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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올림픽 출전사⑦ 대회 사상 처음으로 남반구에서 열린 올림픽…송순천 첫 은메달

작성일: 2016.07.12 09:31 신명철 편집국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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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6년 멜버른 올림픽 복싱 밴텀급에서 은메달을 차지한 송순천(오른쪽) ⓒ대한체육회

[스포티비뉴스=신명철 편집국장] 제 16회 여름철 올림픽은 1956년 11월 22일부터 12월 8일까지 호주 멜버른에서 열렸다. 올림픽이 남반구에서 열리기는 이 대회가 처음으로 하계 올림픽은 여름철에 열리게 마련이나 남반구인 호주의 여름은 북반구의 늦가을과 겨울 사이로 멜버른 올림픽은 11월과 12월에 걸쳐 열렸다.

승마 경기만은 1956년 6월 10일부터 17일까지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미리 치러졌다. 승마 경기만 따로 떼어 스톡홀름에서 연 것은 축산국인 호주의 동물 검역이 매우 까다로워 승마 경기용 말의 호주 반입이 쉽지 않아 검역이 까다롭지 않은 스웨덴을 개최지로 골랐기 때문이다.

한국은 이상백 단장 인솔 아래 7개 종목에 49명의 선수단을 파견했다. 한국은 이 대회 복싱 밴텀급에서 송순천이 올림픽 출전 사상 첫 은메달을 획득했다. 복싱은 늘 편파적인 판정이 말썽이지만 당시 심판이 공정했더라면 송순천은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됐을 것이라는 여론이 높았다.

송순천은 타고난 복서였다. 송순천은 멜버른 올림픽 1년여 전인 1955년 4월 성북고 2학년에 재학하고 있던 고교생의 몸으로 한국체육관을 찾아 복싱을 시작했다. 그해 가을에 열린 멜버른 올림픽 파견 복싱 1차 선발전은 송순천의 KO 퍼레이드를 보는 것 같았다. 송순천은 5차례 경기를 모두 KO로 이겨 보는 이들을 놀라게 했으며 모두 4차례의 선발전에서 우승해 멜버른행 비행기를 탔다. 

멜버른에서 송순천이 다른 4명의 복싱 선수와 함께 훈련하다 호주 선수들과 치른 스파링에서 경량급인 송순천이 호주의 헤비급 선수를 다운시키는 장면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경악했다. 때마침 세계적인 복싱 전문 잡지 ‘링’의 창설자인 미국의 내트 를레이셔가 그 광경을 보고 놀라 송순천에게 “올림픽이 끝난 뒤 당신이 원한다면 미국으로 데려가 세계적인 프로 복서로 키워 주겠소. 당신 같으면 틀림없이 챔피언이 될 수 있소”라고 제의하기도 했다.

복싱 경기가 시작되자 송순천의 상대들은 그의 강타를 피해 꽁무니 빼기에 바빴고 결승에 오른 송순천은 독일(1956년부터 1964년까지 동·서독은 단일팀 구성)의 볼프강 베렌트와 마주쳤다. 송순천은 결승전이 시작되자마자 적극적인 공세를 펼쳐 마지막 3라운드까지 우세가 이어졌다. 경기 종료 1분을 남기고 베렌트의 사력을 다한 반격이 있었으나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경기가 끝나고 판정이 내려지기 전까지 관중들은 “코리아! 코리아!”를 소리 높이 외치며 송순천의 승리를 예상했다. 그러나 판정은 베렌트의 승리였고 억울하긴 하지만 송순천은 한국 최초의 올림픽 은메달리스트가 됐다.

관중들의 열렬한 박수갈채를 받으며 링에서 내려온 송순천은 “졌다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는다. 나뿐만이 아니라 동양 선수들은 한결같이 억울한 판정을 받았다. 나와 싸운 대부분의 선수들이 KO되지 않은 것은 심판의 잘못 때문이다. 그렇게 붙들고 늘어져도 실격시키거나 벌점을 주지 않은 건 분명히 규칙에 어긋난 처사다”며 분개했다. 유럽세가 주도권을 잡고 있던 심판진은 올림픽 때마다 편파적인 판정으로 말썽을 일으켜 ‘올림픽 복싱의 역사는 편파적 판정의 역사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베렌트는 독일 단일팀으로 출전했으나 동독 선수였으며 그는 올림픽이 끝나고 귀국한 뒤에도 두고두고 한국의 송순천을 잊을 수 없었다. 7년이 지난 1963년 베렌트는 서독에 사는 친구를 거쳐 대한체육회로 송순천에게 편지를 보냈다. 베렌트는 편지에서 “그날의 결승전, 그리고 당신을 잊을 수가 없다. 그때 게임은 당신이 이긴 것이었다. 서독의 친구를 통해 당신이 최근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미리 알았더라면 선물이라도 보냈을 텐데··1964년 도쿄 올림픽에서 꼭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우승자인 베렌트 자신이 송순천의 승리를 인정했을 정도였으니 송순천이 금메달을 놓친 것은 편파적 판정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4살의 노장인 역도 라이트급의 김창희는 동메달을 차지했다. 김창희는 경기가 끝난 뒤 “올림픽 선수촌의 식사가 좋아 멜버른에 도착한 뒤 날이 갈수록 체력이 늘어나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한국전쟁으로 당시는 거의 모든 선수들이 충분한 영양 섭취를 못한 상태에서 올림픽에 출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창훈은 12월 1일 열린 마라톤에서 2시간28분45초로 4위를 기록했다.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서 4위를 차지한 최윤칠에 이어 한국 마라톤은 올림픽에서 2회 연속 4위를 한 것이다. 이창훈은 37km 지점에서 1952년 헬싱키 올림픽 우승자 에밀 자토펙(체코슬로바키아)을 제치고 있는 힘을 다해 달렸으나 3위인 핀란드의 베이코 카르보넨이 기록한 2시간27분47초에 58초가 늦어 동메달을 놓쳤다.  이창훈은 2년 뒤 1958년 도쿄 올림픽에서 우승해 올림픽 메달 불발의 아쉬움을 달랬다.    

1948년 런던 대회 이후 두 번째로 올림픽에 출전한 남자 농구는 순위 결정전에서 싱가포르에 79-92로 지는 등 15개 출전국 가운데 14위에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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