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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고비만 더 넘자…한눈에 보는 한국 월드컵 도전사

작성일: 2017.09.01 06:00 신명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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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은 우즈베키스탄과 아시아 지역 예선 최종전에서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진출 직행 여부가 결정된다. ⓒ한희재 기자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한국 축구의 월드컵 도전사는 한마디로 한국 축구의 성장 역사다. 월드컵과 한국 축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할 때마다 한국 축구는 발전 방안을 모색했고 그런 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발전해 1986년 멕시코 대회 이후 2014년 브라질 대회까지 8회 연속 본선 진출이라는 결코 쉽지 않은 기록을 세우게 됐다. 

축구에 조금만 관심 있는 이라면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일본 축구 대표 팀으로 김용식 선생이 출전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김용식 선생은 3-2로 이긴 스웨덴과 1회전, 0-8로 진 이탈리아와 8강전에 모두 주전으로 뛰었다. 

그런데 일본이 1938년 제3회 프랑스 월드컵 지역 예선에 대비해 1936년 11월 소집한 국가 대표 팀 명단에 김용식, 이유형, 배종호, 박규정 등 4명의 한국 선수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1938년 프랑스 월드컵 지역 예선 12조에 속한 일본이 자기들이 일으킨 중일전쟁 여파로 기권하지 않았으면 한국과 월드컵의 인연은 보다 일찍 맺어졌을 것이다. 1930년대 중반부터 1940년대 초반까지 연인원 40여 명의 한국 선수가 각종 국제 대회에 대비한 일본 축구 대표 팀 훈련에 소집됐다. 한국 선수들의 실력이 뛰어났다는 방증이다. 

1945년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난 뒤 국내 축구계는 올림픽 등 국제 대회에 출전하기 위한 선결 요건인 국제축구연맹(FIFA) 가입을 서둘러 1948년 5월 21일 FIFA 가맹국이 됐다. 그리고 처음으로 출전한 국제 대회가 1948년 런던 올림픽이다. 

한국은 1회전에서 멕시코를 5-3으로 꺾었으나 8강전에서 대회 우승국인 스웨덴에 0-12로 크게 져 탈락했다.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부산에 도착한 뒤 그곳에서 배를 타고 요코하마로 갔고 그곳에서 다시 배를 타고 홍콩으로 가 프로펠러 비행기를 여러 번 갈아타며 대회 장소에 갔으니 좋은 성적을 기대하는 건 무리였다. 

이 대회 이후 한국 축구는 1964년 도쿄 올림픽에 한 차례 출전한 뒤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자동 출전권을 갖고 나서기까지 오랜 기간 올림픽과 인연을 맺지 못했다. 도쿄 올림픽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에 1-6, 브라질에 0-4, 아랍공화국연합(이집트+시리아)에 0-10으로 대패했다. 이 무렵 한국 축구는 암흑기였다. 

1942년과 1946년 대회를 건너뛴 월드컵은 1950년 제4회 대회가 브라질에서 열렸다. 그러나 6월 24일부터 7월 4일까지인 대회 기간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은 대회에 나설 생각을 할 형편이 아니었다. 한반도에는 민족상잔 전쟁으로 포연이 가득했다. 

1954년 스위스에서 개최된 제5회 월드컵에 아시아 지역에 배정된 티켓은 한 장이었다. 대만이 기권해 아시아 지역 예선은 한국과 일본의 맞대결로 좁혀졌다. 이때는 두 나라의 국교가 정상화되기 전이었고 이승만 대통령의 강력한 대일 정책으로 일본에서 두 차례 경기를 치러 한국이 1승 1무(5-1 2-2)로 본선 출전권을 차지했다. 선수단이 출국하기 전 이유형 감독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한 "일본에게 지면 선수단 모두가 현해탄(대한해협)에 몸을 던지겠다"는 비장한 약속은 당시 시대상을 보여 준다. 

한국은 본선 2조 첫 경기에서 헝가리에 0-9, 두 번째 경기에서 터키에 0-7로 크게 져 2패로 조기 탈락했다. 결승전에서 서독에 2-3으로 졌지만 8강전에서 브라질을 4-2로 꺾는 등 당시 헝가리는 스타플레이어 푸스카스를 앞세운 세계 최강 전력이었다. 이 대회와 런던 올림픽 전 경기에 출전한 홍덕영은 푸스카스 등 헝가리 선수들의 슈팅을 막느라 가슴과 배가 얼얼할 정도였다고 했다. 국제 대회 최다 실점 기록을 갖고 홍덕영은 그러나 이후 함흥철~이세연~이운재 등으로 이어지는 한국 축구 골키퍼 계보의 1세대다. 

