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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철의 북한 스포츠 이야기(11)] 북한, 잉글랜드 월드컵 8강 관련 여러 기억들

작성일: 2018.06.08 11:01 신명철 편집 위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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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두익(북한, 왼쪽)이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조별 리그 4조 이탈리아와 경기에서 결승 골을 터뜨리고 있다. 북한-이탈리아 등 4조 조별 리그 3경기가 열린 에어섬 파크는 1995년 리버사이드 스타디움이 개장하기 전까지 미들스브로 FC 홈구장으로 쓰인, 유서 깊은 경기장이다. ⓒ한국 축구 100년사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글쓴이가 초등학교 3, 4학년 때쯤 담임 선생님에게 들은 말 가운데 아직도 기억하는 내용이 있다.

“이탈리아는 우리나라와 비슷한 점이 많은 나라다. 같은 반도 국가이고 국민들이 노래를 즐겨 부른다.” 담임 선생님은 음악 시간에 이 말씀을 하신 거 같다. 그때 이후 글쓴이에게 이탈리아는 그렇게 먼 나라가 아니었다.

그렇게 가깝게 느껴지게 된 이탈리아 사람들이 1960년대 중반 ‘코리아’라고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깜짝 놀랄 일을 두 가지 경험했다.

1966년 6월 25일 서울 장충체육관. 한국의 김기수(작고)는 WBA 주니어 미들급 타이틀을 놓고 챔피언인 이탈리아의 니노 벤베누티에게 도전했다. 벤베누티는 1960년 로마 올림픽 웰터급 금메달리스트로 복싱 실력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당시 동급 세계 최강이었다.

외모 또한 뛰어난, 요즘 표현으로 꽃미남이었다. 이탈리아 스포츠 팬, 특히 여성 팬의 우상이었다. 그런 벤베누티가 동양 여행 삼아 나선 타이틀전에서 무명의 복서에게 판정으로 져 챔피언벨트를 내줬다. 이탈리아는 경악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신경 쓰고 있지 않았겠지만 이 타이틀전을 앞둔 김기수는 이를 갈고 있었다. 신세대 스포츠 팬들에게 잠시 김기수를 소개한다.

김기수는 1939년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났지만 12살 때인 1·4 후퇴 때 한국으로 와 전라남도 여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곳에서 복싱을 익힌 김기수는 1957년 서울 성북고로 전학하면서 아마추어 복서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958년 도쿄 아시아경기대회 웰터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김기수는 1962년 프로로 전향하기 전까지 1959년 제40회 전국체육대회(서울) 등 각종 국내 대회에서 연전연승하며 88전 87승1패의 놀라운 기록을 남겼다. 그 1패가 1960년 로마 올림픽 웰터급 2회전에서 니노 벤베누티에게 당한 판정패였다.

프로에서도 연승 행진을 이어 간 김기수는 일본 원정 두 경기를 포함해 프로 데뷔 4번째 경기에서 강세철을 판정으로 물리치고 국내 미들급 챔피언이 됐다. 1965년 1월 일본의 가이즈 후미오를 6회 KO로 누르고 동양 미들급 타이틀을 차지한 김기수는 여세를 몰아 한국인 선수로는 처음으로 프로 복싱 세계 챔피언에 도전한 것이다.

같은 해 7월 19일 북한은 영국 미들스브로에서 1만8,727명의 유료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벌어진 제8회 잉글랜드 월드컵(세계축구선수권대회) 본선 4조 마지막 경기에서 1934년(이탈리아), 1938년(프랑스) 대회 우승국이자 세계적인 축구 강국 이탈리아를 1-0으로 꺾는 월드컵 역사에 남을 이변을 일으켰다.

월드컵 역사는 이 경기를 1950년 브라질 대회에서 미국이 잉글랜드를 1-0으로 제친 경기 등과 함께 깜짝 놀랄 여러 경기 가운데 하나로 꼽고 있다.

중·장년 축구 팬들에게는 이탈리아전 결승 골 주인공인 박두익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북한이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기록한 5골 가운데 2골을 기록한 박성진도 박두익에게 못지않은 기량을 지닌 선수였다.

▲ 한국은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지역 예선에 기권했으나 대회 직전 열린 FIFA 총회에 김용식 선생(가운데 줄 왼쪽, 당시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출전) 오완건 협회 섭외 이사(김용식 선생 옆)를 파견했다. ⓒ한국 축구 100년사

1라운드 탈락의 수모를 당한 이탈리아 대표 팀은 귀국길에 자국 팬들로부터 토마토 케첩과 잼 등의 세례를 받았다.

