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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if] '헐크' 이만수 "최동원 선동열이 없었더라면…"

작성일: 2019.03.11 09:40 이재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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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티비뉴스=인천, 이재국 기자 / 영상 한희재 기자] "만약에요? 만약에요? 하하하."

이만수(61) 헐크파운데이션 이사장(전 SK 와이번스 감독)은 SPOTV 스포츠타임의 '인터뷰 if' 코너에 초대된 뒤 취지를 전해 듣고는 특유의 호탕한 웃음부터 터뜨렸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고 하지만, 우리는 늘 '만약'이라는 가정을 통해 과거를 돌아보고 추억을 반추하곤 한다. '인터뷰 if' 역시 가정법을 통해 레전드들이 만들어온 위업과 역사적 발자취를 다시 한 번 추억해보자는 역설적 의미에서 기획됐다.

▲ 세월은 흘렀지만 헐크의 풍모는 그대로다. 이만수 헐크파운데이션 이사장이 현역 시절 분신과도 같았던 홈런 방망이를 휘두르고 있다. ⓒ한희재 기자
KBO리그 역대 1호 안타, 1호 타점, 1호 홈런의 주인공. 사상 최초 100호 홈런을 돌파한 초창기 슈퍼스타. 프로야구 팬들에게 호쾌한 홈런의 참맛을 일깨워줬을 뿐만 아니라 화려한 세리머니로 프로야구의 인기를 끌어올리는 데 큰 몫을 했다. 때론 느린 발로 상대의 허를 찌르며 도루를 감행해 팬들에게 즐거움도 주기도 했다.

혈기왕성했던 '헐크'도 이제 환갑을 훌쩍 넘었다. 그러나 그의 야구열정은 여전히 뜨겁다. 야구 불모지인 라오스에 야구의 씨를 뿌리고, 국내에서도 자신을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재능기부를 한다. '인터뷰 if'가 촬영된 이날도 인천 재능중의 요청을 받고 재능기부를 하고 있었다. "야구로 받은 사랑, 야구로 베풀겠다"며 나눔의 삶을 몸소 실천하고 있다. "만약에요?" 헐크 이만수와 함께 가정법을 통해 야구 추억여행을 떠나보자.

Q. 만약 포수가 아니었다면?

"투수가 됐을 겁니다. 제가 처음 야구 시작할 때 어깨 힘이 좋다고 해서 중학교 때 투수를 했습니다. 제가 투수했다고 하면 ‘어? 언제 투수했지?’라고 아무도 못 믿을 겁니다. 선동열만큼은 안 됐겠지만, (볼스피드가) 정말 빨랐습니다. 포수를 하지 않았더라면 투수를 했을 거고, 투수를 하지 않았더라면 외야수를 했을 겁니다. 그러나 지금 되돌아보면 모든 포지션 중에 제일 잘한 것이 포수였습니다. 저는 다시 태어난다면,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에 다시 야구를 시작한다면 주저 없이 포수를 할 것입니다."

이만수가 투수로 출발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일반 학생으로 다니다 대구중 1학년 때 뒤늦게 야구에 입문한 그는 강한 어깨를 바탕으로 강속구를 던지면서 투수로 주목 받기 시작했다. 3학년 때인 1974년엔 문교부장관기쟁탈전국중학야구대회에서 투수로 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대구상고에 입학한 뒤 본격적으로 포수를 보기 시작했다. 고교 시절 이영민 타격상을 비롯해 각종 대회 타격상과 최우수선수상을 휩쓸며 최고 타자로 두각을 나타냈다. 한양대 졸업 후 1982년 프로야구 출범을 함께했는데, 1983년부터 1987년까지 5년 연속 포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며 초창기 최고 포수로 이름을 날렸다. 1982년 원년엔 수비율로만 골든글러브 수상자를 가려 김용운(MBC)에게 밀렸지만, 이만수는 그해 사실상 오늘날의 골든글러브격인 베스트10에 뽑혔으니 6년 연속 수상을 한 셈이다. 훗날 역대 최다 포수 황금장갑 수상 기록은 김동수(7회)에게 넘겨줬다.

