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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안게임] 한국의 태권도에서 아시아의 태권도, 그리고 세계의 태권도로

작성일: 2018.08.24 12:25 신명철 편집 위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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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만의 첫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천스신은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시상식 내내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고 이를 본 대만 시청자들은 눈시울을 붉혔다.

[스포티비뉴스=아시안게임 특별취재단 신명철 기자] 2018년 자카르타 팔렘방 아시안게임이 중반에 접어들며 치열한 메달 레이스를 펼치고 있다.

23일에는 태권도가 레슬링에 이어 이번 대회 두 번째로 경기 일정을 마쳤다.

이번 대회에서는 품새가 정식 세부 종목으로 추가된 가운데 한국이 금메달 5개와 은메달 5개, 동메달 2개로 종주국의 위상을 지켰다. 이번 대회에서는 품새 남녀 개인전과 단체전 4개 금메달이 추가됐지만 겨루기 남녀 체급이 5개로 줄어 전체 금메달은 전 대회보다 2개 줄어든 14개가 됐다.

직전 대회인 2014년 인천 대회에서는 겨루기에만 남녀 8개 체급씩 16개의 금메달이 걸려 있었는데 한국(금 6 은 2 동 2)은 이란(금 4 은 2 동 1)의 강력한 도전을 따돌리고 종목 순위 1위를 지켰다.

2010년 광저우 대회에서는 인천 대회보다 더 아슬아슬했다. 한국은 중국과 금메달 숫자(4)는 같았지만 은메달에서 4-2로 앞서 겨우 종목 순위 1위를 유지했다. 한국은 1986년 서울 대회 때 태권도가 처음 정식 종목이 된 뒤 경기가 열리지 않은 1990년 베이징 대회를 빼고 8회 연속 종목 1위를 지켰다.

그런데 유도가 일본 종목이 아니듯이 태권도는 이제 한국의 것이 아니고 아시아, 나아가 세계의 종목이다.

이번 대회에서도 이란 외에 태국(금 2 동 2) 우즈베키스탄(금 1 은 3 동 2) 중국(금 1 은 2 동 2) 대만 요르단(이상 금 1 동 3) 인도네시아(금 1) 등 금메달을 획득한 나라들을 비롯해 모두 14개국이 태권도 종목 메달을 사이좋게 나눠 가졌다.

태권도가 아시아는 물론 세계 여러 나라에 메달을 기쁨을 주는 건 한국이 좋은 성적을 올리는 것보다 더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자유중국으로 불리며 1980년대 이전까지 한국과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던 대만의 경우를 보자.

스포츠 팬들에게 대만이라고 하면 리틀 야구 월드시리즈와 윌리엄 존스 컵 국제 농구 대회 정도가 떠오르지 않을까.

스포츠 올드팬이라면 1960~70년대 세계적인 단거리 선수로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육상 여자 허들 80m 동메달리스트인 치청을 기억할지 모르겠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아시아의 철인’ 양촨광이 있다. 1954년 마닐라, 1958년 도쿄 아시아경기대회 육상 10종 경기에서 연속 우승을 차지했던 그는 1960년 로마 올림픽 같은 종목에서 은메달을 획득했다.

대만 스포츠 하면 곧바로 떠오르는 건 리틀 야구다. 대만은 1947년 시작한 리틀 야구 월드시리즈에서 1969년 첫 우승을 차지한 이후 17차례 정상을 밟았다. 일본(11차례) 한국(3차례) 보다 훨씬 많고 1977년부터 1981년까지 5연속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야구 팬들이 기억하는 대만의 유명 야구 선수는 미국 프로 야구 신시내티 레즈에 스카우트 됐으나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지 못하고 1980년대 초 일본 프로 야구 난카이 호크스에서 뛴 가오잉제와 리라이파 그리고 궈타이유안(세이부 라이온즈, 1985년~1997년), 궈위안즈(주니치 드래곤즈, 1981년~1989년) 등 꽤 많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리틀 야구 출신이다.

대만은 1970년대 이후 중국에 정치, 외교적으로 밀리면서 스포츠를 내세워서라도 국제 무대에서 살아남으려고 했다. 리틀 야구는 그 대표적인 수단이었다.

오래전 일이지만 스포츠에서 중국의 위세에 대만과 한국이 함께 당한 쓰라린 일도 있다. 한국은 1950년 아시아탁구연맹(ATTF)에 가입했다. 이 무렵 아시아 탁구계는 기술적으로는 일본과 대만이 앞서 있었고 인도와 말레이시아가 행정을 맡고 있었다.

1949년 건국 이후 내부 정리를 마친 중국은 바로 스포츠를 앞세워 국제 무대에 나서기 시작했다. 여러 종목 가운데 탁구 실력은 단연 뛰어났다. 순식간에 세계적인 탁구 강국으로 올라섰다.

중국은 1972년 일본과 슬며시 손을 잡고 북한까지 끌어들여 아시아탁구연합(ATTU)을 만들었다. 두 개 단체가 경쟁하는 가운데 거의 모든 ATTF 회원국이 중국이 주도하는 ATTU로 넘어갔다. 남은 건 한국과 대만뿐이었다.

1973년 ATTF는 국제탁구연맹으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았다. 한국은 중국, 대만과 얽힌 특수 관계 때문에 마지막 순간까지 대만의 손을 놓을 수 없었다. 아시아 무대에서 외톨이가 된 한국은 1980년과 1982년 적잖은 돈을 들여 서울오픈을 여는가 하면 스웨덴오픈 등 유럽 무대로 날아가 실력을 인정받는 등 온갖 노력을 기울인 끝에 1984년 파키스탄에서 열린 ATTU 총회에서 회원국이 됐다. 총회에서 북한은 기권을 위해 퇴장했다. ATTU는 새 회원국을 받아들일 때 회원국이 모두 찬성해야 하는 규정이 있었다.

국제 무대에서 중국의 등쌀에 밀리고 있던 대만은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역도 페더급에서 차이웬이가 동메달을 땄고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야구에서 은메달을 차지했다. 대만의 세 번째와 네 번째 올림픽 메달이었다.

다섯 번째는 탁구에서 나왔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여자 단식에서 천징이 은메달을 차지했다. 그는 1988년 서울 올림픽 때 자오즈민과 짝을 이뤄 한국의 양영자-현정화 조와 여자 복식 결승전을 치른 바 있다. 당시 국적은 중국이었다. 이후 다소 복잡한 과정을 거쳐 대만 선수가 됐고 1993년 예테보리(스웨덴)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여자 단식 결승에서 현정화에게 져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대만은 2000년 시드니 대회 때까지 올림픽 금메달을 구경하지 못했다. 숙원을 해결한 건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이었다. 천스신이 태권도 여자 49kg급에서 대만 스포츠 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시상대에 오른 그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자국 첫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라는 감격도 있었겠지만 시상식에서 청천백일기 대신 대만올림픽위원회기가 올라가는 가운데 국가 대신 국제올림픽위원회 ‘국기가’가 울려 퍼졌다.

이 대회에서 태권도 남자 58kg급 추무옌이 대만의 두 번째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됐다. 대만은 올림픽 통산 금메달 5개와 은메달 7개, 동메달 12개 가운데 태권도에서 금메달 2개와 은메달 1개, 동메달 5개를 수확했다.

아프가니스탄의 로훌라 니크파이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 태권도 남자 58kg급에서 동메달을 획득해 자국 사상 첫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됐다.

태권도는 이제 스포츠 약소국에 꿈과 희망을 주는 운동이 됐다. 진정한 한류인 것이다. 이번 대회 결과도 이를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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