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상호 감독. 출처ㅣ고 강수연 영결식 생중계 캡처
▲ 연상호 감독. 출처ㅣ고 강수연 영결식 생중계 캡처

[스포티비뉴스=강효진 기자] 배우 강수연의 유작이 된 '정이'의 연상호 감독이 강수연을 떠나보내며 추도사를 전했다.

故강수연의 영결식이 11일 오전 10시 서울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영결식장에서 엄수된 가운데, 영화진흥위원회 유튜브를 통해 생중계됐다.

연상호 감독은 "2011년 내가 만든 독립 장편 애니메이션 부산영화제 초청돼 영화제를 방문했다. 운 좋게 몇개의 상을 받았다. 시상식이 끝나고 제 작품 프로듀서와 담배를 피우고 있을 때 한 관계자가 저를 불렀다. 저는 그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만났는데, 저에게 엄청나게 열정적으로 영어로 이야기했다. 저와 프로듀서는 영어를 전혀 할 줄 몰라서 '아이 캔트 스피크 잉글리시'라고 했는데 지나가던 강수연 선배님이 칸 영화제 관계자의 이야기를 통역해주셨다. 아직 그 이야기가 기억나지 않지만 다만 하나의 의문만 남아있다. 어째서 한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배우가 통역을 자처하셨을까 하는 것이다. 강수연 선배님은 영화제 일을 하며 한국 영화가 세계에 알려지길 바라며 자기 일처럼 하셨다. 마치 그 자신이 한국영화인 것처럼. 앞서 이야기했던 그 의문의 답은 강수연 선배가 그 자체로 한국영화였기 때문이다"라고 그와의 추억을 되새겼다.

이어 "몇년 전쯤 한 영화를 기획했다. 한국에선 아직 잘 시도되지 않는 SF 장르였다. 새로운 시도여서 두려움도 컸다. 도대체 어떤 배우와 이 시도를 해야할까 했다. 그 때 머리속에 떠오른 배우가 강수연 선배님이다. 한국영화 아이콘이자 독보적인 배우 강수연과 함께 해야했다. 그 생각이 떠오르자 다른 배우는 떠오르지 않았다. 용기를 내서 강수연 선배님께 시나리오 보내드리고 선배님이 '그래 한 번 해보자' 하셨을 때 저는 뛸듯이 기뻤다 마치 저에게 든든한 빽이 생긴 것 같았다. 당시에도 강수연이란 거대한 배우가 제가 이렇게 각별한 사이가 될 줄 몰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영결식이 끝나고 제가 강수연 선배님과 영원한 작별을 하는 대신 다시 작업실로 돌아가 얼굴을 마주하고 강수연 선배님과 함께하는 새 영화에 대해 고민해야한다. 배우 강수연의 연기는 아직도 진행중이다. 한국 영화 그 자체였던 선배님. 선배님 저는 선배님의 마지막 영화를 함께하며 선배님을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선배님의 새 영화를 선보이기 위해 끝까지 동행합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제가 선배님의 든든한 빽이 되어드리겠습니다"라고 덧붙였다.

1966년생인 故 강수연은 1980~1990년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대배우다. '씨받이'로 1987년 베니스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고, 1989년 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서 '아제아제바라아제'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한국 최초의 '월드스타'로 전세계에 한국영화를 알렸다.

고인은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1987) '지금 우리는 제네바로 간다'(1987)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1989), '경마장 가는 길'(1991), '그대안의 블루'(1992),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1995), '처녀들의 저녁식사'(1988) 등 숱한 히트작과 화제작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2001년 드라마 '여인천하'로 안방극장에서도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2015~2017년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을 지내는 등 문화행정가로도 활약했다. 유작은 지난 1월 촬영을 마친 십 여년 만의 연기 복귀작인 넷플릭스 영화 '정이'다.  

고 강수연은 지난 5일 오후 뇌출혈을 일으켜 심정지 상태로 병원에 이송됐다. 쾌유를 비는 기도와 응원에도 의식을 되찾지 못한 채 사흘째인 지난 7일 만 55세라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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