 결승전인 필리핀과 마지막 경기에서 95-86으로 이겨 대회 출전 사상 첫 우승의 기쁨을 누렸다. 필리핀과 경기에서 산동파가 기록한 50점은 신세대 농구 팬들에게 요즘도 화제가 되곤 한다.  

김영기는 신동파를 슈터로 활용하면서도 그에게만 의존하지 않는 공격 전술과 다양한 수비 전술로 한국 남자 농구를 아시아 정상에 올려놓았다. 그 무렵 다른 종목들도 그랬지만 아시아 정상에 오른 농구 대표팀은 김포국제공항에서 서울시청까지 카퍼레이를 벌이는 등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1년여 뒤인 1970년 12월, 역시 방콕에서 열린 제 6회 아시아경기대회에서 김영기가 이끄는 남자 농구 대표팀은 조별 리그에서 이란을 110-77, 홍콩을 116-51로 연파한 데 이어 필리핀을 79-77로 따돌리고 조 1위로 6개국이 겨루는 결승 리그에 올랐다. 한국은 결승 리그에서 필리핀에 65-70으로 잡혔으나 강호 이스라엘을 81-67로 물리쳐 물고 물리는 혼전 속에 금메달의 영광을 안았다. 이스라엘은 1980년대 초 쿠웨이트 등 서아시아 나라에 밀려나기 전까지 아시아 무대에서 활동했다.
 
서울에서 열기로 돼 있다 재정 문제로 반납한 이 대회에서 농구와 축구가 동반 우승하는 쾌거를 이뤄 온 나라가 열광의 도가니가 됐다.  

두 대회 사이에 한국 농구사에 오래도록 남을 또 하나의 기록이 수립됐다. 한국은 1970년 5월 유고슬라비아에서 열린 제 6회 세계남자농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해 11위를 기록했다. 2016년 현재 한국이 올린 세계남자선수권대회 최고 순위다. 이 3차례 대회에 출전한 한국 남자 농구 대표팀의 지휘관이 김영기다. <8편에 계속> 
    

[사진]한국 남자 농구 사상 처음으로 출전한 세계선수권대회 대표 선수들.  김영일 박한 최종규 신동파 이병국 곽현채 윤정근 김인건 이인표 이지영 신현수 유희형(왼쪽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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