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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우] 한국 양궁, 언제부터 이렇게 강했나

작성일: 2016.08.08 11:43 신명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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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림픽 사상 찾아보기 힘든 8연속 금메달의 대기록을 세운 한국 여자 양궁 대표팀 3총사 기보배 최미선 장혜진(왼쪽부터)
[스포티비뉴스=신명철 편집국장] 한국은 8일(한국 시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삼보드로모 경기장에서 열린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양궁 여자 단체전 결승에서 러시아를 3세트 포인트 합계 5-1로 물리치고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이 종목에서 8회 연속 금메달을 차지했다. 남자 단체전에서 먼저 금메달을 따냈다. 한국은 7일 결승전에서 미국을 3세트 포인트 합계 6-0으로 이겼다. 한국의 양궁 남녀 단체전 동반 우승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이후 8년 만이다. 한국 양궁은 언제부터 강력한 국제 경쟁력을 갖추게 됐을까.

1979년 7월 19일 아침신문을 펼쳐 든 스포츠 팬들은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한국이 이런 종목에서도 세계 무대에서 정상에 오를 수 있는가’ 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기사 내용은 김진호가 서베를린에서 열린 제 30회 세계양궁선수권대회에서 30m·50m·60m·70m 그리고 단체전 등 전광왕을 차지했다는 내용이었다. 모스크바 올림픽(1980년 7월 19일~8월 3일)을 불과 1년 앞뒀을 때다. 유력한 올림픽 금메달 후보가 혜성처럼 나타났다.

김진호는 이에 앞서 1978년 12월 방콕에서 벌어진 제 8회 아시아경기대회 개인전에서 금메달, 단체전에서 은메달을 차지했다. 그의 나이 17살 때다. 아시아 선수권자에서 세계 챔피언이 되는 데 7개월 여 시간밖에 필요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신데델라 스토리였다.

그런데 그 무렵만 해도 거의 대부분 스포츠 팬에게 양궁(Archery)이라는 종목은 낯설었다. 그럴 만도 했다. 양궁은 근대 올림픽 초기인 1900년, 1904년, 1920년 대회 등 몇 차례 치러진 적이 있지만 1972년 뮌헨 대회 때 다시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다. 그 무렵 세계 양궁계는 미국과 옛 소련, 핀란드, 스웨덴 등이 앞장서 이끌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1968년 서울에서 열린 제 49회 전국체육대회 때 정식 종목이 됐다. 1970년대까지 한국 양궁은 엘리트 선수 몇몇에게만 알려져 있는 종목이었다.

게다가 한국에는 전통 종목인 국궁이 있었다. 국궁은 양궁에 밀려 스포츠 팬들에게 큰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전국체육대회에는 해마다 1,000여 명의 선수가 출전하고 전국에는 300개가 넘는 정규 규격의 활터가 마련돼 있는 등 생활 스포츠로서 만만치 않은 저변을 갖고 있다.

양궁은 전국체전 종목으로 채택된 지 불과 16년 만인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서향순이 금메달, 김진호가 동메달을 차지하는 ‘압축 성장’을 하게 된다. 양궁 성장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인공인 김진호는 올림픽과 관련해 매우 아쉬운 일이 있다.

옛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이유로 미국과 그를 따르는 많은 나라가 불참한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은 태릉선수촌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올림픽 메달을 노리던 많은 종목 선수들에게 허탈감을 안겼다. 그해 3월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아시아 지역 예선 2조에서 말레이시아에 예선에서 0-3, 결승에서 1-2로 져 본선 출전권을 놓친 축구는 한국이 대회 출전을 결정했어도 모스크바행 비행기에 오를 수 없었다.

그러나 북미·아프리카·아시아 대륙에 걸려 있는 한 장의 본선 티켓을 거머쥔 여자 핸드볼은 땅을 칠 노릇이었다. 윤병순, 김옥화 등 모스크바에 가지 못했던 여러 선수가 다음 대회인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기는 했지만 메달의 기회를 놓친 건 두고두고 아쉽기만 했다.

유도는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63kg급에서 장은경이 금메달 일보 직전까지 가는 등 금메달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실제로 모스크바올림픽 이듬해인 1981년 마스트리히트(네덜란드) 세계선수권대회 71kg급에서 박종학이 한국 유도 사상 첫 세계선수권대회 금메달을 땄다. 이런 흐름에서 김관현(95kg급), 하형주(95kg 이상급) 등은 국가 대표로 뽑히고도 올림픽 매트에 서 보지 못했으니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하형주는 다음 대회인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금메달(95kg급)의 꿈을 이루긴 한다. 스포츠 팬들의 관심에서는 벗어나 있었지만 또 하나의 메달 유망 종목이 출전 기회를 허공에 날렸다. 양궁이었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김진호가 모스크바 올림픽에 출전했다면 옛 소련과 핀란드 선수를 제치고 한국 여자 선수로는 처음으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의 영광을 차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4년 뒤인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대한체육회는 양궁 종목에서 금메달 1개와 동메달 1개를 목표로 세웠다. 예상 메달리스트가 바뀌었을 뿐 이 목표는 정확하게 이뤄졌다.

1979년 세계양궁선수권대회 전관왕이자 당시 2,636점(4개 사거리 합계 점수)의 세계 최고 기록 보유자인 김진호가 0점 실사(失射)를 두 차례나 하는 등 난조를 보이며 2,555점을 기록하며 동메달로 밀렸으나 17살의 여고생 서향순이 침착하게 경기를 펼쳐 2,568점으로 중국의 리링주안을 9점 차로 따돌리고 금메달을 차지했다. 그때 별명이 ‘꽃돼지’였던 서향순은 한국 양궁이 낳은 또 한 명의 신데렐라였다.

개인전만 벌어진 이 대회에서 여자부의 박영숙은 11위, 남자부의 구자청과 최원태, 전인수는 8위와 11위, 22위를 기록했다. 세계 최강 한국 양궁 올림픽 역사는 이렇게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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