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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올림픽 출전사 ⑮또다시 ‘반쪽 대회’, 그러나 한국 스포츠 세계 10강에 오르다

작성일: 2016.07.20 10:40 신명철 편집국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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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유도 95kg급 금메달리스트 하형주가 결승전에서 브라질의 더글라스 비에이라에게 굳히기 공격을 하고 있다. ⓒ대한체육회

[스포티비뉴스=신명철 편집국장]1984년 여름철 올림픽을 열게 된 로스앤젤레스는 전 대회인 모스크바 올림픽이 미국과 미국의 뜻을 지지하는 나라들이 대거 불참해 반쪽 대회가 된 데 따른 부담을 안고 있었다. 게다가 올림픽이 열리기 1년 여 전인 1983년 9월 대한항공 여객기가 소련 전투기의 미사일 공격을 받아 탑승객 269명 전원이 숨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이 되면서 소련의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참가는 이뤄지는 듯했다. 그러나 해가 바뀌면서 상황이 묘하게 바뀌었다. 1984년 3월 소련이 올림픽 아타셰로 임명한 인물에 대해 미국 국무부가 "KGB 스파이 같다"는 이유로 입국사증 발급을 거부하자 소련의 대회 불참 움직임이 본격화됐다.

4월 들어 마라트 그라모프 소련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은 입국사증 발급 거부 문제와 관련해 미국의 올림픽 헌장 위반을 지적하며 IOC(국제올림픽위원회)의 개입을 요청했다. IOC와 소련, IOC와 로스앤젤레스올림픽조직위원회(LAOOC) 그리고 3자 회동이 연쇄적으로 있었고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IOC 위원장은 소련의 참가를 긍정적으로 내다봤다. 

그러나 성화의 미국 내 봉송이 시작된 5월 8일 소련올림픽위원회는 "선수들의 안전을 위협 받는 상황에선 로스앤젤레스 대회에 참가할 수 없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불가리아와  동독, 체코슬로바키아 등 동유럽 나라들이 소련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루마니아와 중국은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1949년 새로운 국가 체제를 수립한 중국은 로스앤젤레스 대회를 통해 올림픽 무대에 데뷔했다. 최종적으로 16개국이 불참한 가운데 사상 최다인 140개국 6천700여 명의 선수단이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 출전했다. 모스크바 올림픽에는 80개 나라가 참가했다. 

피터 위베로스 LAOOC 위원장은 송화 봉송 주자에게 참여비를 받는가 하면 중계권료의 대폭 인상과 스폰서 유치 등으로 수입을 늘리고 대학교 기숙사를 선수촌으로 사용하고 경기장은 기존 시설을 최대한 활용하는 등 지출은 최대한 줄여 중앙정부나 주 정부의 재정 지원 없이도 2억1,500만 달러를 남겼다. 위베로스는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른 경력을 바탕으로 올림픽이 끝난 뒤 두 달 뒤 미국 프로 야구 메이저리그 커미셔너로 선임됐다. 

1984년 한국 스포츠의 최대 행사도 로스앤젤레스 여름철 올림픽이었다. 한국은 다음 대회 개최국으로 일정 수준 이상의 성적을 올려야 했다. 7월 28일부터 8월 12일까지 열린 이 대회에 한국은 임원 78명과 선수 210명 등 288명의 역대 최대 규모의 선수단을 파견했다. 

대회 개막에 앞서 7월 26일 열린 IOC 총회에서 박종규 대한사격연맹 회장이 한국인으로는 다섯 번째로 IOC 위원으로 선임됐다. 이 총회에서 노태우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위원장은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과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의 상처를 서울 올림픽에서 치유한다는 신념으로 대회 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고 서울 올림픽에 참가하는 모든 국가 선수와 임원의 안전을 보장한다"고 밝혔다.     

