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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올림픽 출전사 ⑱되살아난 올림픽 유치 작업의 불씨

작성일: 2016.07.23 12:54 신명철 편집국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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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예식 KOC 전문 위원(가운데)이 올림픽 유치 신청서를 IOC 직원에게 전달하고 있다. ⓒ대한체육회

[스포티비뉴스=신명철 편집국장] 문교부 장관의 보고를 받은 전두환 대통령은 ‘전임 대통령이 국내외적으로 올림픽 유치를 공표한 마당에 특별한 사유 없이 이를 변경할 수 없을 뿐더러 역사적인 사업을 추진해 보지도 않은 채 패배 의식에 사로잡혀 포기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유치 추진 의사를 밝히자 문교부는 올림픽 유치 의사를 IOC(국제올림픽위원회)에 통보하라고 KOC(대한올림픽위원회)에 지시했다. 정부의 올림픽 유치 계획을 재확인한 KOC는 1980년 12월 3일부터 인도 뉴델리에서 열리고 있는 AGF(아시아경기연맹, 아시아올림픽평의회 OCA 전신) 총회에 참석하고 있는 조상호 위원장에게 정부 방침을 긴급하게 알린 한편 스위스 로잔에 있는 IOC 본부에 "KOC는 1988년 하계 올림픽 개최 후보 도시로 서울시를 지지하며 문서에 의한 신청서는 추후 제출 하겠다"고 타전했다. 이에 따라 IOC는 1980년 12월 4일 한국 서울시와 일본 나고야시가 1988년 하계 올림픽 유치 신청 도시가 됐다고 발표했다.

IOC는 1980년 12월 5일 151쪽에 이르는 설문서를 KOC에 보내는 한편 서울시의 올림픽 유치 신청서와 KOC의 서울시 지원 확인서 그리고 정부 책임자가 서명한 올림픽 유치 보증서를 제출하도록 요청했다.문교부는 서울시, 대한체육회와 대책협의회를 갖고 유치 신청서 작성의 주관 부처와 합동작업반 편성 및 예산 확보 등 제반 문제를 검토했다.  애초 올림픽 유치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인 서울시는 대한체육회와 합동작업반 구성에도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 이에 따라 문교부 박성규 체육국장이 실무 작업반의 총책임을 맡고 문교부와 서울시 사무관 1명씩을 KOC 전문위원실에 파견해 합동 근무하도록 절충안을 마련했다.

KOC는 방대한 분량의 설문 답변서와 신청서를 우송할 경우 마감일까지 IOC 본부에 접수하지 못할 것으로 우려해 KOC와 서울시 실무자 3명이 이를 휴대하고 직접 제출하는 방법을 택했다. 1981년 2월 25일 서울을 떠나 26일 IOC 본부에 도착한 3명의 운송반은 주 제네바 한국대표부의 협조를 받아 차질 없이 제반 서류를 제출했다. 경쟁 도시인 나고야는 서울보다 1시간 앞서 유치 신청서를 제출한 것으로 확인됐으며 유치 신청서는 양적인 면에서 한국의 3분의 1 수준이고 한국에 비해 내용도 부실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애초 유치 의사를 보였던 호주의 멜버른과 그리스의 아테네가 도중 포기해 1988년 하계 올림픽의 유치 경쟁은 한일 양국의 대결로 압축돼 ‘해볼 만한 싸움이 될 것’란 관측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본격적으로 나고야를 상대해 유치 활동을 펼치느냐, 마느냐는 한심스런 분위기를 벗어나지 못하는 또 다른 분위기가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KOC가 IOC와 국제경기연맹이 제시한 경기장 시설 기준을 면밀히 검토해 본 결과 잠실에 건설하고 있는 올림픽 주 경기장 외에 20개 경기장을 새로 짓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으로 건설 경비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올림픽 개최 경비가 예상을 훨씬 뛰어넘어 크게 늘어나자 이 문제 때문에 애초부터 회의적인 경제기획원의 반대에 부딪쳤고 국무총리실과 문교부의 적극적인 추진 방침과 정면 충돌이 불가피해졌다.  

정부 부처 사이에 유치 찬반 의견이 팽팽한 가운데 적극적으로 유치 활동을 펴는 것이 국가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데 뜻을 모으고 문교부가 제시한 유치위원회 구성안을 채택하는 한편 재외 공관을 앞세운 유치 활동도 활발히 전개해 나가기로 했다. 

이후 구성된 올림픽 유치단은 당시 상황으로는 보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설사 실패하더라도 세계를 상대로 한국을 널리 알린다는 긍정적인 측면과 함께 스포츠라는 차원을 넘어 한반도의 평화 정착에 기여하고 경제 발전에서도 새로운 동기를 부여할 수 있다는 대국적인 틀에서 총력전을 펴기로 했다. 서울이 나고야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만은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못했지만 나고야가 갖고 있던 기득권을 서울이 역이용하면 의외의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발상도 필요했다. 

나고야는 한국은 동서 냉전의 국제 정세 속에서 분단국이라는 정치적인 취약점으로 공산권의 강력한 반대를 극복해야 하고 1978년 세계사격선수권대회를 빼고는 이렇다 할 큰 대회를 치른 경험이 없다는 점을 내세웠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경제력도 올림픽을 치르기에는 무리이고 유치 활동 또한 늦어도 너무 늦었다는 판단으로 방심하고 있었다. 일본은 월등한 경제력에다 1964년 도쿄 올림픽을 치렀다는 자부심 그리고 국제 스포츠 무대에서 탄탄한 인맥 등 어느 하나 부족한 게 없는 듯 보였다. 한국로서는 좀처럼 돌파구를 찾기가 어려웠다. 

일찌감치 샴페인을 준비하고 있던 일본은 예상치 못한 한국의 저돌적인 추격 앞에 취약점을 하나씩 드러내며 조금씩 무너져 내렸고 한국에 대한 국제 스포츠계의 부정적인 시각도 긍정적으로 바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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