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이에 '자산어보'를 찍어 다행" 사극명장 이준익 감독의 고백[인터뷰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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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익(62) 감독이 돌아왔다. '왕의 남자'(2005)로 사극 최초의 1000만 신화를 쓴 그는 '사도'(2015), '동주'(2016) '박열'(2017)을 통해 시대와 사람을 조명해 온 연출자다. '동주'로 윤동주와 송몽규를, '박열'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를 조명한 그의 신작은 바로 '자산어보'다.
31일 개봉하는 이준익 감독의 신작 '자산어보'는 흑산도로 유배된 뒤 책보다 바다가 궁금해진 학자 정약전(설경구)와 바다를 벗어나 출셋길에 오르고 싶은 청년 어부 창대(변요한)가 함께 책을 집필하며 벗이 되어가는 이야기다. 감독은 한국사의 스타 중 하나인 정약용 대신 그의 형이자 어류학서 '자산어보'를 쓴 정약전을 주인공 삼고, 그와 함께한 어부 창대를 조명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정약용을 드러내보인다. 이를 통해 조선시대의 근대성을 조명하고 싶었다고 이준익 감독은 말했다. .
코로나19의 와중에 관객과 만나는 '자산어보'는 극장의 거대한 화면으로 마주할 가치가 분명한 작품이다. 흑백으로 넘실거리는 선명한 화면은 지루할 새 없이 역동적이다. 무엇보다 이 만만찮은 주제와 사연을 '쉽고 재미있게' 담아낸 데서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무르익는 감독의 시선과 내공이 드러난다. 이준익 감독은 설경구 변요한 이정은을 비롯해 적재적소에서 영화의 힘이 된 배우들에게 그 공을 돌렸다. 누구와도 친구가 되어 어우러지는 이준익이란 감독 자체가 나이와 신분을 넘어 뜻과 우정을 나눈 사람들의 이야기 '자산어보'에 녹은 듯 했다.

"준비는 5년 전에 했다가 덜 돼서 엎었다. 작가가 달랐다. 사극을 많이 찍었지만 가장 건드리기 힘든 곳이 조선의 근대성이다. 갑오개혁, 신민지 근대화, 정조 개혁정책 등 다 이야기가 다르다. 사극영화 만들면서 도전하고 싶은데 조심스러운 대목이었다. 이것을 사건으로 다루지 않고 사연으로 다루면 어떨까 했다. 국가주의 집단주의의 시각보다는 개인의 시각으로 찾아보면 아무래도 인물에 집중하게 됐다.
가장 크게 다가왔던 것이 동학이었다. 왜 동학인가 하다보니 앞에 서학이 있고 또 북학이 있더라. 개인이 꿈틀거린 조선의 근대가 이것이구나 하며 서학에 관심이 갔다. 처음엔 황사영이란 인물이 돋보였다. 그가 쓴 백서가 극단적이기도 하다. 그러다 준비가 안 돼서 엎었고, '사도' '동주'를 찍었고 '변산'이 망(!)했다. 초심으로 돌아가 집중하다보니 그제야 '자산어보'와 정약전이 보였다. '변산' 김세겸 작가가 자기가 써보면 안되겠냐더라. 김 작가가 성균관대 동양철학과를 나왔는데 덕분에 성리학을 바탕에 두고 인물이 움직인다. 영화를 위한 설정이 아니라 그 시대 인물을 위한 인문학적 토대가 됐다. 작가의 힘이다. 사극을 사건이나 영웅, 스펙터클로 다루지 않고 선비와 민초로 다루게 됐다. 쉽지는 않다."
-언급하셨다시피 사극의 스타는 따로 있다. 왜 널리 알려진 정약용과 '목민심서'가 아니라 정약전과 '자산어보'였나.
