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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올림픽 출전사⑥ 민족상잔의 한국전쟁 기간에도 올림픽 출전

작성일: 2016.07.11 07:00 신명철 편집국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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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의 와중인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 출전한 한국 선수들. 김성집(역도) 한수안(복싱) 최윤칠(마라톤) 김창희(역도 왼쪽부터) ⓒ대한체육회
 

[스포티비뉴스=신명철 편집국장]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은 개전 초기 국군이 낙동강 전선으로 밀리는 등 고전했다. 그러나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국군과 UN군은 10월 1일 동부전선에서 38선을 돌파했고 이후 서부전선에서는 압록강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중공군(중국군)의 개입으로 1951년 1월 4일 다시 서울을 빼앗기고 정부는 임시 수도인 부산으로 내려갔다. 

대한체육회는 1951년 6월 17일 부산시 대한상공회의소 사무실에서 정기총회를 열고 다음해로 다가온 헬싱키 올림픽에 대비하는 새 집행부를 구성했다. 1951년 10월 27일부터 닷새 동안 전남 광주시에서 제 32회 전국체육대회가 열렸다. 임시 수도인 부산에서는 경기장을 마련하는 게 쉽지 않아 광주시의 광주서중과 광주고, 광주사범 등 운동장을 중심으로 어렵사리 치러진 이 대회에는 15개 종목에 걸쳐 4천여 명의 선수들이 참가했다. 

1952년 2월 14일부터 25일까지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 겨울철 올림픽에 한국은 선수단을 파견하지 못했다. 이해에 열린 헬싱키 여름철 올림픽 파견 선수단 구성을 둘러싸고 분규는 여전했고 취임한 지 1년도 채 안 된 조병옥 회장은 체육인들이 벌이는 추태에 실망한 나머지 5월 15일까지 회장 직무를 그만두겠다며 물러날 뜻을 밝혔다. 

1952년에 휴전회담이 시작됐다고는 하나 남북이 대치했던 접촉 지역에서는 크고 작은 충돌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지리산 공비 토벌이 한창인 뒤숭숭한 때였으나 이해 1월 에이버리 브런디지 IOC(국제올림림픽위원회) 위원장이 “한국이 헬싱키 올림픽에 참가하기를 바란다”는 뜻을 전해 왔고 국회는 올림픽에 선수단을 파견하라고 정부에 건의했다. 

UN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미군이 한국 선수단 파견 비용 모금 운동을 벌이고 해외 동포들의 성금도 들어왔으며 국회의원들도 세비의 10% 이상을 갹출했다. 5사단 장병들의 480만 원을 비롯해 국군 장병들이 성금을 모았고 미 8군 사령관 제임스 밴플리트 장군은 7천 달러씩 두 차례나 성금을 내놓았다. 정부는 여비를 부담하기로 했으며 서울대학이 140만 원, 내무부가 78만 원을 내놓는 등 거국적으로 성금이 모아졌다.

육상과 역도, 복싱, 레슬링, 승마, 사이클 등 모두 44명의 선수단이 최순주 단장 인솔 아래 6월 12일 부산 수영비행장에서 항공편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머문 뒤 6월 30일 헬싱키에 도착했다. 

헬싱키 올림픽에는 소련을 비롯해 공산화된 동유럽 여러 나라들이 처음으로 출전했으나 중국(중화인민공화국)과 북한은 출전하지 않았다. 소련은 자기네 선수들이 서방 자유 국가 선수들과 접촉을 원하지 않으니 공산권 국가의 선수촌을 따로 지어 달라는 억지를 부리기도 했다.

1952년 7월 19일부터 8월 3일까지 열린 헬싱키 올림픽에서 한국은 역도 미들급의 김성집과 복싱 밴텀급의 강준호가 각각 동메달을 차지했다. 김성집은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올림픽 메달을 2개 차지한 선수가 됐고 마라톤에서는 최윤칠이 올림픽 기록을 깨뜨리고도 3위인 구스타프 얀손(2시간 26분7초)에게 29초 뒤져 메달 획득에 실패했다. ‘인간 기관차’로 불린 체코슬로바키아의 에밀 자토펙(2시간 23분3초)이 마라톤 금메달을 차지했다. 자토펙은 5,000m와 1만m에서도 우승해 육상 장거리 3관왕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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