Q. 내게 KS 우승 반지가 있었더라면?

"지도자로서는 우승 반지를 많이 끼었습니다. 그런데 선수로서는…, 죄송합니다. 한 번도 못 끼어 봤습니다. 만약에 선수 시절 한국시리즈 우승을 했더라면 우리 삼성 라이온즈의 역사가 달라졌을 겁니다. 삼성 기업이기 때문에 지금보다 더 한 발짝 앞선 야구를 하지 않았을까. 더 좋은 야구장에서, 더 좋은 여건에서 야구를 했을 겁니다. 그런데 선수 시절에 우승을 한 번도 못해 가지고 많은 팬들에게 가슴앓이만 많이 하게 해서 정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이만수는 1982년부터 1997년까지 16년간 삼성의 푸른 유니폼을 입었다. 삼성은 항상 우승 후보로 꼽히는 강호였지만 1985년 전·후기리그 통합우승을 차지한 것을 제외하면 그가 선수로 뛸 때 한국시리즈 우승은 해보지 못했다. 이만수뿐만 아니라 초창기 삼성 팬들의 한으로 남아 있다. 그는 메이저리그 시카고 화이트삭스에서 불펜코치로서 월드시리즈 우승(2005년)을 경험했고, SK 수석코치로서 3차례(2007, 2008, 2010년)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 이만수는 원년인 1982년 3월 27일 개막전에서 5회초 KBO리그 역사상 1호 홈런을 기록했다. 마치 끝내기 홈런을 친 것처럼 화려한 세리머니를 하며 그라운드를 달리고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Q. 이만수에게 세리머니가 없었더라면?

"저한테 세리머니를 하지마라 하면 말 그대로 '맡소 없는 찐빵'입니다. 어느 누가 봐도 이만수라고 표현할 수 없었을 겁니다. 물론 그것 때문에 언론에도 많은 질타를 받기도 했고, 또 상대팀 투수한테도 빈볼을 제일 많이 맞아 봤고, 그렇게 맞더라도 저의 세리머니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만수' 하면 떠오르는 것이 '홈런'과 더불어 '세리머니'다. 그는 홈런을 치면 그라운드를 도는 내내 팔짝팔짝 뛰며 손을 하늘로 내지르며 환호했다. 그의 말대로 그래서 상대 팀 투수의 공에 수없이 맞았다. 통산 118개의 사구를 기록했다. KBO리그 최초의 100홈런 타자로 알려졌지만 최초의 100사구 타자 역시 이만수였다.

세리머니를 하다 이런 해프닝도 겪었다. 1988년 4월 19일 사직 롯데전에서 4회에 역대 최초로 '한 이닝 2홈런'을 기록했다. 4회에 홈런을 쳤는데 타자일순 후에 타석이 돌아와 또 홈런을 쳤다. 그런데 역사적인 홈런에 너무 흥분했던 것일까. 그 후 더 큰 일이 벌어졌다. 감격에 겨운 나머지 펄쩍펄쩍 뛰며 특유의 '환호작약 세리머니'를 하다 1루 앞에서 그만 자기 발에 걸려 그라운드에 '꽈당'하고 쓰러지고 만 것. 팬들은 물론 선수들까지 폭소를 터뜨렸다. 그러나 그는 창피함도 잊고 다시 일어서서 팔짝팔짝 뛰며 세리머니를 이어나갔다.

Q. 팬티 세리머니가 없었더라면?

"저는 늘 이야기합니다. 프로야구는 관중이 없으면 존재할 가치가 없다. 팬들이 없으면 선수들의 연봉을 줄 수가 없습니다. 그 당시(2007년) 문학구장에 3만3000명(당시 실제 관중 수용규모는 3만400명)이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평균관중이 5000명(2006년 기준 경기당 평균관중 5256명)밖에 안 들어오더라고요. 제가 보다 못해 선수들에게 농담으로 공약을 했습니다. '문학구장이 만원이 되면 팬티만 입고 한 바퀴 돌겠다' 했는데, 그게 일파만파로 전국으로 퍼지다 보니까 그게 실화가 됐습니다. 세계 토픽감이 됐습니다. 제가 SK에 몸담고 있었기 때문에 SK 와이번스 팀이 다른 팀보다 더 인기있는 팀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다시 팬티 입으라고 하면?) 저는 합니다. 비록 이렇게 나이가 들었지만, 엉덩이가 더 커지고 옆구리가 삐져나왔지만 프로야구를 위한다면 저는 얼마든지 더 할 수 있습니다."

▲ 이만수는 SK 수석코치 시절이던 2007년 5월 26일 문학구장에서 매진시 팬티만 입고 그라운드를 돌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이날 문학구장 개장 후 역대 2번째 만원관중을 기록했다.