"사극은 역시 '인싸'다(웃음). 광해군 연산군 사도세자 다 사극계 '인싸'고 정약용만 해도 '인싸'다. 정약전은 '아싸'고 창대는 '아싸' 중이 '아싸'다. 사실 정약용이 오래 살았다. 그 이야기를 하려면 16부작 드라마는 해야 된다. 2시간으로 응축하기에 정약전이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영화란 시간예술의 물리적 이유가 다는 아니다.
정약용만 그려서 그를 선명하게 드러내긴 어렵다. 동주를 위해 몽규를 선명하게 그리듯(영화 '동주') 또 박열을 위해 후미코를 선명하게 그리듯(영화 '박열') 한 인물만을 우상화하는 대신 동시대의 가치를 지닌 다른 인물을 뒀다. 정약용 옆에는 정약전이 있었다. 정약전은 정약용이 '목민심서'부터 초고를 보내고 의견을 구하는 등 많이 의지한 사람이지만 둘의 결과물에는 편차가 있다. '목민심서'가 인문학서이자 사람에 대한 연구라면 '자산어보'는 자연과학이다. 어부들이 종사하는 물질의 세계로 세상을 이롭게 하기 위해 쓴, 실사구시의 실천서인 셈이다. 그렇게 드라마를 짰다. 게다가 정약전은 '자산어보'를 혼자 쓰지 않았다. 서문에도 본문에도 '창대'가 이렇게 말했다고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다. 200년 전 상놈의 이름을 그렇게 적시한 선비, 정약전의 인격도 대단하다. 그 자체가 근대성이다. 수직적 신분제에 얽매이지 않는 수평적 사고가 있었다. 개인의 사회가 어떻게 존중받으며 실제로 구현되는가를 그리고 싶었다."
-그래서 창대의 이야기가 주로 나오지만 동시에 정약용의 세계관을 함께 본 느낌이 든다.
"그건 창대의 지향성이 정약용과 맞닿아 있으니까. 저는 황사영을 떠올렸다. 16살에 급제해 정조가 직접 악수를 했다는 천재다. 정약전 배다른 형의 사위니까 몹시 가까운 셈인데, 천주교도로 20살에 능지처참을 당했다. 약전이 보기에 총명한 창대가 황사영 같지 않았을까 생각도 했다. 극중 황사영은 김준한이 연기했다."

"쉽게 접근해야 한다. 쉽다는 것은 추상적이다. 내가 재미를 느낄 때 쉽게 공감할 수 있고 쉽게 전달할 수 있다. 재미란 웃음이다. 그건 온전히 배우들의 몫이다. 그 역량 덕에 관객이 애정어린 눈으로 볼 수 있었다. 배우들의 덕이다."
-'소원'을 함께 했던 설경구가 먼저 시나리오를 달라고 해서 '자산어보'에 출연했다고 했는데.
"감독 입장에선 행복한 일이다. 연기력 뛰어난 배우가 지나가다 감독에게 '감독님 책 주세요' 하면 얼마나 행복한가. 알다시피 캐스팅이 쉽지 않다. 얼마나 우여곡절이 많나. (아동성폭력 사건 피해자 가족을 그린) '소원'과 비교하면 너무 편안했다. 그때는 소재의 불편함이 있었다. 일상의 긴 대화를 하는 것이 어색했다. 잡담 해 본 적이 없다. 이번에는 설경구가 유배를 왔음에도 불구하고 섬사람이 가지고 있는 투박하지만 정겨운 정서에 녹아들었다. 설경구를 보면 굉장히 천진난만하다. 배우는 캐릭터에 맞게 녹아나는 것 같다."
-설경구가 유배 온 정약전을 강건하면서도 사람냄새 물씬 나는 인물로 그려냈다.