한국은 이 대회에서 역대 대회에서 거둔 금메달 1개와 은메달 6개, 동메달 11개를 단숨에 뛰어넘는 금메달 6개와 은메달 6개, 동메달 7개의 성적을 올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호주 등을 따돌리고 종합 순위 10위에 자리를 잡았다. 소련 등 동유럽 나라들이 불찬한 가운데 올린 전적이지만 그동안 쌓아 온 한국 스포츠의 잠재력이 폭발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유도는 이 대회에서 효자 종목으로 화려하게 등장했다. 8명의 선수가 출전해 금메달 2개와  은메달 2개, 동메달 1개로 한국이 종합 순위 10위를 차지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유도는 처음으로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1964년 도쿄 대회에서는 4개 체급이 진행됐으니 이 대회에서는 8개 체급이 펼쳐진 가운데 종주국을 자처하는 일본이 금메달 4개를 획득해 여전히 강세를 보였다. 그러나 소련 등 동유럽 나라들이 출전하지 않은 데다 한국이 2개, 서독과 오스트리아가 1개씩 금메달을 잠식해 일본의 독주 시대가 머지않아 끝날 수 있다는 조짐을 보였다.  

95kg급에 출전한 하형주는 호쾌한 기술로 금메달을 목에 걸면서 그때까지만 해도 스포츠 팬들의 눈길을 크게 끌지 못하고 있던 유도를 관심 종목으로 끌어올렸다. 1회전에서 도미니카공화국의 존 애덤스를 밭다리후리기 한판, 2회전에서 캐나다의 조 멜리를 모두걸기 유효로 가볍게 물리친 하형주는 8강전에서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일본의 미하라 마사토를 씨름 기술을 응용한 들어메치기 절반 두 번 합쳐 한판으로 내리꽂고 4강에 올랐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93kg급(95kg급 조정 이전 체급) 은메달리스트 군터 노이로이터(서독)와 벌인 준결승은 사실상 결승전이었다. 하형주는 허리튀기로 공격하다 되치기로 효과를 빼앗긴 뒤 경기 종료 35초를 남길 때까지 이렇다 할 기술을 걸지 못해 결승 문턱에서 주저앉는 듯했다. 그러나 이 순간 하형주의 발목받치기 유효가 성공했다. 3위~5위 결정전으로 밀릴 뻔했던 하형주는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고 결승에 올랐다.

두 명의 금메달 후보를 꺾은 하형주에게 결승 상대인 브라질의 더글라스 비에이라는 적수가 되지 못했다. 경기 내내 웅크리고 도망만 다니던 비에이라는 판정으로 경기가 끝난 뒤 한판으로 지지 않은 것에 만족했는지 기뻐했다. 하형주는 올림픽 금메달 이후 1985년 도쿄 유니버시아드대회, 1986년 서울 아시아경기대회에서 잇따라 우승하는 등 1980년대 한국 유도 중(重)량급의 간판 선수로 활약했다.

71kg급의 안병근은 1회전에서 아일랜드의 키어런 폴리를 곁누르기 한판, 2회전에서 엘살바도르의 후안 바르가스를 업어치기 절반 두 번 합쳐 한판으로 누인 뒤 8강전에서 1983년 세계선수권자인 일본의 나카니시 히데토시에게 주의승을 거두고 금메달로 가는 고비를 넘어섰다. 안병근은 준결승에서 영국의 케리스 브라운을 가로누르기 효과로 물리친 뒤 결승에서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이탈리아의 에치오 감바를 업어치기 효과와 누르기 효과로 꺾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굳히기 기술이 강했던 안병근은 이후 1985년 서울 세계선수권대회와 1986년 서울 아시아경기대회에서 우승하며 1980년대 한국 유도 중(中)량급의 대표 주자로 매트를 호령했다.  

전해인 1983년 세계청소년유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19살의 신예 김재엽은 패기 있게 금메달에 도전했으나 60kg급 결승에서 일본의 호소가와 신지에게 누르기 한판으로 져 올림픽 금메달의 꿈을 4년 뒤인 서울 올림픽으로 미뤄야 했다. 65kg급의 황정오는 은메달, 95kg이상급의 조용철은 동메달을 보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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