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재규칼럼] 월드컵 후 '역모설'과 정몽규 회장의 기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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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티비뉴스=류재규 기자] 2018년 러시아월드컵 개막을 일주일 앞둔 6월 7일 '벌써 월드컵 책임론…'역모' 세력 있다?'는 제목의 기사가 한 스포츠 전문지의 1면에 실렸다.
이 매체는, 월드컵 실패를 확신하는 일부 축구인이 정몽규 회장을 비롯한 대한축구협회를 뒤엎는 변화를 구상하고 있으며, 축구계의 중견 인사 A씨가 세력을 모아 월드컵이 끝난 뒤 명망있는 인사 B씨를 내세워 '판갈이'를 시도한다는 이른바 '월드컵 후 역모설'을 전했다. 기사는 월드컵이 시작도 하지 않았고 결과도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신태용 감독과 축구협회를 흔들어서는 안된다는 주장으로 마무리됐다.
당시 기자는 해당 기사를 되풀이해 읽으면서 한편으로는 서글펐고, 다른 한편으로는 의아했다.
월드컵이 열리기도 전 '역모설'이 나도는 축구계의 현실이 안타깝고 답답했다. '조별리그 3전 전패' 전망이 공공연하게 나오게 만든 '신태용호'의 전력, 이기는 싸움을 기획하고 대책을 찾는 대신 싸우기도 전에 주눅이 들어 후폭풍을 걱정하는 코칭스태프와 축구협회 수뇌부의 패배주의적 태도는 수긍하기 어려웠다.
사실 '월드컵 후를 겨냥해 누가 어떤 일을 하고 있다'는 소문은 오래 전부터 축구계에서 나돌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런 이야기를 퍼뜨리고 다녔던 사람 중에는 축구협회 고위 관계자들도 있었다. 관련자들의 실명과 구체적인 정황이 담기면서 소문은 사실인 것처럼 변해갔다.
'신태용호'가 졸전을 펼칠 경우 정몽규 회장과 축구협회에 대한 질타가 봇물처럼 터져나올 수밖에 없다. 누군가 이에 대비해 '역모설'이라는 시나리오를 퍼뜨려 축구 쇄신론의 명분을 퇴색시키고, 불만 세력의 힘을 빼는 물타기를 하는 것 아니냐는 의문이 생겼다. 기사를 본 뒤 의아한 느낌이 든 건 이 때문이다.
당사자를 직접 만나 사실을 확인했다. '거사'를 위해 세력을 모으고 있다는 축구계 중견 인사 A씨를 6월 중순 만나 자초지종을 들어봤다. 대표팀의 경기력과 축구협회 행정에 대한 불만을 쏟아내던 그는 화제가 문제의 '역모설'에 이르자 소문을 강하게 부인했다.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하고 다니는지 잘 안다. 사실이 아니다. 축구계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정말 판을 바꿔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러나 B씨와 함께 내 별장에서 지역 축구협회장들을 만나 월드컵 후 무슨 일을 하자고 모의한 적이 없다. B씨와 잘 알고 지내고 그가 얼마 전 내 별장을 방문한 것도 사실이지만, B씨가 정원에 쓸 돌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진짜 뭘 해야 하는 상황이 닥친다고 해도 B씨와 같은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지는 않다. 이 분들은 누가 밥상을 차려주면 먹기만 할 뿐, 자신이 직접 불을 때고 밥을 짓는 사람들이 아니다."
'월드컵 후'의 상황은 우리가 보고 겪은 것과 같다.
대표팀은 스웨덴과 조별리그 1차전에 이어 멕시코와 2차전에서 기대 이하의 경기력을 보이며 연패했다. 독일과 3차전에서 2-0으로 이겼지만 16강에는 들지 못했다. 축구팬은 대표팀이 실패했다며 성토했지만 정 회장을 비롯한 축구협회 고위 인사들은 "신태용 감독에게는 공과 과가 함께 있다"고 주장하며 신 감독을 새 감독 후보군에 포함시키는 묘수로 책임론을 피해갔다. 축구협회는 또 월드컵 후 한 달이 넘도록 외국인 새 감독 선임 작업을 진행하며 팬의 시선을 돌렸다.

지난달 31일, 축구협회는 때를 기다렸다는 듯 정 회장이 국가대표팀 감독 연봉이나 유소년 축구 활성화에 써달라며 40억원을 기부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협회는 또 정 회장이 이와 별도로 2013년 이후 지금까지 총 29억원을 기부했으며, 2015년부터는 '포니 정 재단'을 통해 매년 60명의 중학생 선수들에게 장학금 1억 2000만원을 지급했다고 덧붙였다.
축구협회 관계자는 "정 회장의 기부금이 사재, 즉 개인의 돈이냐"는 질문에 "현대산업개발 법인의 자금이라고 들었다. 법인이 정상적인 절차를 거쳐 기부를 승인한 것으로 안다"고 대답했다.
개인 돈이든, 법인 돈이든 기부는 쉬운 게 아니다. 그런 면에서 정 회장의 기부는 의미있는 일이다. 그러나 팬이 바라는 것은 누군가 기부를 하지 않아도 될만큼 회장이 일을 잘 해서 축구판을 키워 달라는 것이다. 선후가 바뀌면 '이만큼 기부할 수 있는 사람만 회장을 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보냈다는 오해를 살 수도 있다.
한국의 월드컵 도전이 실패로 끝난지 한 달이 넘었지만 축구협회는 아직 월드컵 평가도, 이에 따른 개선 방안도 내놓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 회장의 기부 발표가 나왔다.
월드컵 전부터 축구협회가 한 일을 되짚어 보면 다음과 같은 일련의 흐름이 보인다.
대표팀의 전력 불안과 월드컵 실패 위기감 고조 → 역모설 흘리기로 반대 세력 힘 빼기 → 월드컵 16강 진출 실패 → 독일전 승리 효과 극대화 → 신태용 감독에게 새 감독 후보 자격 부여, 월드컵 실패론 희석 → 새 외국인 감독 선임 논의로 팬 시선 돌리기 → 정몽규 회장의 기부금 출연 발표….
축구협회 수뇌부가 이제 새 외국인 감독을 선임해 대표팀 코칭스태프를 정비하면 월드컵 실패 이전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향후 한국 축구는 이런 희망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적지 않다. 상시적 위기에 돌입했다는 징후가 곳곳에서 보인다.
축구협회 리더십에 대한 팬의 걱정이 냉소로 변해가는 사이, 유령처럼 축구계를 떠돌던 역모설은 잊혀졌다. 역모도, 판갈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111년 관측 사상 최악이라는 폭염이 속이 타들어가는 축구판을 둘러싸고 있다. 2018년 여름 대한민국에서 축구 팬으로 사는 것은 무더위처럼 팍팍한 일이 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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