"푸근한 캐릭터는 설경구의 몫이다. 이미 시나리오에 구현돼 있기에 나는 부연설명하지 않는다. 배우가 느끼는 대로 진심을 다하면 그것이 캐릭터다. 그 배우가 어제오늘 주연배우 하는 사람인가. 나보다 잘 안다. 예전에 보던 설경구의 모습이 아니라고 몇몇 사람이 극찬을 하더라. 그의 잠재력이 100이라면 아직 50~60정도 쓰다가 안 쓰던 40~50이 나온 셈이다. 첫 사극이고 한복 입고 수염 붙이고 상투 틀며 외면이 내면을 끄집어내는 데 주효했을 것이다. 더 큰 것은 실존인물이라는 점이다. 배우가 실존인물을 연기할 때는 기교를 쓸 수가 없다. 강하늘이 윤동주를 연기하는 데 잔머리를 쓸 수 없다. 박정민이 송몽규를 연기하는데 무슨 재주를 피울 수 있겠나. 박열이나 후미코, 사도도 마찬가지다. 온 힘을 다해 진실되게 연기하는 것 말고는 답이 없다. 배우가 살얼음을 걷듯이 조심스럽게 연기할 수밖에 없다. 함부로 콘셉트를 드러내려고 욕심을 부리면 얼음에 금이 가고 인물을 물에 빠뜨리게 된다. 저는 설경구 본래의 내면이 나왔다고 본다. 그 롤에 충실한 연기가 아니라 그냥 설경구의 내면의 것을 드러내는데, 선비의 옷을 입었으니 선비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반면 변요한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을 바탕으로 많은 것을 창조해냈다.
"그 역시 온전히 변요한의 몫이다. 변요한이란 배우가 지난 10년간 열심히 활동을 하면서 갈고 닦은 실력이 포텐이 터진 것이 아닌가 한다. 변요한을 캐스팅하자고 제안한 건 설경구다. '감시자들'에서 만났다는데, 그간 그 잠재력을 높이 평가한 거다. 나는 정보가 부족한 상태였는데 이미지가 착 붙더라."
-변요한은 '자산어보' 시사회가 끝난 뒤 펑펑 울었다고 고백해 화제가 됐는데.
"진심으로 현장에 임했던 데 대한 것이 아니었을까. 이후에도 다른 영화를 했지만 타임머신을 타고 '자산어보'로 돌아와버렸다. 그만큼 온몸의 세포를 다해 했던 것들이 영화를 보며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뜨거운 태양 아래, 59년 만에 오는 태풍을 세 번 이겨내는 촬영기간 내내 변요한은 집에 한 번도 안 들어가고 숙소에만 있었다. 항상 창대 안에만 있었던 것이다. 변요한뿐이겠나. 박정민 강하늘 유아인 등 30대 배우들은 상상 이상으로 자신에게 가혹하게 연기에 임한다. 그러니까 그런 연기를 볼 수 있다. 그들은 예술가다. 극장에서 돈을 내고 시간을 내서 영화를 본다는 것은 배우라는 예술가의 노동의 값을 치르는 것 같다."

"이정은은 생각을 하고 있었고, 설경구도 추천했다. 영화를 준비하며 미리 캐스팅을 잘 정해놓지 않는다. 한 사람을 제안해 성사되면 의논하며 만들어 간다. 그래야 관점의 선명성이 흐트러지지 않는다. 어렵고 복잡한 이야기가 쉽게 느껴지는 건 캐스팅의 절묘한 수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중요한 순서대로 앙상블을 맞춰가는 거다. 가거댁은 그 집에 정약전이 들어가면 정약전 집처런 느껴질 만큼 어마어마한 포용력을 보여줘야 한다. 이정은은 당대 최고의 포용력을 지닌 배우다."
-여러 배우들이 우정출연으로 참여했다. 정약용 역의 류승룡 역시 묵직한 존재감을 보여주고 조우진 등도 적재적소에서 활약했다.