Q. 홈런 타자가 아니었다면?

"아무리 타율이 좋아도 단타 선수였다면 지금처럼 많은 팬들이 사랑해줬을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삼진도 많이 당하고, 병살타도 많이 치더라도, 시원한 홈런 하나 때문에 지금까지 저를 많이 아껴주고 기억해주고 사랑해주지 않았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만수는 1982년부터 1997년을 끝으로 은퇴할 때까지 16년 동안 통산 252홈런을 기록했다. 1983년 시즌 최우수선수(MVP)에 선정됐고, 1983∼1985년엔 3년 연속 홈런왕과 타점왕을 차지했다. 1984년엔 사상 최초의 타격 트리플크라운을 작성했다. 1987년 한 차례 더 타점왕에 올랐다.

Q. 프로야구 1호 홈런의 의미는?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 손자까지 굉장히 자부심도 느끼고 자랑할 만도 하고, 프로야구가 없어지지 않는 이상은 첫 안타, 첫 타점, 첫 홈런을 쳤기 때문에 이 역사는 많은 사람에게 잊히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만수는 1982년 3월 27일 서울운동장 야구장(동대문구장)에서 열린 MBC 청룡과 원년 개막전에서 삼성 4번타자로 선발출장해 1회초 2사 2루서 상대 선발투수 이길환을 상대로 좌익선상 2루타를 터뜨려 프로야구 최초의 안타와 타점을 작성했다. 그리고 5회초 선두타자로 나서 유종겸을 상대로 왼쪽 담장을 훌쩍 넘어가는 비거리 120m짜리 솔로홈런으로 프로야구 1호 홈런의 주인공이 됐다. 이만수가 프로야구 초창기 최고 홈런타자이자 최고 인기스타로 가는 서막이었다.

Q. 이만수에게 다른 능력이 있었다면?

"발까지 빨랐으면 어떻게 됐을까. 제가 발까지 빨랐으면 팬들이 더 안 좋아했을 것 같습니다. 뭔가 좀 부족해야지만 팬들이 더 좋아했을 겁니다. 가끔 일 년에 네댓 번 도루를 합니다. 그 광경을 보기 위해서 수많은 팬들이 연호합니다. 발이 빨랐으면 '도루하는 건 당연하다' 이렇게 생각했을 텐데 발이 워낙 느리다보니까 상대 투수나 포수가 무방비 상태로 있고, 제가 한 번씩 도루해서 성공하면 상대 팀도 그렇고, 팬들도 그렇고, 우리 팀 덕아웃이 난리가 납니다."

이만수는 KBO리그에서 16년간 활약하며 통산 52도루를 기록했다. 그가 달릴 때면 재봉틀처럼 열심히 발놀림을 하지만 몸이 앞으로 잘 나가지는 않았다. 한 시즌도 두 자릿수 도루를 기록하지 못했다. 그러나 1985년과 1992년엔 7개의 도루를 성공하기도 했다. 홈런을 칠 때보다 그가 도루를 할 때 팬들은 더 열광했다. 홈런도 홈런이지만, 도루가 곧 팬서비스였다.

▲ 이만수(왼쪽)는 김시진(오른쪽)과 대구상고~한양대~삼성에서 '영혼의 배터리'를 이뤘다. 가운데는 1987년 삼성이 사상 최초 팀타율 3할을 기록할 때 사령탑을 맡은 타격 이론의 대가 박영길 감독.
Q. 이만수와 최고의 배터리는?

"고등학교 때부터 같이 했던 김시진 투수였습니다. 고등학교, 대학교, 프로, 대표팀까지 같이 계속했기 때문에 김시진 투수하고는 사실 사인이 없었습니다. 두 번째는 성준 투수입니다. 성준 투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너무 무릎이 아팠어요. (투구) 템포가 너무 길어서(웃음). 성준 투수에게도 노사인으로 거의 다 받고 했습니다."

이만수와 김시진(현 KBO 기술위원장)은 1958년생으로 동갑내기지만, 이만수가 중학교 때 1년을 유급하면서 더 다니는 바람에 대구상고와 한양대에서 만난 김시진은 학년상 1년 선배였다. 둘은 절친한 친구로 지내고 있는데, 이만수의 아내를 소개해준 이도 바로 김시진이었다. 4년 후배 성준은 인터벌이 가장 긴 투수로 유명했다. 무더운 대구에서 한여름 더블헤더나 낮경기라도 할 때면 수비 시간이 길어져 이만수는 비오듯 땀을 흘려야했다. 그러나 둘은 찰떡궁합을 과시했다.

