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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철의 북한 스포츠 이야기(3)] 일제 강점기 평양 함흥 등지 체육 활동(상)

작성일: 2018.05.18 10:13 신명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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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1년 평양, 선천(평안북도) 등지로 원정에 나선 황성YMCA 야구 선수단. 앞줄 맨 오른쪽에 중절모를 쓰고 있는 이가 오늘날 국내 최고 인기 스포츠인 야구를 이 땅에 보급한 필립 질레트(한국 이름 길례태·吉禮泰) ⓒ대한체육회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제국주의 일본에 병탄됐지만 한반도가 하나이던 때, 이 땅의 북쪽에서 펼쳐진 스포츠 활동은 어땠을까.

영화 ‘암살’에는 두 곳의 역이 배경으로 나온다. 하나는 오늘날 서울역인 경성역과 평양역이다. 영화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장소이지만 평양은 고구려 여러 수도 가운데 하나이자 고려 시대 북방 개척의 주요 거점인 서경으로 한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일제 강점기 경성(서울)에 이어 한반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였던 평양은 다른 지방 도시보다 앞서 규모가 크고 운영 면에서도 짜임새 있는 각종 경기 대회를 열어 주목을 끌었다. 1920년 조선체육회가 서울에서 제1회 전조선축구대회를 주최한 지 1년 뒤인 1921년 평양YMCA 주최 제1회 전조선축구대회가 평양에서 열렸다.

근대 스포츠가 서울에 들어온 것이 주로 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서였듯이 평양에서도 외국인 선교사들이 여러 가지 근대 스포츠를 소개했다. 중국을 거쳐 평양에 들어온 외국인 선교사들은 평양에 기독교와 스포츠 그리고 근대 교육을 전수했다.

평양에서 가장 먼저 축구를 시작한 학교는 평양신학교다. 평양 숭실학교는 1898년 세워졌으며 1907년에는 숭실학교에 대학부(숭실전문 전신)가 설립됐다. 그 무렵 숭실학교 동쪽에 이웃한 평양신학교의 나이 많은 학생들은 숭실학교 운동장을 빌려 볼을 찼다. 뒤에 숭실학교가 축구를 시작하고 축구의 명문으로 성장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여기에 나오는 숭실학교는 지금 서울에 있는 숭실대학교다.

평양에서 야구는 외국인 선교사와 아이들이 볼을 주고받으며 즐기는 정도였으나 1909년 제1차 도쿄 유학생 야구단이 평양을 방문해 두 편으로 나뉘어 시범 경기를 펼치고 돌아간 뒤 대성학교와 숭실학교에 야구 팀이 생겼다. 숭실학교에서는 선교사 교수들이 야구를 지도했다.

대성학교는 제1차 도쿄 유학생 야구단의 후보로 따라왔던 조기풍과 김현재가 도쿄로 돌아가지 않고 대성학교에 전·입학해 선수들을 모아 야구 팀을 만들었다. 이들 외에 도쿄 우에노미술학교에 다니던 김찬영과 김관호가 역시 도쿄로 돌아가지 않고 코치를 하면서 틀이 잡혀 갔다.

1912년 제2차 도쿄 유학생 야구단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대성학교는 도쿄 유학생 야구단과 경기를 가질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이 향상돼 있었다. 이때 도쿄 유학생 야구단과 경기를 가진 숭실학교는 외국인 선교사들이 투수와 포수 등을 맡았으며 한국인 선수로는 이석찬과 장병훈이 외야수를 맡았다.

평양신학교에서 비롯된 축구는 숭실학교, 대성학교로 전파됐고 소학교 가운데는 평양 서문 밖에 있는 청산학교가 가장 먼저 시작했다. 당시 다른 지방도 그랬지만 평양의 사립 학교는 민족정신이 뚜렷한 유지나 애국자가 세운 학교가 적지 않았다. 대성학교는 1905년 독립지사 안창호가 세운 학교이며 청산학교는 대한제국 군인 출신으로 병식체조[兵式體操, 군대식 체조]의 선구자인 권미보가 1908년에 세운 기독교계 학교다.

서울YMCA의 초대 체육 간사인 이병삼과 그의 동생 이병학은 청산학교에서 권미보 교장의 지도를 받아 철봉의 달인으로 뒷날 이름을 떨치게 된다.

평양의 축구와 야구는 숭실학교와 대성학교를 두 기둥으로 삼아 뻗어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1913년 설립자인 안창호가 상하이로 망명하면서 대성학교가 폐교되자 숭실학교 홀로 축구와 야구의 명맥을 이어 나가게 되며 평양의 일본인들이 야구를 시작하면서 숭실학교는 경기 상대를 갖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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