"정약전이 설경구인데 정약용이 모르는 사람이 나오면 감정이입이 안 된다. 설경구 못잖게 익숙한 배우가 나와야 하는데 마땅치 않다. 우정 출연인데 대체 누구를 캐스팅해야 하나. 요새 기분이 제일 좋은 배우가 누구지? 했다. 당시가 '극한직업'이 1000만을 찍었을 때다. 설경구가 '승룡이네' 했고 류승룡에게 시나리오를 줬다. 보지도 않고 10분 만에 전화가 와서 한다는 거다. 이 영화에 류승룡이 큰 베품을 한 것이다. 나주에서 악수하고 헤어질 때 형님을 보내는 마음이 확 오지 않나. 류승룡 아니면 누가 하겠나. 조우진도 계속 등장하지만 촬영은 딱 나흘을 했다. 그런 캐릭터가 어디 있나. 아직 흑산도에 있을 것 같다."
-배우 이야기를 좀 더 하자면, 연이어 작업한 차순배는 마치 이준익의 숨겨진 페르소나 같다. 민도희도 찰떡이다.
"차순배는 '평양성' 때부터 시작해서 '사도'에서 비중있게 나오고 '변산'에도 나왔다. 연기가 굉장히 편안하다. 어디에 있어도 쓰임새가 잘못되는 경우가 없는 배우다. 민도희가 맡은 복례도 중요하다. 오디션을 많이 봤는데 대체 불가였다. 오리지널 흑산도 섬 처녀 역할을 해 주니 창대도 살아난다. 창대를 바라보는 시선도 민도희의 입에서 나온다.
이 모든 조합이 영화를 쉽게 하려는 캐스팅이다. 어려운 이야기가 어렵지 않게 느껴지는 건 배우들의 힘이다. 그 덕을 많이 봤다."

"'동주'에 현대시가 있다면 '자산어보'에는 한시가 나온다. '동주'의 시와 약전의 시는 닮았다고 생각한다. 정약용이 책에 써 놨다. '시대를 아파하지 않는 시는 시가 아니다.' 정약용의 대표시인 '애절양'은 장면화해서 클라이막스로 썼다."
-흑백영화지만 컬러영화 못잖게 역동적이라는 점도 '자산어보'의 큰 매력이다.
"'자산어보'는 흑백이지만 우당탕탕하고 다이나믹하다. 흑백이기 때문에 단점이라 생각했던 염려가 장점으로 전환되는 순간 다 좋아보이는 효과가 있다.(웃음) 과거 흑백영화가 기술이 덜 발달했을 때의 표현 방식이었다면 이젠 흑백이 옛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이 됐다. '동주'는 시커멓고 어두운 공기가 있다면 이번엔 섬과 바다와 하늘이 있고 섬 사람의 다정함이 밝고 장쾌하게 담겨 있다. 흑백이라 시선을 뺏는 것이 없으니 움직임만이 보이고 감정이 전해진다. 스스로 내 영화를 피해다닌 점도 있다. 컬러 사극을 많이 찍었으니까, 이번엔 흑백으로."
-나이와 신분을 뛰어넘어 어부 창대와 스스럼없는 우정을 나누는 정약전의 모습은 이준익 감독과도 겹쳐 보이는 데가 있다.
"나이를 먹어 그렇다. 설경구가 지천명 아이돌 되듯이(웃음) 나이 예순이면 이순이 된다. 귀가 순해진다. 내가 나이를 먹어 찍을 수 있는 영화가 아닌가 한다. '황산벌'이나 '왕의 남자' 때라면 다르게 찍었을 수 있다. 보다 뜨겁게. '구름을 버서난 달처럼'을 지금 찍는다면 조금 더 관조적으로 찍을 것 같다. 그때보다 좀 덜 과격하고 덜 미숙할 뿐이다. 정약전이 58세에 죽었다. '자산어보'를 찍을 때 내 나이가 60이었다. 정약전의 나이에서 세상을 보는 눈을 따라갈 수 있었다. 이 나이에 '자산어보'를 찍어 다행이다."

스포티비뉴스=김현록 기자 roky@spotv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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