Q. 가장 까다로웠던 투수는?

"최동원 투수하고 선동열 투수, 이강철 투수하고 조계현 투수였습니다. 이 투수들만 아니었으면 저는 통산타율이 3할3푼은 됐을 겁니다. 이 투수들 때문에 제 통산타율이 3할이 안 됐습니다(0.296).

Q. 최동원 하면 가장 치기 힘든 구종은?

"직구는 괜찮아요. 최동원 선수의 공을 치지 못한 게 커브였어요. 드롭성 커브였어요. 보통 커브는 옆에서 (휘어지면서 아래로 떨어져) 들어오는데 최동원 투수의 커브는 위에서 아래도 떨어지는 커브이기 때문에 치기가 까다로웠습니다. 선동열은 제구가 상당히 좋습니다. 볼 빠른 것도 있겠지만 제구가 너무 좋았어요. 그 다음에 이강철 투수는 분명히 옆구리로 와서 포수에게 왔는데 심판은 스트라이크를 외치더라고요. 조계현은 눈을 봐야하는데 모자를 깊이 눌러 써서 눈도 안 보여요. 조계현 투수만큼 투심을 잘 던지는 선수가 없었어요. 조계현 투수의 그 투심은 미국에 가도 통할 수 있을 정도로 정말 좋았습니다."

Q. 원년 개막전 이종도에게 만루홈런을 맞지 않았더라면?

"이종도 선수한테 만루홈런을 맞지 않았더라면 지금처럼 프로야구가 인기 없었을 겁니다. 점수가 많이 벌어진 상태로 그대로 게임이 끝났더라면 이렇게 인기가 없었을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프로야구가 이렇게 재미있나, 인생 드라마다' 그래서 그때부터 그 좋았던 고교야구의 인기가 그대로 프로야구로 몰리는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원년 개막전에서 삼성은 1회 이만수의 적시 2루타를 포함해 초반부터 5-0으로 앞서 나갔고, 5회에 터진 이만수의 솔로홈런으로 6-2로 크게 리드해 일방적인 승부로 기우는 듯했다. 그러나 이후 MBC의 거센 추격이 시작됐고, 7-3의 스코어는 6회말 백인천의 솔로홈런과 7회말 유승안의 3점홈런으로 순식간에 7-7 동점이 됐다. 그리고 연장 10회말 이종도의 그 유명한 끝내기 만루홈런이 터지면서 MBC의 11-7 대역전 드라마가 완성됐다. 이만수는 당시 포수로 앉아 투수 이선희의 공을 받기 위해 미트를 내밀었지만, 마지막 그 공은 받지 못한 채 왼쪽 담장을 훌쩍 넘어가는 것을 바라만 봐야 했다.

▲ 이만수 헐크파운데이션 이사장은 나눔의 삶의 실천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인천의 재능중 학생들에게 재능기부를 하자 어린 선수들이 매우 좋아했다. ⓒ한희재 기자
Q.나에게 야구가 없었더라면?

"말 그대로 삶입니다. 저에게 야구가 없었더라면 지금처럼 전국을 다니면서 재능기부를 하고 외국에까지 나가서 (재능기부를) 할 수 있었을까…. 저는 평범한 사람밖에 안 됐을 겁니다. 일단 유니폼을 입으면 제가 환갑이지만 환갑이 아닌 청춘으로 되돌아가는 그런 마음입니다. 야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제 삶의 일부분입니다."

Q. 야구팬들에게.

"팬 여러분, 반갑습니다. 많은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팬들하고 인사를 나눌 수 있어서 정말 감사합니다. 지금 우리 프로야구가 여러 가지로 어수선하고 좋지 않지만 그 모든 잘못은 우리 앞선 1세대 야구인들에게 있습니다. 정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다가올 2019년도 프로야구 더 많이 그라운드 찾아서 선수들 격려해 주시고 응원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이만수 헐크파운데이션 이사장이 자신이 직접 야구의 씨를 뿌리고 있는 라오스 유니폼을 입고 천진난만한 미소를 짓고 있다. ⓒ한희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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