1958년 제6회 스웨덴 월드컵과 관련해 한국 축구는 행정적으로 창피한 일이 있었다. 협회 관계자 실수로 예선 참가 신청서를 제때 내지 못해 출전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에 앞서 1956년 9월 홍콩에서 열린 제1회 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은 이스라엘을 2-1로 꺾는 등 2승 1무로 초대 챔피언이 돼 나름대로 경기력에 대한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1962년 제7회 월드컵은 칠레에서 열렸다. 1960년 벌어진 아시아 지역 예선에는 한국과 일본, 인도네시아가 출전하기로 돼 있었으나 인도네시아가 기권해 또다시 두 나라의 맞대결이 이뤄져 한국이 가볍게 2승(2-1 2-0)을 거뒀다. 이 대회에서 아시아 지역 예선 승자는 유럽과 대륙간 플레이오프를 치러야 했다. 한국은 칠레 월드컵 예선이 시작되기 전인 1960년 10월 벌어진 제2회 아시안컵에서 이스라엘을 3-0으로 물리치는 등 3승으로 대회 2연속 우승에 성공해 아시아 최강의 실력을 자랑했다. 이 대회를 치르기 위해 만든 경기장이 효창운동장이다. 

유럽의 강호 유고슬라비아(1948년, 1952년, 1956년 올림픽 은메달, 1960년 올림픽 금메달)와 경기에서는 전력 차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은 1961년 10월 8일 베오그라드에서 열린 원정 경기에서 1-5로 대패했다. 김포~도쿄~타이베이~홍콩~테헤란~앙카라~이스탄불~로마~베오그라드로 이어지는 여정은 당시 대표 선수들의 유럽 원정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를 대변한다. 11월 26일 효창운동장에서 벌어진 경기에서는 1-3으로 져 본선 출전의 꿈을 접었다. 

1948년 9월 한반도 북쪽에 '조선민주주의공화국'을 세운 북한이 축구에서 첫 A매치를 가진 건 그로부터 11년 뒤인 1959년 10월의 일이다. 상대는 중국이었고 1-0으로 이겼다. 1964년 인스부르크 동계 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3000m 은메달리스트 한필화, 1960년대 초반 육상 여자 중거리의 세계적인 선수 신금단 등으로 북한 스포츠가 간간히 알려지고 있었지만 이 무렵 북한 축구는 국제 무대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런 북한이 1965년 11월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벌어진 1966년 제8회 잉글랜드 월드컵 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 예선에서 호주를 6-1, 3-1로 연파하고 본선 티켓을 거머쥐었다. 한국이 북한의 전력을 의식해 이 대회 예선 출전을 포기하고 FIFA로부터 5,000달러의 벌금을 부과 받은 사실은 1974년 테헤란 아시아경기대회에서 북한과 만나지 않기 위해 쿠웨이트에 고의로 졌다는 의혹과 함께 한국 축구사에 부끄러운 역사로 남아 있다. 

북한은 아프리카 1위와 대륙간 플레이오프를 치러야 했지만 나이지리아, 아랍공화국연합, 가나, 카메룬 등 아프리카 예선에 출전을 신청한 15개 나라가 모두 기권하는 바람에 본선에 나서는 행운을 누렸고 조별 리그에서 이탈리아를 1-0으로 꺾는 등 돌풍을 일으킨 끝에 아시아 나라로는 처음으로 월드컵 8강에 오르는 기록을 남겼다. 