이 땅에 축구가 들어온 19세기 말 이후 1946년 3월 25일과 26일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서울운동장(->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마지막 경평전까지 남북은 축구 역사를 함께했다. 그러나 이후 남과 북은 각자의 축구 역사를 기록했고 2018년 현재 북한 축구가 이룬 가장 큰 업적이 잉글랜드 월드컵 8강이다.

북한은 이후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8강, 1978년 방콕 아시아경기대회 한국과 공동 우승, 1980년 쿠웨이트 아시안컵(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 4위, 1990년 베이징 아시아경기대회와 2014년 인천 아시아경기대회 준우승 등 성적을 올렸지만 잉글랜드 월드컵 8강에는 크게 미치지 못한다.

1948년 9월 한반도 북쪽에 '조선민주주의공화국'을 세운 북한이 축구에서 첫 A매치를 가진 건 그때로부터 11년 뒤인 1959년 10월의 일이다. 상대는 이웃 중국이었고 베이징 원정 경기에서 1-0으로 이겼다.

1964년 인스부르크 동계 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3000m 은메달리스트 한필화와 1960년대 초반 육상 여자 중거리의 세계적인 선수 신금단 등으로 북한 스포츠가 간간히 알려지고 있었지만 그 무렵 북한 축구는 국제 무대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런 북한이 1965년 11월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열린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 예선에서 호주를 6-1, 3-1로 연파하고 본선 티켓을 거머쥐었다. 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은 한국과 북한, 남아프리공화국, 호주가 일본에서 예선을 치르게 돼 있었는데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악명 높은 인종차별 정책 때문에 FIFA(국제축구연맹)로부터 징계를 받아 실격했고 한국은 북한과 경기에 대한 부담 때문에 출전을 포기했다.

출전 포기 때문에 FIFA(국제축구연맹)로부터 벌금 5,000달러를 부과 받은 사실은 1974년 테헤란 아시아경기대회에서 북한과 만나지 않기 위해 쿠웨이트에 고의로 졌다는 의혹과 함께 한국 축구사에 부끄러운 기록으로 남아 있다.

호주를 가운데 놓고 그 무렵 북한 축구 수준을 평가해 보면, 한국은 1967년 사이공(오늘날 호치민)에서 열린 베트남독립기념배대회에서 호주에 2-3으로 졌다. 1969년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멕시코 월드컵 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 1차 예선에서는 1무1패(1-1 1-2)로 호주에 밀렸다. 당시 북한은 국제 외교 관계가 제한적이어서 호주와 경기를 치를 장소가 마땅치 않았고 북한과 우호적인 관계였던 캄보디아에서 호주와 제3 지역 경기를 갖게 됐다.

호주와 두 차례 경기에서 북한은 박성진이 3골, 한봉진과 김승일이 2골, 박두익과 임승희가 1골씩을 넣었다. 북한은 이들을 포함한 22명의 선수가 본선에 나섰는데 25살 이상 선수가 4명에 불과할 정도로 젊은 팀이었다.

잉글랜드 월드컵을 다룬 다큐멘터리 ‘The Game of Their Lives’[천리마 축구단, 다니엘 고든 감독)에 따르면 작품이 공개된 2002년 현재 잉글랜드 월드컵 출전 선수 가운데 생존자는 7명뿐이었다. 신세대 축구 팬들 귀에도 익은 기관차축구단과 압록강 축구단, 2·8축구단, 모란봉축구단 소속 북한 대표 선수들의 2002년 현재 나이는 55~63세였다.

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 예선을 통과한 북한은 아프리카 1위와 대륙간 플레이오프를 치러야 했지만 나이지리아와 아랍공화국연합[이집트+시리아], 가나, 카메룬 등 아프리카 예선에 출전을 신청한 15개 나라가 모두 기권하는 바람에 본선에 나서는 행운을 누렸다.

호주를 합계 스코어 9-2로 가볍게 제친 경기력을 지닌 북한은 조별 리그 1차전에서 옛 소련(4위)에 0-3으로 진 뒤 2차전에서 칠레와 1-1로 비겼고 3차전에서 이탈리아를 1-0으로 꺾어 아시아 나라로는 처음으로 월드컵 8강에 오르는 기록을 남겼다.

8강전에서 ‘검은 표범’ 에우제비오(1970년 벤피카 클럽의 일원으로 한국을 찾았을 때, 그리고 이후 오랫동안 한국에서 그의 이름은 유세비오였다)가 4골을 터뜨린 포르투갈(3위)에 3-5로 역전패해 4강 문턱에서 탈락한 사실은 신세대 팬들도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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