한국 축구는 1970년대에도 잇따라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한다. 이 시기에 한국에 실패의 쓴잔을 안긴 나라가 호주다. 1970년 제9회 멕시코 월드컵 아시아∙오세아니아 1차 예선은 1969년 10월 서울운동장에서 한국과 일본, 호주가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이 예선 조에는 이스라엘과 로디지아(오늘날의 짐바브웨), 북한 등이 들어 있었는데 북한은 이스라엘과 경기를 거부하면서 출전을 포기했다. 로디지아는 인종차별 정책 때문에 아프리카에서 밀려나 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으로 배정됐지만 한국 역시 아프리카 나라들과 외교 관계를 의식해 로디지아의 입국을 허용하지 않았다. 남북이 UN 가입과 봉쇄 등으로 치열한 외교 전쟁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더블 리그로 진행된 예선에서 한국은 일본에는 1승 1무(2-0 2-2)로 앞섰으나 호주와 1차전에서 1-2로 진 데 이어 2차전에서 1-1로 비겨 2차 예선 출전권을 얻지 못했다. 호주는 2차 예선에서 로디지아를 따돌렸으나 최종 예선에서 뉴질랜드를 물리친 이스라엘에 1무 1패(1-1 0-1)로 밀려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1974년 제10회 서독 월드컵을 앞두고 한국 축구는 1970년에 제7회 아시아경기대회와 메르데카배, 킹스컵 우승을 휩쓰며 기세를 올렸고 이해 포르투갈의 명문 클럽 벤피카, 1972년에는 펠레가 이끄는 산토스 클럽과 친선경기를 갖는 등 실력 향상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1973년 10월과 11월 시드니와 서울을 오가며 벌어진 서독 월드컵 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 최종 예선에서 호주와 0-0, 2-2로 비긴 뒤 11월 13일 홍콩에서 벌어진 3차전에서 0-1로 져 본선 문턱에서 좌절했다. 서울운동장에서 벌어진 홈경기에서는 전반 15분 김재한, 27분 고재욱의 연속 골로 2-0으로 앞서며 월드컵 본선에 바짝 다가서는 듯했지만 전반 29분 불제비치에게 추격 골 , 후반 3분 라르츠에게 동점 골을 내줬다. 

한국은 이후 1978년 제11회 아르헨티나 월드컵과 1982년 제12회 스페인 월드컵 대회 지역 예선에서는 서아시아세가 본격화되면서 각각 이란과 쿠웨이트에 밀려 월드컵 본선 진출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국내 프로 축구 팀 1호인 할렐루야를 비롯해 유공과 대우, 포철 등 4개 프로 팀과 아마추어인 국민은행이 합류해 어설프게나마 출범한 슈퍼리그는 한국 축구의 경기력을 끌어올리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게다가 1982년 제12회 스페인 월드컵부터 출전국이 16개국에서 24개국으로 늘어나면서 아시아 나라들에도 월드컵에 나설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1986년 제13회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아시아 지역에 두 장의 출전권이 배정됐다. 오세아니아는 따로 예선을 치러 1위가 유럽과 대륙간 플레이오프를 갖도록 했다. 아시아 지역 예선은 동, 서 아시아로 조를 나눠 쿠웨이트 등 껄끄러운 나라들과 경기를 치르지 않게 됐다. 한국으로서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한국은 1985년 3월 10일 쿠알라룸푸르에서 벌어진 아시아 지역 B조 1차 예선 1그룹 두 번째 경기에서 1972년 뮌헨 올림픽과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등 주요 국제 대회 예선에서 발목을 잡았던 말레이시아에 또다시 0-1로 져 불안한 출발을 했으나 5월 19일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홈경기에서 박창선과 조민국의 연속 골로 2-0으로 완승해 1차 관문을 통과했다. 1차 예선에서는 또 약체 네팔을 2-0, 4-0으로 눌렀다. 

한국은 7월 21일 잠실 올림픽주경기장에서 벌어진 2차 예선 첫 경기에서 변병주와 김주성의 골로 인도네시아를 2-0으로 꺾은 데 이어 7월 30일 자카르타에서 열린 원정 경기에서도 4-1로 이겨 최종 예선에 진출했다. 일본은 홍콩을 3-0, 2-1로 제치고 최종 예선에 나섰다. 

동아시아의 영원한 맞수 한국과 일본은 각각 32년 만의 월드컵 본선 출전과 첫 출전을 놓고 10월 26일 11월 3일 잇따라 맞붙었다. 경기 장소는 두 나라 스포츠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잠실 올림픽주경기장과 도쿄 국립경기장이었다. 

1차전에서 한국은 전반 정용환과 이태호의 연속 골로 승기를 잡은 뒤 후반 추격 골을 내줬으나 더 이상 실점하지 않고 2-1로 승리해 월드컵 본선에 바짝 다가섰다. 이어 벌어진 홈경기에서 한국은 후반 16분 최순호의 슈팅이 골포스트를 맞고 나오자 허정무가 그대로 차 넣어 월드컵 본선 출전의 꿈을 완성했다.

이후 한국은 1990년 제14회 이탈리아 대회, 1994년 제15회 미국 대회, 1998년 제16회 프랑스 대회에 연속으로 출전한 데 이어 2002년 제17회 한일 대회에서 아시아 나라로는 처음으로 4강에 올랐다. 2006년 제18회 독일 대회에서는 원정 대회 첫 승을 올렸고 2010년 제19회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회에서는 원정 대회 첫 1라운드 통과(16강) 기록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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